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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83화 (83/157)

83화

“세상에. 우리 집에 이런 곳이 있었소?”

“더한 것도 많아. 몸 나으면 다 알려 줄 테니 그저 건강해지기만 해.”

“진작 좀 알려 주지.”

단은 건강해지겠다는 빈말조차 하지 않았다.

어둑한 통로를 빠져나온 영목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길을 달리는데, 단이 힘없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툭 때렸다.

“너무 꽉 안진 마시오. 오라버니 뵈려고 오랜만에 예쁘게 차려입은 옷이 구겨지면 안 되니까.”

“하……. 오라비나 동생이나 하나같이 까탈스러워서는.”

영목이 투덜대자 단이 까르르 웃었다.

“이상한 데서 웃는 것까지 남매가 똑같네.”

“영목 오라버니가 재미있으니 웃지.”

“됐고, 떨어지지 않도록 내 옷을 꽉 붙들어. 지금보다도 더 빨리 달려갈 거야.”

그는 단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틀어 몇 번이나 핏덩이를 뱉어 내면서 죽을힘을 다해 산길을 달렸다. 범산에서 연수산까지는 나뭇가지만 꺾으면 금방이라, 지름길을 걸으며 찢어질 것처럼 비틀리던 속을 가까스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거친 숨을 가다듬은 영목은 연수산 입석 앞에 멈춰 서서 단을 고쳐 안았다.

“단아, 윤이 도령을 크게 불러라.”

“으응? 왜 산 안으로 들어가지 않구?”

“큰 신에게 허락받지 못한 사람은 연수산의 입석을 지나갈 수 없어. 허락을 기다리느니 만날 사람을 불러내는 게 빠르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단이 입 옆으로 손을 모았다.

“오라버니. 단아가 왔습니다.”

“아이고. 개미 오라버닌가? 고렇게 개미 소리만 하게 말하는 게 퍽이나 들리겄다.”

단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장난스레 핀잔했지만 영목도 이제 단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았다. 입술을 물어 울음을 삼킨 영목은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우렁차게 외쳤다.

“윤이 도령! 나 약속 지켰네! 단이 아씨 업고 왔다고!”

영목의 음성이 산 메아리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라버니는 나를 예까지 안고 왔잖소? 왜 업고 왔대?”

“쉿.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키득거리던 단의 시선이 일순, 영목의 어깨 너머로 못 박히듯 굳었다.

“오라버니.”

“…단아야.”

영목은 입을 꾹 닫고 윤의 품에 단을 안겨 주었다. 단의 몸을 받아 안은 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입석 아래 앉았다. 그는 단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쓸어 주며 다정히 물었다.

“왜 이제 왔어. 우리 단아는 오라버니가 보고 싶지 않았나 보구나.”

“그럴 리가 있나요. 오라버니 보려고 영목 오라버니 졸라서 이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온걸요.”

“단이 아씨는 편안히 안겨 있고 내가 죽도록 달렸지, 내가.”

영목이 툭 끼어들었다. 친남매보다도 더 닮은 단과 윤이 동시에 영목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단아, 지난겨울에는 몸 조심히 숨어 있었니? 최 형과는 어디서 만났던 거야?”

“숲을 헤맸어요. 산 벌레에 아주 많이 물렸는데… 영목 오라버니가 다 잡아서 태웠어요. 저는 발로 막 밟았구요.”

윤이 얼굴을 찡그리며 영목을 흘겨보았다.

“…최 형은 애한테 그런 놀이를 시킵니까?”

“재미있었어요. 다 밟고 나서 영목 오라버니가 구석구석 발을 씻겨 주셨고요.”

“우리 단아… 발은 혼자 씻을 나이도 되었는데.”

살갑게 단의 뺨을 쓸고 머리를 넘겨 주던 윤이 짐짓 한탄하자 단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잔기침으로, 잔기침이 폐부를 다 토해 낼 듯한 각혈로 이어졌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윤은 침착하게 소맷자락으로 단의 입가와 얼굴을 닦아 주며 수없이 괜찮다 속삭였다. 숨넘어갈 듯 기침하던 단은 호흡이 진정되자마자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으로 영목을 가리켰다.

“그리고 영목 오라버니와 혼인하였어요. 제가 영목 오라버니께 시집가겠다 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소원을 이루었답니다.”

“그 사람은 안 된다고, 좋은 사람 고르고 골라 좋은 집에 좋은 물건 그득그득 채워 시집보내 주겠다고 천 번쯤 말했건만.”

단이 씩 웃었다.

“어수선한 시절이 지나가거든 조카 보러 오시어요.”

“…아이가 있더냐.”

“아주 건강한 아들을 낳았지요.”

많은 물음이 담긴 윤의 시선에 영목은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윤은 숲을 헤매고 벌레를 밟아 죽였다던 단의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영목도, 단도 여인. 하늘이 뒤집혀도 둘 사이에선 아이가 생길 수 없다.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윤이 비틀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오라버니 웃으시는 거 보고 싶은데.”

단이 흐린 눈으로 흔들리는 손을 뻗었다. 허공을 노려보던 윤은 단이 내민 손을 감싸 쥐고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단이 더없이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덕에 단아는 타고난 복 이상으로 귀애받다 갑니다.”

“가기는 어딜 간다고 그래. 너 이제 고작 열다섯이다. 이리 서두를 게 무어냐. 응?”

“오라버니에게 응석을 부릴 때마다 생각했답니다. 이렇게 홀로 세상 귀여움 독차지하다가는 벌받을 거야, 하고요. 이제라도 다른 단아들과 오라버니를 나누어야겠어요.”

윤이 절레절레 도리질 쳤다. 하지만 초점을 잃은 단의 눈에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열이 올라 하얗게 마른 입술이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윤에게 당부했다.

“오라버니, 세상 모든 단이들을 볼 때마다 저를 떠올려 주세요. 문 앞에 버려진 저를 가엾이 여기시었듯 세상 모든 단이들도 그리 살펴 주세요.”

“단아. 단아. 이리 가면 아니 된다.”

“약속하신 거여요.”

흐릿하게 웃음 띤 단의 입술이 마지막 숨을 흘렸다. 윤은 병들어 뜨겁게 열 올랐던 누이의 몸이 차게 식어 굳을 때까지 메마른 몸을 품에서 놓지 못했다.

윤은 죽은 누이를 안고 한껏 몸을 웅크렸다. 영목이 가만히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윤은 울지 않았다. 텅 빈 눈으로 파리하게 굳어 가는 단을 꼭 껴안고 그녀의 쪽 진 머리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진달래색 댕기가 예쁘냐, 동백색 댕기가 예쁘냐 하던 아이가… 언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언제 아이를 낳았니. 단아. 우리 단아가.”

영목은 복잡한 눈으로 윤을 응시했다. 저의 죽음 또한 그리 머지않았다. 강자영이 먹인 앵속이, 제때 해독하지 못하고 몸속 깊이 쌓여 버린 독이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나까지 떠나면… 윤이 도령은 어떻게 될까. 견딜 수 있을까.’

영목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으로 가늘게 떨리는 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만 일어서게. 단이가 오랜만에 오라버니 만나러 가는데 옷 구겨지면 아니 된다고 어찌나 잔소리를 했는데, 고운 모습 보고 헤어져야지.”

윤이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이는 내가 안고 있을 테니 머리카락도 넘겨 주고, 뺨도 한 번 쓸어 주고… 곱게 인사해.”

윤은 다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영목이 단을 내어 달라며 팔을 벌리는데도 그는 죽은 동생을 부둥켜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열세 살 아해가 겪을 일은 아니었지. 열네 살 소녀가 짊어지기엔 벅찬 일이었고.”

“…….”

“열다섯 살 단이 아씨 살기엔 이승이 너무 벅차고 더러워 더 좋은 세상으로 간 것이라 생각하세나.”

그제야 윤은 놓으면 사라질 것처럼 꽉 붙잡고 있던 단을 영목의 품에 안겨 주었다.

“최 형은… 최 형만은 오래도록 건강하셔야 합니다. 네?”

윤의 눈동자는 눈물 한 방울 없이, 툭 치면 바스라질 것 같은 늦가을 낙엽같이 위태로웠다. 영목은 불안한 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걱정은 말아. 한성에서 그럴싸하게 초상 치르자마자 곧장 단이 관 들고 범산으로 가겠네. 자네가 진짜 상주니까 제일 좋은 묫자리로 예쁘게 다져 놓고 있어.”

윤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영목은 마른 입술을 질끈 물었다.

너는 지엄한 저승의 법도를 어지럽힌 대가로 너를 중히 여기던 사람의 모든 죽음에 고통받을 것이다.

비웃음 섞인 강림도령의 음성이 온 산에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 * *

영목과 윤은 단을 범산의 가장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단은 영목의 어미와 윤의 어미가 잠든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낳아 준 어머니와 키워 준 어머니의 사이에 너무 이르게 진 목숨이 새 봉분으로 피어났다.

“영상, 우상이 남가의 문짝까지 다 떼어 가면서 남가의 선산도 쑥대밭으로 만들었네. 도저히 묫자리로 쓰지 못할 상태라는 핑계로 내가 우의정 집 한복판에 묫자리를 다지고 당상관 어르신의 무덤을 만들었지. 대방 마님도 그 곁에 묻으려 했는데… 영의정 영감이 생지랄을 떠는 통에 대방 마님은 어쩔 수 없이 이리로 모셨네.”

윤은 여전히 울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평소의 그가 곧은 대나무 같았다면 단이 떠난 이후의 윤은 병들어 마른 고목 같았다. 모진 풍파에 못 이겨 외피는 단단하지만 속은 썩어 텅 비어 버린 고목.

세 개의 봉분 앞에 차례대로 술을 올리는 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영목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큰일이네. 저기에 내 무덤이 더해졌을 때엔 윤이 도령 옆에 아무도 없을 터인데.’

걱정이 앞서자 영목은 조금 더 바빠졌다. 영의정의 장남이 조금씩 더 큰 빚을 지도록 꾀고, 검계를 더 활발히 움직였다. 검계를 팔도 민란 모두에 투입해 날뛰게 하는 대신 담무회를 수면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담무회는 남촌 한구석에 버젓한 사무소까지 차린 어엿한 보부상 단체가 되었다.

영의정이 개판이 되어 가는 집안 꼴과 조정 꼴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영목은 번갯불에 콩 굽듯 나은에게 대방의 금색 증명 패를 넘겨 버렸다.

“실성하였소? 내 무엇을 믿고 이걸 내게 주오?”

“나는 죽었다 깨나도 장부랑 씨름할 머리가 안 돼요. 사개송도치부법 소리만 들으면 구역질이 난다니까? 사람은 저한테 맞는 옷을 입고 살아야지.”

“아무리 그래도 이걸…….”

“대방 마님 또한 대방 마님의 자리에는 ‘마님’일 수 있는 사람이 앉길 바라셨을 겁니다.”

영목의 그 말에 나은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증명 패를 받아 들었다. 날로 혼란스러워지는 담장 밖과 달리, 새 주인을 맞은 남가 상단은 보다 안정되어 갔다.

한성에서의 급한 일을 대충 정리하자마자 영목은 곧장 연수산으로 떠날 차비를 했다. 혹시라도 윤이 허튼짓을 하진 않을지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얼른 연수산 가서 비형랑께 나은 아씨가 새 대방이 되었으니 창고 문 여는 것 좀 살펴 달라고 말하겠습니다.”

“정인 만나러 가면서 내 핑계 대긴.”

“겸사겸사.”

영목이 씩 웃으면서 뒤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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