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윤이 벌컥 화를 냈다.
“왜 말리셨습니까! 최 형까지 휘말릴 이유는 없습니다!”
“자네가 저놈 신발에 이마를 댈 이유도 없지. 우리 윤이 도령 이마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닐세. 지지야.”
영목은 크게 들썩이는 윤의 어깨를 토닥이고 다시 그와 손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열 살짜리 어린애처럼 신나게 밤의 숲을 걷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팔을 휘휘 흔들며 걷는 영목에게 끌려가면서 윤은 핏기가 가시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우리 둘 다 제 성질 못 죽여서 세상 둘도 없는 천치 짓을 했구만.”
“천치 짓이란 걸 아시는 분이 왜 제게 휘말려서 화를 당하십니까.”
“죽기 직전에 짧게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한다잖아.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꼭 만나게 되리라는 이야기 아닌가? 이게 어찌 화야. 축복이지.”
“…하.”
“후회하긴 늦었고, 후련하니 됐지, 뭐.”
조금 앞서 걷던 영목이 윤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칭찬해 주게.”
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영목은 뻔뻔스레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때 그 처녀 귀신에게 했던 것처럼 잘했다고 칭찬해 줘. 나도 칭찬받고 싶네.”
“…잘하셨습니다.”
마지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영목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자네도 잘했네. 우리 둘 다 쌍으로 잘들 하는 짓이야.”
영목은 바로 곁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윤의 손이 영목의 뺨을 감쌌다.
“말씀은 그리 하시면서 기분은 아주 좋아 보이시네요.”
“기분이 좋고말고. 꼿꼿하신 윤이 도령이 내가 걸린 일엔 고민도 없이 이마를 조아릴 수 있는 사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더한 짓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 마.”
영목이 몇 번이나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윤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최 형뿐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단이 아씨 들으면 섭섭해서 석 달 열흘은 운다.”
윤은 농담으로 넘기려는 영목을 붙잡고 진심을 다해 애원했다.
“나는 뭐든 할 겁니다. 이제 나는 최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고, 무서운 괴물이에요. 그러니 최 형께서는 내 걱정일랑 마시고 그저 보중하세요. 제발.”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챙기네. 자네 몫까지 야무지게 챙길 거니까 기대하라고.”
“…무슨 짓을 하시려고요!”
영목은 퍽 짓궂은 얼굴로 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궁금하면 찾아와. 집 안으로 안 들어올 거면 문밖에서 만나면 되겠구만.”
“최 형…….”
“아. 그리고 잠깐 허리 좀 숙여 보게.”
시름 깊은 얼굴이 영목의 눈높이로 내려왔다. 영목은 윤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의 목뒤를 감싸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무방비하게 끌려오던 윤이 힘주어 버티자 영목은 그를 핏 비웃고는 고개를 기울여 그와 입술을 포갰다.
“보고 싶었네.”
영목이 앙다문 입술을 느릿하게 비비며 속삭였다. 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립지 않은 순간이 없었네만… 버선코를 볼 때마다, 철벅이는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유난히 보고 싶더군.”
굳게 닫혀 있던 윤의 입술이 잔웃음을 흘리며 작은 틈을 벌렸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던 영목은 도리어 제가 윤에게 가득 먹히고 물리고 빨리었다. 휘청, 영목의 허리에서 힘이 풀리자 윤은 영목의 허리를 틀어쥐고 제게로 잡아당기며 더 깊이 몸을 맞댔다.
갈급하게 영목의 숨결을 탐하던 윤은 저도 모르게 영목의 젖은 점막에 이를 세우다가 퍼뜩 몸을 물렀다.
“거참. 한창 좋았구만.”
“방금 제게 잡아먹힐 뻔하셨습니다!”
“아… 그거야말로 꽤 좋을 뻔했는데.”
“농담으로도 그런 말씀 마세요.”
영목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밥이나 잘 챙겨 먹고 있어. 먹든 먹히든 입 벌리고 달려들고 싶어도 자네 꼴이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으니 덤빌 수가 있어야지.”
“…누가 할 소릴.”
“뽀얗고 훤하던 사람이 병자처럼 이게 뭐냔 말일세. 보나마나 비리다고, 물컹하다고 이것저것 가리며 안 먹은 게지?”
이제는 영목의 몸이 윤보다 가늘고 윤보다 작았다. 저도 알고 윤도 아는 것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어린애에게 잔소리하듯 타박하는 영목의 모습을 보며 윤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가 웃자 영목은 더 신나게 과한 염려를 퍼부었다.
“내가 저기 범산 호랑이라도 잡아 줄까? 연일 기방에서 농탕질 치는 놈들 말로는 호랑이 피가 정력이랑 몸보신에 그렇게 좋다던데.”
“됐습니다.”
“서양 창귀가 식사하는 걸 구경하고 싶어서 그래.”
“그럼 더 싫습니다.”
윤이 단풍잎을 한 움큼 쥐어 영목의 정수리 위로 후드득 쏟아부었다. 영목은 풋풋한 숲의 향기를 머금은 마른 잎의 비를 맞으며 윤의 뺨을 쿡쿡 찔렀다.
“자네는 평생 이 모습일 거고, 나만 홀로 쭈글쭈글 늙어 갈 거 아닌가? 자네도 내게 보이기 싫은 모습 한둘쯤은 보여 줘야 공평하지.”
윤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왜애. 겸상하자는 말은 안 할게.”
“싫습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도 마세요.”
“오죽 걱정되면 이런 농담을 하겠나.”
원망과 욕망이 비슷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영목을 바라보던 윤이 가만히 그의 얼굴에 뺨을 맞댔다.
“더 걱정해 주세요. 걱정하고 염려하며 참고 참다 만나러 와 주세요.”
“세상에. 무기 나으리 말로는 자네가 온 동네 아씨들 다 후리고 다닌다더니… 정말로 사람 홀리는 언변이 몰라보게 늘었구만.”
“제 소식도 그렇게 빠짐없이 챙겨 주시고요.”
뺨을 맞대었던 얼굴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닿을 듯 말 듯 코끝을 부비면서 윤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돌아서시는 그 순간부터 그리울 겁니다.”
“…정말 연수산에만 틀어박혀 있으려고?”
“네. 이러다간 사람을 크게 해할 것 같아서요.”
“피 냄새를 못 견디겠나?”
“네.”
영목은 아까부터 유난히 울컥이던 그의 목울대를 손마디로 어루만졌다. 윤의 목에서 짐승이 앓는 것 같은 신음이 흘렀다.
“내 피라도 좀 줄까?”
“그런 말씀은 농담으로도 하지 마세요.”
“진심인데. 내 자네에게 이 정도도 못 해 줄까.”
“진심이시라면 목이 아니라 아래를 대어 주시는 게 빠를 텐데요.”
윤이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기다란 속눈썹 그늘 아래 드러난 눈동자는 보석 같은 노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 어……?”
“이상하지요. 다른 피 냄새는 구역질이 먼저 나는데 최 형의 것은 저 멀리서부터 달큼하게 느껴지니.”
“…….”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서래원에서 노박 열매 챙겨 오겠습니다.”
윤이 영목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얼굴에는 흐릿하지만 확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니, 내가 달거리인 건 어떻게 그렇게 매번 귀신같이……!”
“귀신이잖습니까. 서양 창귀인걸요.”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영목이 윤의 등 뒤로 낙엽을 한 움큼 집어 뿌렸다.
“내가 추잡스러운 소리 하면 빨개지던 귀여운 도련님은 어디 갔나?”
“피에 굶주린 괴물에게 먹혀 없어진 모양이지요.”
영목은 냅다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나 아픈 것은 제 손뿐이었다. 영목이 인상을 찌푸리며 화끈대는 손을 흔들자 윤이 영목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아프지도 다치지도 마십시오.”
“늦었네. 한 1년쯤은 너끈히 늦었어.”
함께 있을 때에는 순식간에 지나갔던 시간이었건만. 떨어져 있는 동안은 몇 배나 길고 괴로웠다. 영목은 윤의 손등에 난 흉터를 엄지로 쓰다듬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많이 힘든가? 그거… 배고픈 거.”
“윤이 도령일 때는 굶주림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몰랐습니다.”
“자네 마치 지금은 윤이 도령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지금은 그저 불란서 의사 선생에게 더부살이하며 연수산 잡일이나 처리하는 군식구니까요.”
“내게 자네는 항상 윤이 도령일세. 자네가 허기진 사내의 눈을 하든 허리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되든.”
나란히 서래원을 향해 걷던 윤이 걸음을 멈추고 영목을 쳐다보았다. 영목은 언제나 자신만을 온전히 귀하게 바라보는 유일한 사내를 마주 보며 빈손을 뻗었다.
“안아 줄까?”
“덥석 안기고 싶지만… 여차하면 정말 최 형의 피로 허기를 채우려 들 것 같아 안 되겠습니다. 벌써 세 번이나 깨물 뻔했어요.”
“아이고, 어쩌나. 나는 윤이 도령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제일 신나는 인간인데.”
영목이 낄낄대며 윤의 머리통을 와락 안고 제 목에 가져다 댔다. 윤은 싫다고 몸을 뻣뻣하게 굳히면서도 영목의 품을 벗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영목은 윤의 너른 등을 위로하듯 쓸어내렸다.
“자주 찾아오겠네.”
“기다리겠습니다.”
윤이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 약속으로 충분했다.
* * *
윤을 보러 가야 하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사업이 번창하는 것 때문이기도 했고, 출산 후에 단의 몸이 점점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목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던 어느 오후, 안채 일을 보는 아이가 달려와 단의 부름을 전했다. 영목은 오만 일을 다 젖혀 두고 단에게로 달려갔다.
“단이 아씨, 나 찾았어?”
내내 몸져누워 있던 단은 나은의 도움을 받아 화사한 비단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영목은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문턱 앞에 서서 두 여인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야무지게 묶인 옷고름을 확인한 단이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우리 오라버니 보러 갑시다. 지금 당장.”
“…그 몸으로 어딜 가.”
“이 몸이라 지금 가야 할 것 같소.”
영목은 싫다고 고개를 젓고 싶은 기분으로 단을 안아 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은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빨리 갈 수 있소?”
영목에게 답삭 안긴 단이 보료 곁에 앉은 나은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언니, 우리끼리의 비밀인데 말이에요. 영목 오라버니는 연수산까지 하루 만에도 갈 수 있답니다.”
“하루…….”
“네에. 오라버니들은 연수산까지 훌쩍 길 떠났다가 일주일 만에 되돌아오곤 했어요. 어린 날의 내가 오라버니 돌아오실 날만 손꼽던 아해라 분명 기억하지요.”
영목은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며 시큰해지는 코끝과 열 오르는 눈시울을 가라앉혔다. 품에 안은 단의 몸이 너무 가볍고 너무 뜨거웠다. 제 딴에는 또박또박 말하는 것일 텐데, 단의 음성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쇳소리가 가득했다.
나은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영목과 단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루 만에 갈 수 있다면 아주 다행입니다. 여기 일은 걱정 말고 다녀와요. 아가도 상단 일도 내게 맡기고.”
영목은 나은의 배웅을 받으며 교월루의 비밀 문을 열었다. 단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