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도령에게 우리 영목이의 피를 빨게 하겠다고? 하! 내가 팔다리를 죄다 뜯어 굶주린 짐승 굴에 처넣고 본능을 긁어 대도 제대로 된 사냥은커녕 토악질만 하는 그 도령이 퍽이나.”
“세상에. 보호해 달라 부탁드렸더니 우리 윤이 도령에게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어려운 부탁 중이라는 것도 잊고 영목이 언성을 높였다. 세경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턱을 치켜들고 되물었다.
“내가 종일 도령과 붙어 다닐 수는 없잖아요?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제 몸 제가 추스를 수 있어야 하잖아.”
“자기 몸 자기가 추스르라면서 사지를 뜯으시는 건 뭐예요?”
“뭐긴, 훈련이고 보호지.”
“와…….”
“알아서 먹고 마시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 이것만큼 제대로 된 보호가 어디 있죠?”
영목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인간이 올린 기도와 제사는 결국 신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대개의 경우 신의 방식은 인간이 짐작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완성되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깨지기 쉬운 옥을 다루듯이 윤을 보호해 달라는 뜻이었건만, 세경은 그를 강철을 제련하는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녹이고, 두드리고, 벼려야 하는 강철처럼.
‘내가 윤이 도령에게 또 몹쓸 짓을 했어…….’
영목이 자괴감으로 마구 몸부림을 쳤다. 세경은 영목이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코웃음을 쳤다. 민재와 함께 깊이 탄식하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하던 말을 이어 갔다.
“기억의 의식에는 모두 세 명이 필요합니다. 기억할 사람과 기억될 사람, 그리고 영생을 사는 증인.”
불란서 의사 선생의 손을 들어 저 멀리, 윤이 잠들어 있는 서릿재와 바로 앞의 영목을 가리켰다. 그리고 평상에 앉은 세경을 향해 두 손을 펼쳤다.
“세경 마님은 영생을 사는 증인 역할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거절하겠어요. 나는 보기보다 섬세한 용이랍니다. 핏덩이 때부터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며 키운 내 제자가 서양 창귀에게 목을 내어 주는 걸 지켜보는 고약한 취미는 없어.”
영목은 세경의 곁으로 쭐래쭐래 다가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스승님이 증인이 되어 주시지 않으면 저는 그냥 앵속에 찌들어 요절한 쓰레기로 죽는데요?”
“그렇게 증인이 필요하면 저 물러 터진 도깨비한테나 시켜요! 왜 나한테 이래?”
“비형랑 어르신은 피를 무서워하시니까.”
세경이 영목에게 약초를 한 움큼 집어 뿌렸다. 영목은 그녀가 던지는 약초들을 묵묵히 맞고 서서 덤덤히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면 저는 다음 생을 기약하게 됩니다. 단순히 윤이 도령과의 인연을 이어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래요.”
“아니면?”
“증인의 소원까지 안고 다음 생을 이어 간대요.”
“난 소원 같은 거 없어요.”
“있으시잖아요. 보잘것없는 꼬맹이가 죽을힘을 다해 뛰고 때리면서 대들보에 덤비는 과정을 구경하는 거.”
세경은 이를 악물고 영목에게 약재들을 죄다 집어 던졌다. 윤과 영목이 열심히 다듬었던 약재들이 영목의 몸에 부딪쳤다가 서래원 마당을 나뒹굴었다. 영목은 세경의 화풀이를 꿋꿋하게 받아 내며 제 할 말을 했다.
“증인이 되어 주세요. 그래야 스승님께서 제게 바라시던 거, 대들보를 부수라는 그 약속까지 이어 갈 수 있게 됩니다.”
“대들보고 나발이고, 정인인지 서방인지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라고나 할 걸 그랬지!”
세경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영목을 흘기면서 진심을 내뱉었다. 뾰족하고 모진 음성에는 원망이 아니라 안타까움과 미안함만이 가득이었다.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영목을 노려보다가 아침 첫 햇빛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버렸다.
“스승님… 도망가 버리셨네요.”
“문세경이 저 눈깔은 알았다는 뜻이야. 증인인지 뭔지 너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것 같으니 마음 놔도 되겄다, 영목아.”
민재가 영목의 어깨를 감싸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고개를 주억인 영목은 맑은 황금빛 햇살을 눈에 담으며 불란서 의사 선생과 민재를 향해 부탁했다.
“우리 윤이 도령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한성으로 돌아가 주변을 정리하는 대로 서신을 보낼 건데…….”
영목이 앞으로 팔을 쭉 내뻗었다. 그의 손바닥 안에 따스한 아침 햇살이 가득 고였다. 영목에게는 온기이지만 윤에게는 독보다 더한 고통. 윤의 몸에 닿으면 안 될 것. 더 이상 둘이 나란히 서 있을 수 없는 시간이 영목의 손을 밝혔다.
긴 한숨으로 손바닥에 담은 햇살을 흩어 낸 영목이 민재에게 당부했다.
“윤이 도령이 해 지자마자 연수산을 출발하여 한성에서 의식을 마치고 해 뜨기 전에 연수산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되도록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어르신이 도와주세요.”
“오냐. 여차하면 내가 옆구리에 끼고 날아가마.”
“고맙습니다. 남가 상단 대방 마님이 바뀌었으니 한번 들르셔서 창고 열리는 법을 다시 살펴 주시고요.”
“알았어.”
“윤이 도령 잘 부탁드려요.”
민재와 불란서 의사 선생은 염려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목은 윤이 저보다는 나은 스승을 얻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삭였다. 세경이 아무리 윤을 험하게 굴리더라도 불란서 의사 선생이 지켜 주리라 생각하니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저는 두 분만 믿고 갑니다.”
더없이 공손히 공수한 영목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치고 머리를 들어 올리던 영목은 씨익 웃으면서 옷자락을 멋지게 떨쳤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두 남자에게 큰절을 올렸다.
“또 뵙겠습니다.”
땅 위에 포갠 손등에 이마를 댄 순간 영목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연수산과의 이별이었다.
* * *
연수산 산등성이마다 소복하게 쌓인 낙엽 위로 새하얀 함박눈이 내리던 날, 남가 상단에서 서릿재로 서신 한 통이 도착했다. 민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세경에게 찾아가 서신을 내밀었다.
“저리 치워요! 재수가 없으려니, 좋은 소식 전하는 까치는 간데없고 곰탱이 같은 도깨비나 얼쩡거리네! 짜증 나게!”
세경은 새하얀 종이를 건네는 민재에게 괜한 패악질을 부리다가 훌쩍 사라져 버렸다. 민재는 그녀가 향하고 있을 한성 북촌 쪽을 향해 길고 긴 한숨을 흘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양이 잦아들고,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 윤이 눈을 뜨는 시간이었다.
“천 근보다도 이 서신 한 장이 더 무겁구나, 영목아.”
민재는 걸음마다 한숨에 한숨을 더하면서 윤의 방으로 향했다.
“도령, 영목이한테서 뭐가 왔어.”
갓 잠을 깬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앉아 그가 내민 서신을 펼쳤다.
[자네가 잠든 사이, 서릿재 어르신께서 길을 줄여 두셨다네. 어서 놀러 오게.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으니까.
마지막 문장을 손으로 쓰다듬고 또 쓰다듬던 윤은 서신을 품에 안고 달릴 듯이 문을 나섰다. 민재가 재주 좋게 윤의 뒷덜미를 잡아채 집 안으로 당겨 왔다.
“어르신, 놓아주십시오. 제가 좀 급합니다.”
“너만큼 나도 급하다.”
하나도 급하지 않은 말투로 대꾸한 민재가 윤에게 옷 한 벌을 내밀었다.
“마음에 담은 이를 만나러 갈 때엔 그이의 마음에 쏙 들어갈 정도로 차려입는 거다, 인마.”
민재가 곱게 쪽물 들인 명주 도포를 설설 흔들었다.
“한겨울에 쪽빛이 웬 말입니까? 이 두께 또한 겨울옷이 아니잖아요.”
“네게 이렇게 빨리 입히게 될 줄 몰랐으니 그렇지.”
“예?”
“됐고, 그냥 입어.”
윤은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저어 가며 사양했다. 하지만 멋 부리기 좋아하는 도깨비는 기어코 윤을 잡아끌어 엷은 하늘색 바지저고리부터 시작해 푸른색이 조금씩 진해지도록 겹겹이 옷을 덧입히기 시작했다.
반항하는 윤의 팔을 번쩍 잡아 올린 민재가 검정에 가까운 남색 답호를 억지로 윤의 몸에 걸치고 암적색 세조대까지 둘러 주었다. 윤의 힘으로는 덩치 큰 도깨비를 이길 수가 없었다. 몸부림쳐 봤자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윤이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어유. 애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다.”
체념한 윤을 보며 킬킬거린 민재가 윤에게 자르르 윤기 도는 새카만 말총 흑립을 씌우고 백옥 갓끈의 모양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바지 허리끈에 산호 구슬 달린 비단 주머니까지 달아 준 뒤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쏙 드는구만. 영목이가 좋아하겄다.”
이 많은 사치품들을 아무렇지 않게 허공에서 쑥쑥 꺼내 드는 것만 보아도 참 대단한 도깨비이긴 했다. 산호 구슬을 매만지면서 윤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어르신, 오늘 베풀어 주신 이것은 제가 꼭…….”
“갚는다니 뭐니 하는 소리 하려거든 그냥 입 다물어.”
“…….”
재주 좋게 윤의 입을 다물린 민재는 그의 등을 슬슬 밀면서 줄인 길을 더 짧게 줄여 함께 걸었다. 채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그들은 벌써 연수산 입석 앞에 서 있었다. 휘둥그레 눈을 뜨는 윤에게 웃어 보이면서 민재는 마지막으로 그의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정리해 준 뒤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영목이가 요전번에 연수산 왔을 때, 나한테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잔소리를 하더라.”
“최 형이 어르신께요?”
“그래. 조선에서 제일 좋은 옷감만 골라 제일 곱게 차려입고 다니던 도령에게 남이 입다 버린 것 같은 넝마 쪼가리에 맞지도 않는 신발 걸치고 다니게 한다면서. 어후, 어찌나 타박하던지.”
더 할 말도, 더 들을 말도 없다는 듯 윤을 휙 돌려세운 민재가 가볍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몇 발짝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범산 산군이 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렴. 영목이가 소를 한 마리 통째로 잡아 뇌물을 바쳤단다. 밤은 짧아도 너무 짧으니 도령을 좀 빨리 데려다 달라고.”
윤이 드물고도 드문 함박웃음을 입에 걸고 산군의 손을 마주 잡았다. 휘휘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하던 민재는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마자 곧바로 몸을 웅크려 눈물을 숨겼다.
민재와 산군의 도움을 받아 윤은 순식간에 돈의문 앞까지 도착했다. 굳게 닫힌 성문을 쳐다보며 꿀꺽 침을 삼킨 그는 주변을 한 번 살피고 힘껏 땅을 박찼다. 이제 윤은 인간이 만든 성벽 정도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절벽에서 떠미는 세경 마님의 훈련 아닌 훈련에 적응한 덕일까.’
그는 세경의 모진 가르침에 처음으로 감사하면서 순찰을 도는 순라꾼들의 눈을 피해 북촌으로 달렸다.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눈도, 그저 암담하기만 했던 깊은 밤도 오늘만큼은 죄다 아름답기만 했다. 윤의 그림자가 윤보다 앞서 그가 달릴 길 위에 쌓인 눈을 치웠다. 익살맞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윤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함박웃음을 머금은 그는 이내 남가 상단을 크게 돌아 자신이 머물던 사랑채의 담장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