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내가 너무 팔팔하게 굴면 영의정 놈이 뭔가 수를 쓸 테니… 나는 돈벌이에만 눈이 뒤집힌 듯이, 여전히 앵속에 취한 폐인인 듯이 굴어야 한다.’
제일 방심하고 있을 때에 턱 밑에 칼을 꽂아 주리라.
그 순간을 떠올린 영목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껏 흐드러지게 웃음 띤 얼굴로 남가 상단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저 부산스러운 어딘가에서 살구색 도포를 걸친 윤이 접선을 접으며 다가올 것만 같았다.
‘기다리게. 내 여길 다 정리하고 곧 자네를 따라갈 터이니.’
그에게 윤은 저를 사람답게, 귀하게 봐 주던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영의정과 우의정 가문을 잘근잘근 밟고 썰고 태우는 상상만이 영목의 오늘을 버티게 했다. 세경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정도만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스승님이 원하시는 대로 대들보를 부술 수는 없겠지만, 두 가문을 불태우게 되면 망할 대들보에 흠집 정도는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천천히 교월루로 되돌아온 영목은 목을 한껏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누각의 천장 한가운데에 어른의 한 품보다도 두꺼운 대들보가 버티고 있었다.
영목은 영의정과 우의정에게 당하고 적응하면서 비로소 이 세상의 대들보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조금씩 확실하게 알아 가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 스승님이 그렇게 부수기를 바라는 것. 윤이 도령에게서 호패를 빼앗아 가고, 대방 마님의 시신에 괘씸죄란 낙인을 찍은 것.’
대들보를 노려보던 영목의 눈이 새카만 칼집 고리에 단단히 엮어 둔 붉은 댕기를 향했다.
‘내가 댕기 대신 상투 틀고 사는 것 또한 저 망할 대들보 때문일 테지.’
그가 습관처럼 댕기에 수놓인 모란꽃을 어루만진 순간이었다. 밖에서 영목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목 도련님, 청하신 객을 모시고 왔습니다.”
“최가 나은이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초청이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예가 아니지 싶어 걸음하였소.”
“예. 번거로우시겠으나 교월루로 올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목은 나은을 맞이하러 내려가는 대신 교월루의 주렴을 걷고 서서 버텼다. 권가의 옆에 새하얀 소복을 걸치고 서 있던 나은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누각의 계단을 올랐다. 딱 보아도 칼 좀 쓰게 생긴 여인이 나은의 뒤를 바싹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네는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갈 곳, 못 갈 곳을 가리지 못하는가? 교월루는 남가 상단의 주인과 그 주인이 청한 이만 오를 수 있는 곳이네! 자네의 무례로 나를 어디까지 욕보일 셈인가?”
“…아씨, 저는 아씨를 지키라고 고용된 사람입니다. 응당 함께하여야―”
“저 청지기가 얼마나 빠른 말과 얼마나 빠른 가마꾼을 대동하고 요란스레 날 데리러 왔는지 못 보았나? 한성 안에 내가 남가 상단의 부름을 받았음을 모르는 이가 없을걸. 아니 그런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씨.”
나은은 미련스럽게 따라붙는 여인을 가볍게 밀치며 질책했다.
“못 알아듣는군. 남가 상단에서 나를 이리 요란하게 모셔 왔다는 건 말일세…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내게 위해를 끼칠 수가 없다는 뜻이야. 최소한 남가 상단에서는 말이야.”
“…….”
나은과 여인이 동시에 영목을 올려다보았다. 영목은 고개를 끄덕여 나은의 말에 동의했다. 거 보라는 듯이 나은이 여인을 흘겼다.
“이제 알아듣겠나? 자네가 나를 지킨답시며 막무가내로 교월루에 오르는 건 나와 내 집안과 남가 상단 모두에 먹칠을 하는 짓이야.”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씨. 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칼 잘 쓰게 생긴 여인이 눈을 번뜩이며 영목과 나은을 노려보았다. 말투는 공손하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나은에게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다. 영목은 두 여인의 관계를 어렴풋이 헤아려 보면서 나은에게 안쪽의 자리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아씨께서 무례한 청에 이리 흔쾌히 응해 주시어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나은은 새침하게 그가 권한 방석에 자리하자마자 입을 뗐다.
“나를 청한 이유가 무엇이오?”
화롯가에 앉은 나은의 모습 위로 남인혜의 얼굴이 겹쳐졌다. 영목은 공허한 눈으로 나은을 바라보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나는 가끔 꿈을 꿉니다. 이 누각에서 나란히 마주 앉아 계시던 대방 마님과 윤이 도령의 꿈을요. 그리고 생각하지요.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같은 인간이 아니로구나. 저들은 서늘한 낯으로 구름 위에 앉은 인간이고 나는 땅에 발붙인 채 발버둥 치는 인간이구나.”
“그래서, 구름 위에 앉은 이들이 부러워서 친우를 팔아먹고 친우 재산을 다 가지셨구려.”
나은은 싸늘히 비웃으면서 영목을 올려다보았다. 영목은 서 있는 그대로 그녀의 시선을 맞받았다.
“궁금합니다. 나를 그리 무도한 놈으로 여기시면서 왜 내게 그런 서신을 보내셨습니까?”
“나는 귀하는 믿지 않으나 도련님의 안목은 믿기 때문이오.”
“윤이 도령의 안목이라…….”
“그렇소. 내가 알기로는 도련님도, 대방 마님도 적시 적소에 최고의 물건을 두는 분들이셨으니까. 그런 분들이 귀하를 가까이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소.”
영목은 천천히 칼을 빼 들고 나은의 목을 겨누었다. 하지만 나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영목을 질책했다.
“나를 청한 것은 귀하야. 객에게 칼을 겨누면 안 된다고 배우지 못하였소?”
“송구합니다. 근본 없는 자식이라 그런 것은 배우지 못하였네요.”
“하…….”
“대신 제 스승님께선 이렇게 가르치셨지요. 묻는 말에 그럴싸한 궤변으로 대답을 피하는 이는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고.”
“…좋은 스승을 두셨군.”
나은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칼등을 밀어냈다.
“이 칼 치우고 얘기합시다. 내가 귀하의 물음에 대답하려면 아주 부끄럽고 긴 과거를 더듬어야 하거든.”
그녀는 겁먹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영목은 그녀야말로 이 교월루의 주인 같다 생각하면서 칼을 집어넣고 자리에 앉았다. 나은은 티끌 하나 없는 소복의 옷고름을 매만지며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낭군이 아니라 낭군의 종자와 초야를 치렀다오.”
“…예?”
“알고 한 것은 아니야.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맞절하고 초야를 보낸 사내가 내 낭군이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혼례를 치르고 그 집으로 가니 시댁에선 오늘내일하는 병자를 가리키며 내 서방이라 하더군. 내가 나의 낭군이라 생각했던 이는 그 병자의 종자라면서.”
영목은 미간을 구겼다. 당하는 여인 쪽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병든 아들 둔 집에서는 드물지 않은 수법이었다. 영목은 이 수법을 기방이나 투전판에서 몇 번이나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남의 집 귀한 딸에게 그딴 짓을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차피 죽을 아들, 홀로 떠나는 길 외롭지 않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리고 아들이 병사하면 며느리를 목매달아 열녀문을 받기 위해서.
‘감히 병판 댁의 귀한 애기씨를 데려가 그런 짓을 하는 간덩이 부은 집안이 있을 줄이야.’
영목과 나은이 동시에 탄식했다. 나은은 푸스스,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시댁 사람들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잠도 재우지 않으며 윽박을 질렀소. 병판 댁 아씨가 병든 낭군에게 만족하지 못하여 낭군의 종자와 배를 맞댔다. 음탕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부끄러워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하.”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마당 한가운데 꿇어앉은 채 그런 말들을 듣고 또 들었다오. 속은 건 나와 내 가문이고 속인 것은 저들인데 그들은 한없이 당당했소. 너무 당당하여 나도 그만 휘말려 버렸지. 전부 그들 말대로 될 것 같더군.”
그 순간이 생각나는 걸까. 힘주어 말아 쥔 나은의 자그마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도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죄인처럼 고개 숙이며 살았소. 눈꺼풀 한번 들어 올리지 못한 내 진짜 서방은 혼례를 치른 날로부터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지. 시댁에서는 잔치라도 벌일 기세로 내게 열녀문을 받아야 한다 강요하기 시작했소.”
영목이 질 낮은 건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그대로였다.
“새벽마다 시댁 머슴들이 나를 메고 올라가 안학산에 내버렸다오. 내게 왜 이러느냐, 제발 이러지 말라 애원하였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
가만히 듣고 있던 영목은 눈살을 찌푸렸다. 연약한 여인을 추운 새벽의 산에 홀로 내던진다는 건… 절벽에 몸을 던지거나 낭군의 무덤 옆에서 목을 매달라는 강요였다. 나은이 영목의 표정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죽으라고 그런 거였지. 나는 죽을 마음 따위는 요만큼도 없었으나 저항할 방법이 없더군.”
“…….”
“목매라고 던져 준 끈을 들고 새벽 산을 헤매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소. 짐승이 덫에 걸려 신음하는 줄 알고 구해 주려 갔는데… 거기서 좌부승지 댁 파락호(破落戶)와 단이 아씨를 보았소.”
영목의 표정이 굳었다. 새벽에, 산에서, 짐승의 신음인 줄 알고 갔던 곳에서 마주친 남녀 한 쌍. 고고한 귀한 댁 아가씨가 거르고 걸러 입 밖으로 낸 말 속에 담긴 진실이 너무나 처참했다. 영목은 혀끝까지 달랑대는 험한 말을 욱여넣고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내가 한성의 어지간한 망나니들을 다 아는데… 좌부승지네 파락호는 왜 기억에 없지……?”
“그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운종가 뒷골목의 주막에서 퍼져 지냈소. 도련님만 지나가면 시비를 걸던 이라 귀하도 아마 알 텐데.”
“아…….”
영목은 그제야 그 파락호가 어떤 놈인지 기억해 냈다. 아주 나이 많거나 아주 어린 여인만 찾는다는 놈이었다. 기방에는 그의 취향에 맞는 여인이 없어 주로 뒷골목을 어슬렁댄다는 취향 더러운 개자식이었다. 영목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학산이면 숭례문 밖에 있는 산이지. 수상한 산채가 있다면 산 넘어 다니는 담무회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그 파락호 놈의 놀이터는 평범한 가정집의 꼴을 하고 있을 거야. 방물장수나 봇짐꾼들이 굳이 눈여겨보지 않는 집. 과하게 으리으리하지도, 너무 빈한하지도 않은 소박한 집. 좌부승지쯤 되는 집안에 그런 소박한 방계 친인척이 있던가?’
영목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나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한마디 더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 집안의…….”
나은이 입술을 질끈 물고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영목의 눈이 번쩍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