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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79화 (79/157)

79화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몰아서 받을게요. 듣기만 해요.”

“…….”

“그쪽은 어릴 때 연수산에 살았으니까 예전부터 저승 것들이 나한테 쌓인 게 많은 거 알 거예요.”

영목은 어릴 적, 연수산에 살 때를 떠올렸다. 영목의 기억으로 묵은 예전부터 저승 차사를 유독 싫어했다. 예쁘고 반짝이는 것이 좋은데 차사들은 온통 시커멓고 칙칙해서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그는 꼭 해야 할 일을 하러 온 저승 차사건 심심해서 연수산에 놀러 온 차사들이건 가리지 않고 심술을 부렸다. 수명을 다한 인간을 데리러 온 저승 차사들마저 먼지처럼 흩날려 버리거나 엉덩이를 차서 연수산 밖으로 내쫓기 일쑤였다. 큰 기운을 읽는 데에 특화된 서양 용답게 자잘한 말단 차사들이 아니라 굵직하게 한자리씩 하는 차사들만 골라 해쳐서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연수산의 모든 신들을 보호하는 서산 대신께서 영 입장이 곤란해지셔서 불란서 의원을 붙잡고 한참이나 한탄하셨었지…….’

묵이 스승으로 여기는 두 사람은 연수산의 안녕을 위해 묵을 설득했다. 그들이 앞으로는 절대 연수산에 일 보러 온 차사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어르고 달랜 끝에야 묵은 더 이상 저승 차사에게 손대지 않았다.

“그때… 서산 대신께 혼나신 이후로 저승 차사들에게는 신경 끊으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저승 차사씩이나 되어서 십 년도 더 전의 일을 꽁하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답니까?”

“서산 대신께선 연수산에 온 차사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용무를 마치고 연수산 밖으로 나온 놈들만 건드렸지. 꾸준히.”

“…….”

“사정이 이렇게 되어서 내가 책임을 좀 느낀다고요. 요즘 그 창백한 도련님을 옆에 달고 다녔더니 그게 저승 것들 눈에 띄었나 봐.”

영목은 묵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마른세수를 했다.

“알다시피 연수산은 내가 좋아하는 곳, 저승 것들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 그쪽이나 그쪽 친구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댁들보단 저승이 약간 더 싫길래 귀한 걸음 했어요.”

“…고맙습니다.”

“당연한 말씀을.”

“…….”

어느새 연수산의 입석 앞이었다. 묵은 입석 앞에 영목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영목이 멋지게 착지해서 태연히 옷자락을 털자 그는 의외라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묵의 기다란 손이 주변을 가리켰다.

“지금은 아직 저물기 전이고, 서산 대신과 비형랑이 안개를 두껍게 깔아서 떼로 몰려온 저승 것들을 헤매게 하고 있습니다.”

“요 근래 연수산에 아무도 못 드나들었던 게 그럼…….”

“맞아요. 동네 청소한다는 핑계로 안개를 덮어 가리긴 했는데… 약이 올랐는지 죄인을 내놓으라고 그놈들이 공식 서한까지 보냈더라고요.”

영목이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심경에 동의했다.

“이젠 저승 차사를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오늘이 하필 그믐이더라고. 그믐날은 삭일(朔日)과 마찬가지로 저승의 힘이 가장 강한 날이잖아요? 차사 놈들이 머리를 아주 잘 썼어.”

“하…….”

영목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석양이 끝나고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손톱 같은 그믐달이 푸른빛이 남은 하늘에 어둑하게 걸려 있었다.

“그쪽이랑 그쪽 친구랑 둘이 해 볼 만큼 해 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날 불러요.”

묵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밤안개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영목은 많은 감정이 담긴 얼굴로 연수산의 입석을 어루만지고 산 안으로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백 보도 걷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졌다.

발끝만 보고 걷던 영목의 눈에 가죽 코 끝이 해진 태사혜가 들어왔다. 영목만큼이나 빠르게 걸어오던 상대가 우두커니 걸음을 멈추었다. 영목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빨갛게 물든 단풍이 찬 바람에 실려 흩날리는 산길에 흰 무명 두루마기를 걸친 윤이 서 있었다.

영목은 문득 제 옷이 부끄러워졌다. 항상 질기고 두꺼운 무명 두루마기는 저의 것, 하늘하늘 매끈한 비단 두루마기는 윤의 것이었다. 윤이 저 낡은 옷과 신을 걸치고 있는 게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말할까. 잘못했다 말할까.

무슨 말부터 먼저 건네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여 영목은 입도 발도 머뭇거리기만 했다.

윤과 영목의 사이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샛노란 은행잎이 새빨간 단풍잎 위로 우수수 흩날린 순간, 윤의 발이 영목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기억보다 훨씬 마른 손이, 훨씬 단단한 몸이 영목을 가득 안았다. 윤의 목울대가 울음을 삼키며 크게 울컥였다.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 전보다 세찬 바람이었으나 조금 전만큼 시리지는 않았다.

“어찌 지내셨습니까.”

윤이 온전히 영목에게 기대 오며 물었다. 영목은 제 목덜미에 닿은 얼굴을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 말이 고작 그것뿐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뽀얗게 곱던 윤이 도령이 어쩌다 이리 수척해졌어? 연수산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아닙니다.”

영목의 눈썹이 더 크게 구겨졌다.

“저런. 스승님이랑 무기 나으리가 쌍으로 괴롭히는구만? 불란서 의사 선생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숙식은 서래원에서 하는 것 같고. 맞지?”

“…….”

“내 한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서래원으로 보약을 지어 보내겠네.”

“마음만 받겠습니다.”

윤의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다. 절박하기까지 한 몸짓으로 기대 오는 윤을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던 영목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그의 얼굴을 감쌌다.

“자네 피부가 왜 이리 찬가?”

“…….”

영목은 윤이 대답하지 않은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영목은 더 이상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고 그냥 윤의 시름을 받아안았다.

이른 저녁이 깊은 밤으로 접어들며 단풍의 색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잘 지내다마다. 그렇게 윤이 도령 옆에 붙어 다니더니 최영목이 드디어 남가 상단을 집어먹었다며 있는 욕 없는 욕 다 처먹으며 살고 있다네.”

“…저 때문에 욕보십니다.”

“뭘 자네 때문이야. 내가 예전부터 남가 상단 탐냈던 거 모르나?”

“상단으로 들어오시라 수백 번 말씀드렸으나 호위로 있겠다며 버티셔 놓고는.”

윤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면서 영목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숲속 저쪽에서 서산 대신과 세경의 기운이 느껴져 몸을 사리고 있던 영목도 에라 모르겠다 싶어 윤의 가슴에 이마를 묻었다.

“약초 사업이 아주 잘되고 있다네. 돈의문 약방 영감 아들이 범산으로 약초 캐러 갔다가 화를 면했거든?”

“그랬습니까? 하……. 아들이라도 살아 다행입니다.”

“응. 알고 보니 그이가 모르는 약초가 없고 못 만드는 약이 없는 기재더라고. 그 친구를 시작으로 조선 팔도 날고 기는 심마니에 약초꾼들까지 다 거둬 먹였더니 그 인재들이 돈이 되더구만. 얼마 전부터 팔기 시작한 애체도 이윤이 꽤 짭짤해.”

주절주절 지난 일을 자랑스럽게 주워섬기던 영목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자네야말로 잘 지냈는가?”

끄덕끄덕. 결코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은 몰골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목이 웃었다.

“자네 집은 내가 잘 지키고 있으니 이제 돌아오게.”

“못 갑니다.”

“내가 영의정, 우의정네 집을 다 해 먹었으니 마음 놓고 와.”

“예?”

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영목은 그의 얼굴이 떠난 목덜미가 왠지 허전하여 아쉬워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영의정네 장손과 큰손자를 투전판으로 끌어들였어. 그리고 한양에서 제일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를 붙여 주었지. 우의정네는… 느리지만 조용히 처리 중이고.”

한양으로 상경한 이래 꾸준히 기방과 투전판을 드나든 덕이라며 영목이 너스레를 떨었다.

“평양 쪽은 말도 못 하게 난리일세. 김욱진이 평안 감사로 있으면서 그 동네 터줏대감들을 어찌나 괴롭혔는지… 김욱진 세 글자만 들려도 가래침을 뱉는 놈들이 평양 바닥에 널리고 깔렸더구만. 슬쩍 옆구리를 찔러 주니 감사 놈 잡아 죽이자며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어.”

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욱진은 지금 그 수습 하느라 정신이 없네. 반란을 일으킨 민초들의 뒤는 담무회가 받치고 있지.”

영목도 딱히 대꾸를 바라기보다는 그저 윤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을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기만 바라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어디 평양뿐이겠나. 저 아래쪽은 더 난리야. 그동안은 남가 상단 눈치라도 보던 지방 상인들이 포 뜯고 쌀 뜯고 엽전 뜯어 대는 바람에 민심이 엉망진창이거든.”

말하면서 생각하니 제가 제법 야무지게 열심히 일을 처리한 것 같아 영목은 뿌듯하게 어깨를 폈다.

“게다가 자네가 죽은 줄 아는 검계 패거리들이 사람들을 들쑤시며 열심히 바람을 넣고 있어. 사대부를 쳐 죽이고 나라를 바로 세우자며 연일 관아를 습격 중이야.”

윤이 더러운 일을 처리하기 위해 뒷돈을 대어 양성했던 검계들은 영목도 놀랄 정도의 충성심을 보였고, 그들의 충정은 윤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불꽃이 되어 번졌다. 검계 사람들을 잘 아는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계가 최 형을 해치려 들었을 텐데요.”

“지긋지긋하게 달려들길래 검계의 우두머리 놈을 때려눕힌 뒤에 담무회 접장 아재와 독대를 시켜 줬어.”

그동안에 모은 온갖 물증들을 내보여도 믿지 않던 검계를 설득시킨 것은 향화각의 기녀였다. 동생을 인질로 잡혀 강자영의 말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 동생을 영목이 빼돌려 주었다고 며칠을 설득한 덕에 검계를 겨우 이쪽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던 영목은 푸스스 웃어 버렸다. 그렇게 심각하고 그렇게 치열했는데 윤과 마주 안고 있으니 죄다 별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자네가 기뻐할 소식이 있어. 단이 아씨가 남가 상단으로 돌아왔다네.”

“단아는… 단아는 무사합니까? 끌려가 고문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운 좋게 유모와 몸을 피한 건가요?”

영목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을 피했다.

“단이 아씨가 원래 몸이 많이 약했지 않나? 연수산으로 데려오고 싶은데 아직 몸이 영……. 조금만 기다려 주게.”

내내 굳어 있던 윤의 얼굴이 이제야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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