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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76화 (76/157)

76화

“또 아물어 버렸네. 세 번이나 비늘을 잡아 뜯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오늘 맘마는 여기까지 먹읍시다.”

윤은 피를 마실 때마다 항상 닥쳐왔던 고통을 각오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흡혈의 고통은 1년이 다 되도록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익숙해지기는커녕 윤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좀먹었다.

다른 이의 생명을 축냈다는 죄책감. 내장이 다 뒤집힐 것 같은 역한 기분. 십 년, 백 년이 더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윤은 이미 몇백 번이나 반복되었던 익숙한 고통을 대비해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장을 할퀴고 쥐어짜는 통증 대신 처음 느끼는 활기가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뭉개졌던 피부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윤이 미간을 구겼다.

“이건… 나으리가 제 몸을 고쳐 주신 겁니까?”

“사람 고치는 건 저기 위에 있는 양인 신부가 하는 거고, 나는 그냥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애한테 밥 먹이는 김에 정화나 좀 한 거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이 어깨를 펴고 윤의 감사를 기다렸다.

“감사합니다. 매번 신세를 지기만 하네요.”

“알긴 하네.”

분명 고맙고 감사한데… 묵은 항상 저 말본새가 문제였다.

윤이 아랫입술을 씹으면서 고개를 숙이자 묵이 윤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챘다.

“윽, 왜…….”

“문세경이 그쪽 몸을 또 짓뭉개러 올 작정인 것 같거든요? 상대하기 귀찮으니 잠깐 도망가자고.”

묵이 빽빽이 우거진 소나무 숲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질질 끌려가던 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묵에게 잡혀 소나무 숲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어딥니까?”

“서산 대신께 받은 내 공간. 내 허락 없인 아무도 못 들어오는 데라… 자개장들 모아 두고 있지.”

“자개요? 온통 흰색인데……?”

“흠. 아직 사물의 원래 형태가 선명히 보일 정도로 영안이 트이진 않은 모양이네요.”

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묵은 장난스레 키득대면서 그에게 새하얀 의자를 권했다.

“보는 훈련은 알아서 하고,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볼까요?”

“저희가… 하던 얘기가 있었습니까?”

“응. 그쪽은 대체 뭘 하고 싶어서 내게 살려 달라 애원했는지 궁금해.”

비아냥거림도 무엇도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당혹스러워진 윤이 신음을 삼켰다. 인간들의 악의와 저의에 누구보다 익숙하다 자부하는 윤이었으나, 연수산 사람들의 이런 솔직한 호기심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윤이 대답하지 않자 묵이 고개를 갸웃댔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살고 싶고, 피를 마셔 보려 하는 것 아닌가? 그렇죠?”

“…….”

“몸 부서져라 노력은 하는데 연수산 밖의 소식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거. 그쪽 소식도 절대 전하지 말라 입단속하는 거. 다 이상하잖아.”

“…….”

묵은 무릎 위에 반대쪽 다리를 포개 얹으며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말을 안 하니 답답하네. 뭘 알아야 돕고, 속이 시원해져야 내보내 줄 텐데.”

시간은 무한하니 말할 기분이 될 때에 말해라. 대신 말하기 전까지 내보내 주지는 않겠다. 퍽 심술맞은 경고가 담긴 혼잣말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꽤나 한참을 망설이던 윤은 결국 가감 없이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괴물이 되었다고 밝힐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에겐 죽은 셈 치기로 했다?”

“예.”

“듣고 나니 더 이상한데요. 보통 인간들은 본의 아니게 괴물이 되면 의욕 없이 구석에 웅크리고 울고 짜던데. 그쪽은 문세경이 훈련시키는 대로 다 하잖아?”

“피로 갈증을 삭이는 괴물이 된 김에 가서 남가를 짓밟은 놈들의 목을 물어뜯을 겁니다. 몸이 녹든, 무르든… 해낼 거예요.”

“비린 것 못 삼켜서 그렇게 비쩍 말라 놓고 뭘 물어뜯는대……?”

“물론 비린 것을 싫어하긴 하지만… 제 몸이 타인의 피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 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들었어요. 불란서 의사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면서요? 근데 뭐, 차 떼고 포 떼면 입에 안 맞아서 식사가 힘들단 소리 맞잖아요. 제 밥도 못 찾아 먹으면서 원수를 물어뜯겠다는 각오… 나만 이상한가?”

묵이 매우 억울하다는 얼굴로 부연하려는 윤의 말을 가로막고 윤을 픽 비웃었다.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그의 표정에 윤이 발끈하여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요. 나으리 보시기엔 제 하는 짓이 가소로워 보이리라는 것을 압니다. 결말이 정해져 있음을 알면서도 발버둥 치는 제 꼴이 우스워 보이시겠지만―”

“우습지 않아요. 하찮은 놈이 건방 떠는 게 가끔 짜증 나기는 해도.”

“…….”

“이해했어요?”

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묵은 못 알아들을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치고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 정도 되는 존재가 보아도 전혀 우습지 않다는 것. 거기에 인간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에요.”

“인간의 가치…….”

“네. 그래서 모든 규칙 위에 ‘신은 인간의 생사에 관여할 수 없다’라는 규칙이 존재하는 거지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움직이는 사내의 입술을 바라보며 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명장의 붓으로 그린 듯한 묵의 입술에서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들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인간은 발버둥 쳐 봤자 고작 백 년도 못 사는 종족이지요. 동시에 곧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 하고 싶은 일을 해내는 유일한 종족이기도 해요. 신의 의지마저 압도하는 욕망을 지닌 덧없는 생명들.”

윤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아는 묵은 다정한 낯을 하고 세상 그 무엇에게도 다정하지 못한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윤의 눈앞에서 떠드는 이에게선 뚜렷한 염려와 온기가 느껴졌다. 의아해하는 윤의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묵이 말을 이었다.

“살아 있는 것, 목적을 향해 걸어가다가 마침내 죽음에 닿는 것. 그 치열한 과정을 누가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존재인 나조차도 감탄하는 인간의 치열함을 감히 누가 우스워해.”

새하얀 공간에서 머리카락도, 옷도 홀로 새카만 묵이 거오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부탁해 봐요. 내게 그쪽 편이 되어 달라고 졸라 봐.”

“지금…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무나 도울 정도로 한가하진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 중 제일 약한 놈 하나 정도는 슬쩍 거들어 줄 수 있다니까? 잡스러운 것들은 상대도 안 하는 내가.”

윤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세경이 연수산 입석 앞에 윤을 내려놓았을 때에도 묵은 세경의 수작임을 알면서 윤을 살려 주었다. 정말 스승들의 가르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매번 윤을 도우려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것도 없는 윤에게는 묵의 도움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 다르지 않았다.

어깨를 쭉 펴고 턱을 치켜든 고운 얼굴의 사내를 쳐다보면서 윤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나으리께서 저를 도와주시면―”

“아니. 조건 거는 거래 말고. 부탁을 하라고. 부탁이 뭔지 모르나?”

대가 없는 선의는 없다. 약조한 대가를 지불해도 약속을 뒤집고 목에 칼을 들이민다. 윤이 남가의 담장 밖에서 겪은 세상은 그랬다. 그런데 묵은 턱 끝을 들어 올린 그대로 불쾌하다는 듯이 저에게 대가를 제시하려던 윤을 깔아 보았다.

“내가 그쪽한테 뭔가 대가를 받아야만 할 정도로 아쉬워 보이나? 내 생김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데?”

“…저를 왜 도와주십니까?”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그쪽이 내 눈에 보이는 것 중 제일 약한 놈이라고.”

“…….”

“약한 건 싫어하지 않지만 멍청이는 곤란합니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말하는 건 더 질색인 데다.”

순간 윤은 그의 말투에서 자신이 아는 다른 용의 흔적을 깨달았다.

“저기, 잠시, 나으리… 설마 조선말을 세경 마님께 배우셨습니까?”

“응. 용은 용이 가르쳐야 한다며 들러붙더라고. 눈치챘겠지만 문세경은 신기한 걸 워낙 좋아하잖아요. 뭐… 용이란 것들이 호기심 빼면 비늘 정도나 좀 남는 종족이긴 한데.”

“…….”

“어쨌거나 그쪽에서 수고를 자처하는데 내가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문세경한테서 말을 배웠고.”

윤은 이제야 깨달았다. 종종 사람 발끈하게 하는 불란서 의사 선생의 말투도, 묵의 말투도 애초에 세경이 원인이었다.

‘재수 없어도 내겐 큰 은인인데 저런 화법 저거……. 하.’

도움의 대가로 조선말을 다시 가르쳐 드려도 되겠느냐 말할까 말까 윤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이. 묵은 다리를 바꿔 꼬며 다시 제가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쬐끔 더 솔직해지자면 말이죠. 내가 심부름 들어 주는 사람이 딱 둘 있거든요? 서산 대신과 저기 양인 의원. 그 둘이 입을 모아 내게 부탁했어요. 그쪽 혼자 다니면서 동네 처녀들 못 홀리게 하랍디다.”

묵은 항상 마치 저는 양인이 아닌 것처럼 불란서 의사 선생을 양인이라 지칭했다. 그런 호칭부터 바로잡아 주자며 말을 정리하느라 윤은 묵의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윤이 천천히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동네 처녀들을 뭐 어쩐다고요?”

“가뜩이나 미친 문세경이 그쪽 때문에 더 미치고 있단 말입니다. 이젠 사람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

“네에?”

“하, 역시. 그쪽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줄 알았다니까.”

윤은 대체 이야기의 맥락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는 조건 없이 도와주겠다는 말로 문드러진 마음을 달래 주더니… 갑자기 문세경의 대중없는 광기를 자신의 탓이라고 몰아갈 줄이야.

“문세경이 그쪽 주변에 얼쩡대는 여인들을 끌고 가서 자기 꽃밭에 묻어 버리고 있어요. 특히 애들이 문제야. 그쪽은 동생 생각 나서 어린애들에게 잘해 주는 것 같은데… 문세경은 어린 단이가 제일 꼴 보기 싫다며 이를 갈더라고요.”

“그게……. 그건 또 무슨…….”

“길게 설명하긴 귀찮고, 나랑 같이 다니면 죄 없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을 확률이 줄어드니까 어딜 가든 내 옆에 붙어 다니라는 말입니다. 연수산 인간들은 여간해선 내 근처로는 오지 않거든. 내 얼굴에 홀려서 가까이 왔다가는 좋은 말 듣지 못하고 쫓겨날 것을 아나 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묵의 말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윤이 앓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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