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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78화 (78/157)

78화

“자세히 좀 말해 보오. 대체 뭐가 어떻게 틀렸는지 들어나 보게.”

“음. 나는 내가 작고 귀엽고 샐쭉하게 뾰로통한 이를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늘씬하게 키 크고 속이 단단한 사람을 좋아하더구만.”

“어어. 그거 들을수록 나인데?”

눈을 가늘게 뜬 단이 손을 펼쳐 또래보다 훌쩍 큰 제 키를 가리켰다. 영목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단이 아씨보다 훨씬 큰 사람. 나보다 더 큰 사람.”

“…그런 여인이 조선 팔도에 어딨소?”

“왜 없다고 단정 짓누? 저기 연수산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두 번째, 세 번째 귤껍질이 날아들었다. 영목은 처음과 달리 그 두 껍질을 모두 잽싸게 잡아채고 잘게 뜯어 다시 단에게로 흩뿌렸다. 둘이 한참이나 서로에게 귤껍질을 집어 던지느라 방 안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아이고, 그만하자! 권가에게든 나은 아씨에게든 이 꼴을 들켰다가는 귀에서 피가 나도록 잔소리 듣겠다.”

영목이 한숨을 내쉬면서 방바닥을 손으로 훑어 귤껍질을 쓸어 모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를 쳐다보던 단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넸다.

“오라버니, 있지… 나는 사내들이 무섭소.”

“오. 나는 단이 아씨가 또 귤 먹고 싶다 할까 봐 무서운데.”

“…나 장난하는 거 아니오.”

“나도 장난 아니야. 아무리 남가 상단이라도 감귤을 한 아름씩 공수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

손안에 수북이 쌓인 주황색 껍질을 내보이며 영목이 어깨를 떨었다. 단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알아들으면서 또 모르는 척하지……. 오라버니가 내게 원하는 그런 거, 나는 못 하겠단 말이오!”

“응? 내가 원하는 건 단이 아씨가 건강히 해산하는 것, 그래서 좀 가벼워진 단이 아씨 냉큼 업고 윤이 도령 만나러 가는 것인데?”

“참 짓궂소! 어렵게 꺼낸 이야기인 거 다 알면서!”

“어려울 게 무어 있어. 무서운 건 안 보고 살면 되고, 싫은 건 멀리하면 되지.”

영목은 꼼꼼히 주워 담은 귤껍질을 방구석에 내려놓고 단의 뺨을 꼬집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양 뺨이 발긋한 소녀가 커다란 눈을 들어 올려 영목을 마주 보았다.

“오라버니는 나와 그… 그리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소? 다른 사내들은 내가 무섭다, 아니 된다 하면 화를 내었는데?”

“허허. 우리 단이 아씨가 윤이 도령 땅 치고 통곡할 소리 하는구만.”

그는 단의 반대쪽 뺨도 꼬집었다가 손을 물렀다. 윤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서늘하게 가라앉는 그의 눈동자를 기민하게 알아챈 단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거봐. 오라버니 지금 화났잖소.”

“어. 화난다. 아무래도 내가 안학산에 있던 그놈들을 너무 곱게 보낸 것 같아서 화가 나. 좌부승지 댁 파락호 놈 패거리도 산 채로 배를 갈라 호랑이 밥으로 던져 주었는데… 그 망할 것들을 다시 살려 내서 죽일 수가 없어 화가 나.”

“…….”

진심이었다. 단을 데려오고 나은을 남가 상단으로 영입한 날, 그날 영목은 벼르고 벼르던 남가 상단의 청소를 해치웠다. 죄를 뒤집어씌울 검귀들까지 모두 학살한 그는 피 묻은 김에 남의 집 쓰레기도 치우고 오겠다며 좌부승지네 집 담을 넘었다. 오랜만에 범산 산군을 만나서 호랑이 간식이나 하라며 꿈틀대는 놈들을 던져 주고 왔었는데, 단의 말을 들으니 그놈들을 너무 편하게 저승으로 보내 준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화내고 화풀이하는 거, 힘들고 더럽고 추잡한 건 다 내게 맡겨. 그리고 단이 아씨는 좋은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으면서 살아.”

“오라버니.”

“감귤을 백 개 먹고 싶다 하면 내가 제주도 귤나무를 뽑아 와서라도 그리하게 해 줄 테니까 지난 생각은 하지도 말고. 응?”

가까스로 속을 누그러뜨린 영목은 시무룩한 단의 어깨를 잡아 보료 위에 눕히고 이불을 끌어와 그녀의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산달 다 되어 가니 몸조리나 잘해. 윤이 도령에게 소식 전하러 연수산에 얼른 다녀오고 싶어도 애가 걱정이 돼서 자리를 비울 수가 있어야지, 원.”

“오라버니께 서신은 못 보내오? 단아가 집에 있다 하면 날듯이 뛰어오실 터인데.”

“보부상이며 장돌뱅이며 약초꾼이며… 온갖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있어. 그런데 연수산에 안개가 너무 심해 들어갈 수가 없다더라.”

심지어 범산 산군조차도 연수산 소식을 못 들은 지 한참이라 하였다. 대체 무얼 보호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산의 모든 사람들이 꼭꼭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다고.

‘윤이 도령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산 안쪽의 일을 알 수가 없으니 영목으로서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영목은 더 이상 단의 걱정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아 한숨을 숨기고 이불 위로 그녀의 배를 느리게 토닥여 주었다. 자신의 배 위에서 움직이는 영목의 손을 쳐다보며 단이 무겁게 입을 뗐다.

“오라버니는 내가 더럽지 않소?”

“안 씻었니?”

“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면서!”

“단이 아씨는 누가 숲에서 헤매다 산 버러지에게 잔뜩 쏘여 오면 쏘인 사람을 더럽다 할 텐가?”

“그치만…….”

“그치만은 뭔 얼어 죽을 놈의 그치만이야. 본인도 아니 그럴 거면서 왜 내게 이상한 소릴 묻는담? 배 속의 애가 들어, 내 애가.”

단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공식적으로 영목의 아이였다. 영목은 남가의 데릴사위라도 되려고 단이 아씨를 홀렸다고 둘러댔다. 제가 남가 상단 대방의 목패를 차지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남가의 환란을 틈타 어린 아씨를 냉큼 잡아먹었다고.

제 입으로 너무 뻔뻔하고 당당하게 소문을 내고 다닌 탓에 영목은 천하에 둘도 없는 쌍놈이 되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권가는 고맙다며 영목을 안고 울었다. 나은은 한숨을 한 번 짓고는 영목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실 권가나 나은이나 한성 사람들이 저를 어찌 대하는지는 영목에게 별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제 잘못된 선택으로 단이 겪지 아니하여도 될 일을 겪은 것, 단이 제 눈치를 보고 기죽어 있는 것. 그것이 영목을 힘들게 할 뿐이었다. 죄인의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린 그녀와 마주 보고 있는 지금처럼.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에 뭘 먹고 싶은지, 몸 풀면 어딜 놀러 가고 싶은지 쭉 적어 놓기나 해. 어휴, 진짜 걱정스럽다. 애가 애를 낳게 생겼네.”

구시렁대며 일어난 영목은 창과 문을 빙 둘러 솜으로 누빈 문염자(門簾子)를 걸었다. 궁에서 바람을 막고 빛을 가리는 데에 쓴다는 물건이었다. 이런 것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영목은 수완 좋게 문염자를 구해 단의 방에 떡하니 걸어 주었다.

그는 더없이 과하게 단을 보호하고 있었다. 나은마저 과하다 타박하였을 정도로. 단을 두 번이나 버리려 했다는 자책이 영목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이런 걸로 씻을 수 있는 부채가 아닌데.’

황혼으로 물들었던 방이 금세 한밤중처럼 캄캄해지자 영목은 단이 볼 수 없도록 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였다. 부쩍 잠이 늘어난 단은 방 안이 어두워지자마자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이내 고른 숨을 내쉬었다. 영목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 열을 가늠하고 이불을 더 꼼꼼히 덮어 준 뒤에 방을 나왔다.

“오랜만이에요, 문세경네 무뢰배.”

흑애체를 멋지게 걸친 묵이 기다렸다는 듯이 영목에게 인사를 건넸다. 단과 나은의 방 사이에 있는 대청마루가 마치 제 공간인 것처럼 자리를 잡은 묵은 환히 웃으며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잠깐 앉아요.”

“아이고. 그렇게 독대 한번 청하여도 내내 무시하시던 무기 어르신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걸음하셨습니까?”

영목이 그가 눈으로 가리키는 곳에 앉으며 물었다.

“장돌뱅이들이며 보부상들이며… 내 얼굴 보일 때마다 이 귀한 흑애체를 쥐여 주며 도련님을 잘 부탁한다 굽실대는데, 받아먹을 것 다 받아먹고 안 올 수가 있나.”

“나으리께 잘 어울릴 줄 알았습니다. 선물을 드린 보람이 있네요.”

“내게 무언가가 안 어울리기가 더 힘들지.”

영목은 그가 벗어 내려놓는 흑애체를 쳐다보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수정으로 알을 만들어 끼운 안경을 흑애체라 불렀다. 조선 팔도의 사대부들이 기와집을 갖다 바쳐도 못 구해 안달인 물건이었다.

두터운 안개 때문에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린 연수산에서 오직 묵만이 제 기분 내키는 대로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접수한 직후, 영목은 윤의 소식 한 자락이라도 얻어 내기 위해 담무회의 사람들에게 흑애체를 쥐여 주었다. 혹시라도 묵을 만나거든 뇌물로 전해 주라고. 예쁘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양반이니 흑애체가 탐이 나서라도 무언가 기별을 줄 거라고.

‘벌써 흑애체를 수십 개는 갖다 바쳤다. 오늘 비로소 그 열매가 되돌아올 모양이구나.’

습관적인 웃음을 걸고 부드럽게 휘어진 묵의 눈이 영목을 찬찬히 살폈다.

“정말로 팔자 좋아졌네요. 문세경한테 얻어맞으며 망아지처럼 온 동네를 뛰어다니던 무뢰배 꼬맹이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신수가 훤해졌어.”

“친구를 잘 사귄 덕이지요. 윤이 도령 같은 친구를.”

“내 말이 그 말이야.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니까.”

묵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흑애체만 꿀꺽하고 모르는 척하려다가 그쪽의 그 친구가 영 신경이 쓰여서 왔어요.”

“윤이 도령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쪽한테만 일이 생긴 건 아니고.”

“무슨 일인지 알아듣게 말씀해 주십시오!”

영목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묵의 옷자락을 잡았다. 영목을 밀치려던 묵은 마음을 바꾸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연수산으로 가면서 말합시다. 사안이 좀 시급한 듯하여.”

묵이 옷에 매달린 먼지라도 다루듯 영목을 끌고 걸음을 옮겼다. 영목은 댓돌 위의 신발만 겨우 꿰어 신고 휘청이며 그를 따라 걸었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인데도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윤이 도령이 아픕니까? 위독한가요?”

“곧 위독해지겠지? 저승 것들이 그 애송이를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까.”

“설마… 저승이 움직였습니까……?”

영목의 뇌리에 창천 물레방앗간 처녀 귀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승의 규율을 어겨 액을 맞을 거라 장담했던 그날, 천주쟁이니 역적이니 하는 온갖 누명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영목을 집어삼켰다.

‘이 재수 없는 서양 용이 직접 찾아왔을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야.’

영목이 어질어질한 눈을 손으로 감싸고 걸음을 멈추자 묵이 그의 몸을 짐처럼 집어 들어 옆구리에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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