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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88화 (88/157)

88화

“흠.”

작게 헛기침을 하자 담장 안쪽에서 웃음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윤이 도령 거기 있는가?”

“놀러 오라고 서신을 주시고 여즉 집 안에 계시는 건 무슨 심보입니까?”

윤은 작게 뭉친 눈 뭉치를 담장 안으로 휙 집어 던졌다. 안쪽에서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게 말이야. 내가 내기를 하였거든.”

“허……. 최 형이 부르시면 제가 달려오나 안 오나, 내기하셨습니까?”

“아니. 자네가 집 안으로 들어오나, 안 들어오나.”

“못 들어갑니다.”

“큰일 났구먼. 내가 내기에서 지면 덧없이 죽고, 이기면 자네와 다음을 기약하며 기쁘게 죽을 수 있을 것인데.”

영목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담장 안쪽에서 진한 피 냄새가 풍겨 왔다. 윤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담벼락을 걷어찼다. 먼지처럼 바스러진 담 너머, 중치막에 도포까지 눈처럼 새하얀 색으로만 잘도 골라서 차려입은 영목이 새하얀 눈밭 한가운데 앉아 윤을 반겼다. 목에서 줄줄 선혈을 흘리면서.

“무슨……. 뭐 하는……. 무슨 짓입니까!”

생각할 틈도 없이 담 안으로 들어온 윤은 버럭 소리 지르며 영목에게 다가갔다. 소복이 쌓인 눈에 옷자락이 젖든 말든 한 손으로는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영목을 가득 부여안고 다른 손을 덜덜 떨며 영목의 상처를 틀어막았다.

“아이고. 어질어질하던 참에 잘 되었다. 이게 뭔 짓인지는 인사부터 하고 듣게.”

영목은 이마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치는 윤의 품에 태연스럽게 기대면서 팔을 뻗어 곁에 선 사람을 가리켰다.

“우선, 이쪽은 남가 상단의 새 대방 마님일세. 자네와 서로 대면하고 인사는 나누어야 할 것 같아서.”

“최나은이오. 가끔 운종가를 지나다 뵈었는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소.”

경악하여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윤을 앞에 두고 영목도, 나은도 태연하기만 했다. 인사를 끝낸 나은이 옆으로 두어 발짝 물러났다. 영목이 나은의 뒤에 가려져 있던 물건을 가리켰다.

“저건 내가 고심 끝에 결정한 내 관짝. 저기 넣어서 단이 아씨 옆에 묻어 주어.”

꾹 다문 윤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졌다. 영목이 주르륵 흐르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 순간, 누군가가 영목의 손을 사납게 쳐 냈다.

“이제 영목의 것이 아니라 내 겁니다. 내 것에 손대지 말아요.”

영목이 혀를 끌끌대며 세경을 가리켰다.

“이 심사 뒤틀린 분은 내 스승님. 세경 마님.”

“세경 마님……. 왜…….”

더듬더듬 되묻는 윤을 향해 세경이 입꼬리를 비뚤게 틀어 올렸다.

“왜겠어요? 돌봐 주기로 약속한 도령이 어찌나 입이 짧고 허약한지. 영 마음에 들질 않으니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냉정하게 쏘아붙인 세경이 팔을 휘저어 쏟아지는 함박눈을 쳐 냈다.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눈까지 난리야.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윤은 망연한 눈으로 자신의 손 틈새로 흘러나오는 영목의 피와 저를 내려다보는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목의 목에서 흘러나온 붉고 뜨거운 액체가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새빨간 웅덩이를 그렸다. 연화문을 새겨 넣어 멋을 부린 미색 돌담도, 그 위에 켜켜이 얹힌 검은 기와도, 윤이 살뜰히 관리했던 굽이진 소나무도 모두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눈 깜빡이는 것도 잊고 주룩주룩 눈물만 쏟아 내던 윤이 영목을 안은 채로 무릎을 꿇었다.

“이러…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먹으라는 대로 다 먹고, 씹으라 하시면 씹고, 삼키라면 삼키겠습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여길 물고 씹어 삼키세요.”

둘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세경이 영목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마시라고.”

도리질을 친 윤이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오는 영목의 상처를 손으로 더욱 꾹 눌러 지혈했다. 윤의 흐느낌에 세경의 비웃음이 섞였다. 윤이 흐트러진 발음으로 물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왜겠어요. 이 피를 마셔야 도령이 영목이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하는 짓이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떠들 시간에 냉큼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내 제자나 남의 제자나 참 말을 안 들어.”

세경이 윤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영목의 상처 위로 밀어 눌렀다. 윤은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윤이 도령.”

마구 흔들리는 그의 얼굴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윤의 몸부림이 뚝 멎었다.

“사양치 말고 양껏 자시게. 자네가 아니 먹겠다고 버티면 나는 자해하여 명 앞당긴 미친놈으로 개죽음이야.”

“이러지 마세요……. 내게 이러시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가혹할 게 무어 있나? 그동안은 내가 자네에게 잇자국을 내었으니 이제 자네가 내게 해 보라고. 공평하게.”

세경이 짓누르고 영목이 어르는데도 윤은 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힘주어 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하는 수 없이 영목은 끝내 숨기려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네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나는 자네가 옥고에 못 이겨 죽은 줄 알았어. 아니면 타 죽었거나. 어느 쪽이든 더없이 아팠겠구나 싶어서… 그래서 강자영이 내 발목을 잡으려고 먹이는 앵속을 넙죽넙죽 다 받아먹었네. 나도 자네만큼은 아파야 할 것 같았거든.”

“…….”

“덕분에 배 속이 다 문드러져서 곧 죽을 목숨이 되어버렸지, 뭐. 어차피 죽을 거, 힘닿는 데까지 복수나 좀 하다가 자네 뒤를 따라갈 작정이었어. 기꺼이, 기쁘게.”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영목은 비로소 남인혜의 마지막을 완전히 이해했다. 기꺼이, 기쁘게 죽음을 기다린다는 말을. 영목은 늦은 깨달음을 실없는 농담으로 묻어버리고 실없이 웃었다.

“자네가 이리 버젓이 잘 살아 있을 줄 알았다면 몸에 좋은 것 챙겨 먹고살 걸. 에잉.”

꾹 감고 있던 윤의 눈이 후회와 원망을 담고 영목을 향했다. 내내 윤만을 바라보고 있던 영목의 눈동자가 그를 맞았다.

“계속 버틸 겐가? 이제 내 몸은 더 나아질 가망이 없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곧 꺼질 내 목숨으로 자네 요기나 이바지하고 싶어. 제발 마시게.”

거절할 수 없는 부탁 앞에서 윤은 더 이상 고개도 젓지 못하고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죽음을 앞두고 흐려지던 영목의 눈에 슬그머니 웃음기가 돌았다.

“일평생 실실 쪼개고 다녔네마는 사실 정말 웃고 싶은 날은 썩 많지 아니하였는데 말이야… 돌이켜 보니 내가 진심으로 웃고 행복했던 모든 날에 자네가 있더군. 자네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즐겁고 기쁘고 설레었어.”

담담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나는 싫다는 자네 입에 굳이 내 피를 대어 주려는 걸세. 이렇게 하면 자네가 다시 태어난 나를 기억할 수 있대.”

윤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세경을 쳐다보았다. 세경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의 입에서 비탄 어린 신음이 흘러나오자 영목은 길게 입꼬리를 늘였다.

“이제야 알아들었구만. 나는 다음 생에도 자네 앞에 나타날 거라고. 비단 목도리 하나 달라 했던 그날처럼 뻔뻔하게 이거 사 달라 저거 내놔라 할 테니까 다시 만날 때까지 돈 많이 벌어 두게나.”

“언제 돌아오실 건지 말하고 가십시오.”

“거, 사람 참. 내가 자네 만나러 갈 때 언제 기별하고 찾아갔던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자네 이름을 부를 때, 고운 얼굴로 돌아봐 주면 될 것을.”

영목의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세경이 지혈 중이던 윤의 손을 끌어 내렸다. 떼지 않으면 잘라내기라도 할 것처럼 우악스러운 기세였다. 상처를 막고 있던 손이 사라지자마자 붉은 피가 흰 눈 위로 쏟아져 내렸다.

세경이 코웃음 치며 윤을 비웃었다.

“내 제지는 지금 제 목숨도 미래도 다 걸었는데, 도령은 고작 입 벌릴 용기가 없나?”

윤의 입술이 마침내 영목의 목에 닿았다. 울컥 솟아 나온 피가 입술 안으로 흘러들자 윤이 몸을 굳혔다. 영목은 마지막 힘을 다해 윤의 옷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

“자네가 창피해할 정도로 자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찾아가겠네. 좋은 날을 고르고 골라서, 윤이 도령! 하고.”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목이 흘리는 피에 윤이 하염없이 쏟아 내는 눈물이 섞였다.

“만일 내가 좀 늦어지거든… 자네 이름을 외치기엔 아직 덜 좋은 날인가 보다 하면서 기다려 주게.”

“약속하신 겁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 내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며 ‘윤이 도령’ 하고 불러 주시기로.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영목이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대답했다. 윤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윤은 화살에 꿰뚫린 짐승처럼 몸을 떨며 억눌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경이 영목과 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와 영목이 내기를 하였습니다. 다시 태어난 영목이 그대를 기억하면 나는 그대를 온전히 영목에게 돌려줄 거예요. 그 전까지 그대는 나의 것입니다.”

이런 내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윤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기분으로 식어 가는 영목의 몸을 끌어안고 그와 얼굴을 맞댔다. 그의 얼굴에 뺨을 부빌 때마다 어찌 이리 날로 차가워지는가, 하면서 핀잔하던 영목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 울고 보내 주어요. 영목은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세상에서 함께하고 싶은 듯하니.”

“나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세상이 언제입니까? 어떤 세상입니까?”

“그게 최영목이 도련님에게 남긴 숙제요.”

대답은 세경이 아니라 나은에게서 흘러나왔다.

“일어나시오. 이제 그이를 관에 눕힐 차례요.”

멀찍이 서서 관을 지키던 나은이 다가와 윤을 채근했다. 윤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영목을 관 안에 눕혔다. 영목에게서 손을 떼지 못하는 그의 어깨 너머에서 담담한 나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남가 상단 대행수 김가의 영목. 장례는 김영목으로 치러질 거요. 최영목이라는 원래 이름은 온전히 도련님의 몫이라는 말이지.”

나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이 윤은 끝없이 영목만 불렀다.

“최 형.”

이렇게 부르면 동그란 눈을 초승달처럼 접으며 돌아봐 주던 사람. 항상 윤보다 한 걸음 앞에 서 있던 사람. 최영목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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