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세경 마님이 날 핑계로 온 동네 여인들을 다 잡아 없애고 계시다는 말인가.’
윤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가 연수산에 자리 잡은 뒤, 한밤에 나돌아 다니는 그의 모습이 신기한지 동네의 어린아이들이나 젊은 처녀들이 말을 걸어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윤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단이 떠올라 본래 성정보다 더 다정히 그들을 대하였다. 오다가 쌈지에서 바늘을 떨어뜨렸는데 찾지 못하겠으니 같이 찾아봐 달라는 둥 하는 부탁들도 죄다 들어주었었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익은 얼굴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세경 마님 꽃밭에 묻혀서 그런 거였나.’
그는 대체 세경이 왜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윤이 끙끙 앓는 이유를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한 묵이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덧붙이자면 그쪽의 거부권은 없어요. 좋든 싫든 나랑 지내야 한다고.”
“하아…….”
“한숨은 이쪽이 쉬고 싶어요. 자초지종 설명하기 번거로워서 뭐든 도와준다는 말로 꼬시면 좋다고 달려들 줄 알았더니 안 넘어오고 말이야. 이래서 과하게 똘똘한 인간은 귀염성이 없다니까.”
상상도 못 한 죄책감에 몸서리치는 윤에게 묵이 다시 엉뚱한 소리를 했다.
“거기, 칼은 잡아 본 적 있습니까?”
“활이라면 심신 수양 차원에서 어머님께 배웠습니다.”
“심신 수양 차원의 잡기술로 그쪽 집안을 그렇게 만든 놈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윤이 손바닥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구해 주었다가,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보다 더한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가, 이제 다시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최 형께 휘둘릴 때와 비슷한 기분이로군.’
묵과의 대화는 영목과는 다른 결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묵을 마주하고 있으면 한 사람이 아니라 성격 괴팍한 열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만큼 피로했다. 저를 위한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대꾸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몰려온 권태감에 신음하며 윤은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옳은 말만 해서 더 밉살맞은 사내가 햇살처럼 미소 지었다.
“그쪽은 장사하던 사람이라면서 뭐가 이득일지 셈이 안 서나? 갓 태어난 흡혈귀라 햇빛 아래 걷지도 못하고, 쇠붙이 하나 다룰 줄도 모르면서 뭘 어찌 복수하려고?”
순간 윤은 영목의 말을 떠올렸다.
- 저 나으리 지랄은 그냥 듣고 넘기는 걸세. 인성 뽑아다 껍데기에 처바른 새끼가 뭔 개소리냐 이죽대면서 말이야. 엄청 재수 없이 말하는데 틀린 말은 안 해서 새겨들을수록 기분 더럽거든.
윤은 영목의 목소리를, 영목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영목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고 사과해야 할 말이 수두룩했지만 당장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냥 영목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한참 기대 안겨 영목의 체온과 제 체온이 엇비슷하게 닮았을 때에 어찌 지내셨느냐, 수시로 보고 싶었다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앞으로도 무기 나으리가 못 알아먹을 소리, 짜증 돋우는 소리를 하면 최 형을 떠올려야겠군.’
그는 영목의 목소리와 쉴 새 없이 바뀌던 표정을 떠올리면서 묵이 이죽대는 소리를 흘려버렸다.
“한데 어쩐다. 나는 칼이니 활이니 하는 게 필요 없는 위대한 존재인데.”
“…….”
“음. 병기 다루는 법, 힘쓰는 법을 익히게 도와줄 사람은 소개시켜 줄 수 있겠네요.”
생긋 눈꼬리를 접은 묵이 오른팔을 성의 없이 허공에 죽 내리그었다.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새하얀 공간이 간데없이 사라졌다.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는데 윤과 묵은 서릿재 안마당에 서 있었다.
“비형랑, 도와줄 거지요?”
묵은 놀라 몸이 굳은 윤의 소맷자락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대청마루에 길게 누워 연초 연기를 뿜는 민재를 향해 걸어갔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 이상한 부탁을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민재는 놀란 기색조차 없이 대꾸했다.
“내가 돕긴 뭘 도와. 서양 창귀 본능은 불란서 의사 선생이 가르치고, 칼 쓰는 건 문세경이가 가르치라고 해.”
“흐음.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왜 맨날 서래원에 얼쩡거린답니까?”
“그거야 무기 네놈이 순진한 백사한테 못된 것만 가르치니까, 착한 이무기가 못돼 처먹은 서양 용에게 애먼 것 잘못 배우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되어서 그러지.”
민재가 화로에 장죽을 툭툭 두드리며 둘러댔다. 묵은 비스듬히 누워 있는 민재의 앞에 제집처럼 자리를 잡았다.
“잘됐네요. 이무기 염려하는 김에 이 도령도 같이 챙겨서 가르쳐 주면 되겠네.”
“아이구, 뭐래냐. 서양 용이 도깨비 집에 도깨비같이 나타나선 도깨비 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네. 어울리지도 않게.”
“괜히 딴청부리지 말고 좀 보세요.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인간이 서양 창귀에게 물려서 새끼 서양 창귀 된 거.”
…새끼 서양 창귀라니.
윤은 생전 처음 듣는 지칭에 아연하여 말을 잃었다. 당사자를 면전에 두고도 묵과 민재는 당연한 말을 나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한 거 좋아하시잖습니까. 신기한 인간 가르쳐 보고 싶지 않아요?”
“뭐… 신기하긴 허다마는.”
“거봐요.”
“너는 이 도령을 왜 돕냐? 전부터 얘 별로 안 좋아했잖어. 이 도령도 너 별로 안 좋아허구.”
이번에는 묵과 윤이 동시에 말을 잃었다. 곁눈질로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곧 악의 없는 얼굴로 연초 연기만 길게 내뿜는 민재를 흘겼다. 눈치 없는 도깨비는 순한 눈망울을 끔뻑대면서 제 할 말만 했다.
“허긴.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비실대는 도령의 팔다리를 뜯어서 뱀 굴에 던지고 절벽에서 떠밀고 하는 문세경이 훈육 방식은 나도 눈 뜨고 못 보겠더라. 도와줄게.”
“뭐 합니까. ‘고맙습니다’ 해야죠?”
묵이 윤의 팔을 툭 쳤다. 윤은 고맙지만 고맙지 않은 기분으로 찜찜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래. 이 용, 저 용 사이에서 치이느라 도령이 고생이 많아.”
“…….”
“어이구. 그러고 보니… 하다 하다 왜놈네 업신에, 서양 용에, 서양 창귀가 둘이나 되네? 이 동네가 어디까지 이상해지려는지, 원.”
대체 뭐가 그리 우스운지 혼자 껄껄 웃던 민재가 “으쌰.”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도령, 몇 년 전에 나랑 곰방대 계약을 하러 온 날 기억하나?”
“예.”
“그날 밤에 영목이가 문세경에게 도령을 팔았어.”
“…예?”
민재의 말에 놀란 윤이 흘끗 묵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던지 묵은 변함없이 잔잔한 미소를 띠고 어깨를 으쓱였다.
“팔았다는 말은 좀 심하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그래?”
묵의 말에 민재는 눈을 한 바퀴 데굴 굴렸다가 다른 표현을 찾아냈다.
“영목이가 제 전 재산을 걸고 문세경에게 도령을 의탁했어. 그러니 영목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문세경은 도령을 지켜 준다는 핑계로 제 소유물처럼 다룰 거야. 조심하라고.”
“…최 형이…….”
윤이 입을 틀어막고 영목의 이름을 되뇌었다. 묵이 생각을 읽어 내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의 귓가에 다정스레 속삭였다.
“그러니까 비형랑 뒤에 숨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보전하고 있다가 최영목이 오면 그 망나니 품으로 곱게 돌아가요. 복수가 어쩌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집어치우고.”
염려하는 것인지 약 올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속삭인 묵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민재와 오도카니 둘만 남은 윤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그가 사라진 마당을 쳐다보았다. 민재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영목과 윤이 곧잘 머물렀던 손님방을 가리켰다.
“이제 곧 날이 밝을 거야. 햇빛 하나 안 들게 잘 가려 줄 테니까 여기서 자구, 해 지면 일어나. 문세경도 내 집에 쳐들어와서 함부로 난장을 치진 못하니까 푹 쉬어.”
윤은 그가 가리킨 방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사지가 뜯겨 나간 채 뱀 굴이나 곰 굴에 던져져 있기 일쑤였다. 스스로 회복하는 법과 사냥하는 법, 본능에 따라 피를 마시는 법을 익히라는 세경 나름의 훈련법이었다. 의도는 알지만 결과가 썩 아름답지 못했기에 윤은 그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었다.
“사람이 잘 자고 잘 먹어야 뭘 해두 제대로 하는 법인데 문세경이는 그걸 몰라.”
민재가 윤의 고생을 다 안다는 듯이 도톰한 목화솜 이불이 깔린 방으로 윤을 떠밀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감사는 무슨. 어린애가 팔자에 없는 고생 하는 걸 보려니까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쉬어.”
“예.”
“지금은 도령 몸 상태가 영 아니어서 연수산 밖으로 나가기 어렵겠지만… 좀 나아지면 영목이 보러 다녀오고 그러라구.”
“그러겠습니다.”
윤은 아주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에 들었다. 아침이 밝고 다시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영목의 꿈을 꾸었다. 영영 꿈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던 윤은 어둠 속에서 혼자 눈을 떴다.
“내 꼴이 비참하여 뵈러 갈 수가 없습니다.”
윤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억눌린 흐느낌이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방을 느리게 채웠다.
* * *
배가 남산만 하게 부푼 단이 서안 위에 놓인 동그란 감귤을 세 개째 까서 입에 넣고 있을 때였다. 들어온다 만다 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영목이 반쯤 기다시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장부 정리하는 날이라 하지 않았나? 벌써 끝났소?”
“아이고. 지긋지긋하니까 장부의 장 자도 꺼내지 마라.”
엉금엉금 기어들어 온 영목은 단의 방 안에 길게 드러눕고서야 살 것 같다며 쭈욱 기지개를 켰다.
“뒷마당 들고양이가 딱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던데.”
“사람은 원래 적당히 게으르게 살아야 행복한 거야.”
“…말이나 못하면.”
“나은 아씨랑 권가 잔소리 피해서 도망 왔는데 단이 아씨까지 날 구박하면 난 서러워서 어찌 사누.”
도톰한 보료 위에서 장침에 기대앉아 있던 단이 가만히 그를 불렀다.
“저기, 영목 오라버니.”
“오냐.”
“오라버니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오?”
“피부는 뽀얗고 입술과 눈꼬리는 발그레하고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듯 탄탄한 사람.”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목이 거침없이 답하자 물어보았던 단이 도리어 당황했다. 잠시 그의 답을 곱씹던 단의 양 뺨에 발긋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어……? 그거 나잖아?”
“응. 아니야. 아씨랑 비슷은 한데 틀렸어.”
“…사람을 면전에 두고 틀렸다는 건 또 뭐람.”
단이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영목에게 감귤의 껍질을 집어 던졌다. 영목은 피하지 않고 귤껍질에 그대로 얻어맞고는 아파 죽겠다며 사지에서 힘을 빼고 늘어졌다. 그 모습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단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