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80화 (80/157)

80화

“병판 댁 나은 아씨 기억하지? 그 아씨가 단이 아씨가 숨어 지내던 곳을 알려 주었어. 그에 대한 감사라 해야 할까… 조금 복잡한 사정 끝에 지금은 나은 아씨도 남가 상단에 계시다네.”

영목은 톡 튀어나와 도드라진 윤의 울대뼈를 쳐다보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단이 아씨랑 나랑 나은 아씨랑 셋이서 매일 밤마다 오손도손 머리 맞대고 검계의 이름으로 흉서와 괘서 쓰는 재미로 소일 중이야. 검계 놈들은 어떻게 된 게 단 한 놈도 글을 쓸 줄 모르더라고.”

가만히 고개만 주억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윤이 마침내 무겁고 무겁게 물었다.

“어머니 장례는… 치렀습니까? 조부님은 연행에서 잘 돌아오시었고요?”

“응. 대방 마님 유해도, 당상관 어르신도 잘 수습―”

“잠, 잠시만요. 두 분 다……. 조부님도요?”

남인혜의 시신은 검계의 우두머리가 이를 갈고 되찾아왔다. 김욱진이 머무는 평양 감영의 숙소에 생전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박제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했다.

사실 나은은 검계 같은 왈짜패까지 이용하는 복수에는 내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구해 온 남인혜의 시신을 마주한 순간 나은도 완전히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는 제가 알고 있는 사대부가의 정보를 검계와 담무회에 모두 털어놓고 매서운 작전을 짰다. 덕분에 영목의 복수가 한층 수월해졌다.

‘대방 마님이 그리되셨다는 이야기, 당상관께서 자진하셨다는 이야기까지는 전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답을 기다리는 윤의 눈을 바라보며 영목은 많은 말을 모으고 모아 짧은 문장으로 정리했다.

“충격이 크셨던 모양이야. 연행이 워낙 길고 험했던 데다가 연세도 적지 않으셨으니.”

영목이 가능한 한 에둘러 말한 보람도 없이 윤은 대강의 전말을 짐작하고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제가 여기서라도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릴 하는구만. 머리 좀 써 주게. 머리 쓰는 건 자네 몫, 몸 쓰는 건 내 몫이잖나? 잘하고 있다 싶다가도 양반 놈들 머리 굴리는 것에 매번 말려서 말이야.”

영목은 윤의 가슴에 기대어 지난 패배를 되새겼다.

향화각의 기녀에게 당했고, 부정에 호소하던 김욱진에게 당했다. 요즘 병판 댁에서는 남가 상단에 눌러앉은 나은에게 절연장을 보내겠다 연일 협박 중이었다. 양가의 규수가 어찌 절개도 정조도 없이 중인 왈짜 놈과 붙어먹고 있느냐면서. 절연당하고 싶지 않으면 무상으로 약초를 납품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까지 해 댔다. 손녀 사랑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병판이지만 가문의 명예만큼 사랑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나은은 목표가 확실하니 도리어 잘되었다며 자신의 가문과 영의정네 집안을 이간질했다. 그래서 지금은 남가 상단을 가운데 두고 최씨 집안과 강씨 집안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한동안은 둘이 싸우게 두자며 빙긋 웃는 나은을 바라보며 영목은 새삼 남인혜의 말을 떠올렸다. 사대부들이 몇백 년을 다져 온 것, 남인혜가 고작 몇십 년간의 노력으로는 이길 수 없었던 것. 그건 아마 나은이 보여 주는 이런 비정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은 아씨가 대방 마님이 되면 남가 상단은 훨씬 단단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감격스러운 해후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 어울리지 않는 대화였다. 하지만 영목과 윤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한 몸처럼 빈틈없이 서로를 안고 속삭이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멀찍이서 숨어 그들을 지켜보던 세경과 서산 대신이 쯧쯧 혀를 차며 돌아섰다. 한참이나 멀어진 두 신이 서로의 대통에 연초를 채우고 불을 붙였을 즈음, 윤이 말했다.

“마음을 사세요.”

“음? 한성 아씨들을 꼬시라고? 지금 내가 한성 최고 쌍놈이라 그건 좀 어려운데…….”

영목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답한 것이었으나 깊은 사정을 모르는 윤은 그저 피식 웃었다.

“민란이 일어난 곳들로 담무회 사람들을 보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가 상단의 이름으로 돈을 쓰십시오. 길을 다지고, 음식을 나누고, 약을 주세요. 원래 거기에서 살던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그 지역 향반들과 친해지세요.”

“향반 놈들과 왜? 그 망할 놈들… 권세가들한테 뇌물 갖다 바쳐서 한자리씩 맡고 있는 것들이잖아?”

“아무리 돈을 갖다 바쳐도 좋은 관직은 저들 가문끼리 나눠 먹고 토박이들에게는 무관 자리 끄트머리나 내주었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뭐, 거야 그렇지.”

영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등을 구부려 영목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문을 앞세운 세도가들 하는 짓이 어디 가겠습니까. 물건 팔아 돈푼이나 모은 촌것들이라면서 향반들을 어지간히 무시했을 거예요. 향반들은 꽤나 불만이 많을 겁니다.”

“흐음.”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군을 늘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의 적을 보다 많은 사람이 공격하도록 선동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가만히 들으면서도 영목은 어이가 없었다. 기껏 만나 부둥켜안고 통곡을 해도 부족할 마당에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영목이 헛웃음을 짓는데도 윤은 밀어를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위험한 소리를 이어 갔다.

“담무회에 그 사람들의 불만을 들어 주면서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라 하세요. 향반들이 먼저 거사를 일으키자 말을 꺼냈을 때 마지못해 동의하는 척 움직이라고도 명하시고요.”

“허…….”

“향반을 앞세워 봉기한 사람들이 한성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헛소문을 퍼뜨리십시오. 이달 말에 남산 군량미 창고에 불을 내겠다는 둥 하는 괘서를 걸고, 어린아이가 비웃을 정도로 허접하게 실패하세요. 이런 실패를 몇 번 반복하면 관군들은 점점 방심할 겁니다.”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영목의 귓가를 간질였다. 영목은 가슴이 설렜다. 빌어먹게도 매혹적인 목소리에 담긴 말이 한마디 한마디가 위험하여 심장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나 참,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친구가 정말.”

이 멋대가리 없는 소리를 이 달콤한 목소리로 언제까지 떠드나 보자며 가만히 듣기만 하려던 영목은 결국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왜겠나? 영의정 잡을 방법을 일러 달라 했더니 역모 일으키는 법을 알려 주고 있으니 그렇지!”

“대들보를 부숴야 하신다면서요.”

당연한 말을 묻는다는 듯이 대꾸한 윤이 영목의 등과 허리에서 팔을 풀었다. 귀한 도자기를 매만지듯 영목의 뺨을 감싸고 목뒤를 어루만지는 그의 눈 속엔 미안함과 반가움과 슬픔과 행복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일렁이는 눈동자로 영목을 바라보던 윤이 다시 제 품으로 영목의 몸을 끌어당겼다.

“세경 마님께서 매일 타박하십니다. 대들보를 부수라고 온갖 좋은 것 먹여 기른 아이를 제가 홀렸다고. 공동의 책임을 지라고.”

“스승님도 참…….”

머쓱함에 못 이겨 세경의 탓을 하던 영목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윤의 가슴을 철썩 때렸다.

“그래서, 나라 뒤집자고? 내가 세경 마님과 한 약속을 못 지킬까 봐?”

“대들보는 지붕을 받치고 기둥으로 가는 무게를 고루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위를 보필하고 아래의 짐을 더는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 제 몫을 못 하고 그저 부피만 키우고 있으니…….”

귓가에서 속삭이던 붉은 입술이 영목의 목덜미에 닿았다.

“부수고 새로 지어야지요. 집을.”

“…진심인가?”

“이 나라는 사대부의 나라입니다. 나의 나라, 최 형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 것과 최 형의 것이 아니니 불태우고 부수어 문제 될 게 무어랍니까?”

은밀히 속삭이는 음성에 영목은 눈썹을 구겼다. 윤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상했다. 커다란 뱀에게 칭칭 감긴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기묘한 감각에 홀린 영목은 저도 모르게 윤이 더 편히 입을 대도록 목을 기울였다. 비스듬히 기운 목덜미를 입술로 훑던 윤이 흠칫 몸을 굳히고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 응. 그래. 아무리 한밤중이어도 밖에서 이러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

영목이 미약한 흥분과 기대로 솜털이 바짝 선 목을 느리게 문지르며 안 해도 될 말을 했다. 윤은 떨리는 눈동자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면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슥한 밤에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보니 윤이 도령도 다 컸구만.”

무안함을 지우려고 윤을 놀려 대면서 영목은 품속에서 반지르르 윤이 도는 원통을 꺼냈다.

“예쁘지 않나? 동해에서 잡힌 상어 중에서도 흠 없는 어피를 고르고 골라 안경집을 만들었다네. 테두리에는 상감한 은을 둘러 모양을 냈지.”

나은과 영목이 요즘 남가 상단의 새로운 사치품으로 주력하는 물건이었다. 영목은 기방을 드나들며 멋 부리기 좋아하는 놈팽이들의 주머니를 털거나 친한 척 말을 붙이기 위해 멋들어진 안경을 한두 개씩 꼭 가지고 다녔다.

‘윤이 도령을 만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좋은 것을 가져올걸.’

부질없는 후회를 하면서 그는 안경집을 열고 안에 든 흑애체를 집어 들어 윤에게 건넸다.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귀갑 테에 검은 수정으로 알을 채웠네. 범산 산군께 상단 일 좀 도와 달라고 빌어서 자수정이 나는 동굴을 찾아냈거든. 요즘 한성은 이 흑애체 하나 사고 싶어서 다들 난리일세.”

“한밤중에 웬 흑애체랍니까.”

“아, 일단 받아.”

조금씩 조금씩 더 멀찍이 물러서던 윤은 영목의 채근에 못 이겨 팔을 뻗어 안경을 받아 들었다. 영목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자네 손이…….”

티끌 하나 없이 곱던 윤의 손등에 지워지지 못한 흰 흉터들이 빼곡했다.

“그날, 내가 만든 상처로군.”

김욱진의 말에 속아 넘어간 영목의 죄업이 윤의 손등에 새겨져 있었다. 영목이 무엇을 쳐다보고 입술을 깨무는지 알아챈 윤은 얼른 손을 거두고 안경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정인이 남긴 흔적이라 품고 삽니다. 상처가 아니에요.”

달이 기운 어둑한 그믐밤에 진청의 밤하늘과 닮은 색의 안경알만 홀로 유난히 반짝였다. 자수정 너머의 세상을 깊은 눈으로 응시하던 윤은 안경다리를 고이 접어 다시 영목에게 안경을 돌려주었다.

“좋은 물건입니다. 수정 광산은 앞으로 백 년은 투자할 만한 곳이니 잘 관리하시면 작지 않은 도움이 될 거예요.”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말아. 그거 쓰고 다른 사람인 양 남가로 돌아오라는 소리잖나.”

“못 갑니다.”

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목이 성큼 다가서자 그는 그보다 더 멀찍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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