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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70화 (70/157)

70화

“썩 꺼져라!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야! 우리 도련님이 네놈을 얼마나 살뜰히 챙기셨는데 김씨 가문에 들러붙어서 남가 상단을 해 처먹어? 에라이! 머리 검은 짐승은 집에 들이는 거 아니라던 옛말이 틀리지 않다니까!”

영목은 숱하게 욕을 먹고 소금을 맞았다. 사람들은 더러는 가래침까지 뱉어 댔다.

결국 영목의 간청에 응한 사람은 청지기인 권가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권가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도 영목이 죽어 가는 그를 운 좋게 발견해 치료하고 살려 낸 덕이었다. 영목은 그에게 온갖 좋다는 약을 다 갖다 먹였다. 고문으로 하얗게 센 머리와 으스러진 오른 다리는 고칠 수 없었으나 권가는 겨우나마 어찌어찌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권가는 다리를 절룩이며 영목을 따라나서면서도 수십 번을 묻고 또 물었다.

“정말… 정말 영목 도련님이 윤이 도련님을 팔아먹은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니까. 이 패도 대방 마님이 억지로 떠맡기셔서 그냥 맡고만 있는 거야. 단이 아씨 찾는 대로 패 넘기고 나는 사라질 거라고. 정 못 미더우면 권가 자네가 달고 다녀.”

“제가 그걸 왜 가집니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반신반의하는 얼굴을 한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영목의 말을 온전히 믿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남가의 청지기라서 따라나선다는 얼굴이었다. 영목은 노인의 그 변함없는 충직함이 고맙고 미안했다.

“저기… 집 꼬라지가 굉장히 엉망진창일세. 당상관 어르신 돌아오시기 전에 권가 자네가 힘 좀 써 주어.”

“어떤 꼴일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저를 치료해 준 의원이 말해 줍디다. 금줄 걸리기 직전에 강씨, 김씨 가문 사돈의 팔촌까지 다 남가로 몰려들어서 문짝이며 기왓장이며 모조리 떼어 갔다더군요.”

“그냥 떼어 가기만 했으면 다행이게…….”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남가로 돌아온 권가는 참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모습을 마주하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일 년 가까이 엉망으로 방치되었던 집은 전쟁이라도 겪은 것처럼 온갖 곳이 부서지고 날아가 있었다. 정원수와 꽃나무를 뿌리째 파 간 탓에 마당과 정원에는 흉측한 구덩이들이 가득했다. 건물은 더 엉망이었다. 비와 습기에 못 이겨 벽과 바닥이 죄다 곰팡이로 뒤덮인 채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권가를 부축하며 영목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괜찮은가? 다리에서 힘이 풀릴 정도로 엉망이긴 하지?”

“…….”

“보통 품삯의 열 배까지 쳐주겠다고 하고 장정들을 모으고 있어. 집은 금세 고칠 수 있을 거야.”

“집 때문에 주저앉은 게 아닙니다.”

“그럼?”

“저뿐인 거지요? 꼭 찾아서 데려오겠다던 단이 아씨도, 유모도, 다른 사람들도 다 죽고 저만 남은 거지요?”

영목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긴 영목의 침묵 앞에 실소한 권가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팔뚝으로 슥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로군요.”

권가는 상처가 다 낫지 않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빗자루부터 잡았다. 제발 누워 쉬라고 말리는 영목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꾼은 안 씁니다. 어떤 개뼉다귀 같은 놈이 또 나쁜 마음 먹고 이 집에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우선은 영목 도련님과 저, 둘이서 알아서 해 봅시다.”

“하……. 늙은이 고집을 이길 수가 없어, 진짜.”

못 이기겠다는 듯이 투덜댄 영목은 얼마 뒤 우의정의 집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냅다 뽑아 왔다. 윤이 사랑채에 두고 애지중지했던 소나무였다.

“이게 그 집에 있었습니까?”

“나무 욕심이 있는 모양이더라고. 남가 선산이며 마당을 다 파헤쳐서 가져간 나무들이 모조리 그 집에 있어.”

“아, 그럼 진작 뽑아 오시지!”

“눈치 못 채게 하나씩 하나씩 뽑아 올 테니 잔소리 좀 그만해. 얼른 이 문짝부터 손보고 나무 심으러 가세.”

영목과 권가가 투닥대면서 남가 상단의 대문을 못질하고 있던 어느 날, 길고 긴 연행을 마친 남양일이 남가로 되돌아왔다. 청에서 가져온 사치품을 몇 수레나 싣고 오던 남양일은 다 부서진 대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르신,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실 텐데 어서 들어와 쉬시지요.”

권가가 망연해하는 주인의 앞으로 절뚝이며 걸어가 그를 맞이했다. 영목은 권가의 뒤에서 남양일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것만으로 사태를 눈치챈 남양일은 입술을 떨며 영목과 권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들이야말로 고생 많았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세나.”

영목과 권가에게서 지난 일을 전해 들은 남양일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인혜는 김욱진이 평양으로 데려가 장례도 못 치렀고, 윤이는 서소문에 걸렸고, 단이는 행방이 묘연하다는 거지?”

“…예.”

“그래… 알았네.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물러들 가시게.”

남양일은 그렇게 영목과 권가를 물리고 대들보에 목을 달았다. 손자와 딸을 주려고 청에서 가져온 노리개로 종이 한 장을 마룻바닥에 야무지게 고정해 둔 채.

[인혜와 윤이를 따라가네. 뒤를 부탁함세.]

권가도, 영목도 울지 않았다. 눈물로 해결하기에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너무 컸다.

남양일의 시신을 수습하자마자 권가는 영목의 등을 교월루로 떠밀었다.

“이젠 더 잃을 것도,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영목 도련님이 저기서 버텨 주셔야겠습니다.”

비틀대며 밀려 올라간 영목은 윤이 곧잘 서 있던 자리의 난간을 부서지도록 붙잡고 서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영목은 본격적으로 남가 상단의 일에 매진하면서 강씨, 김씨 가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 가문의 영감탱이들이 쉴 새 없이 살수를 보내왔다. 영목은 한결같이 대방의 증명 패를 내놓으라며 달려드는 살수들에게 질려 버렸다. 앵속 때문에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데다 권가까지 보호해야 해서 그는 하루가 다르게 예민해졌다. 영목의 신경질을 견디다 못한 권가가 그에게 독대를 청했다.

“영목 도련님, 도련님의 장점은 느긋하고 느물대는 성격 정도입니다. 그런데 살수 놈들 때문에 그 희박한 장점마저도 없어지려고 하시네요.”

“…뭔 소리가 하고 싶은 건데?”

“영의정, 우의정을 부르시지요. 불러서 남가의 창고가 도련님 목소리로만 열린다는 걸 보여 주세요.”

“어… 욕심 많은 영감탱이들이 그런다고 잠잠해지려나?”

“도련님 죽이면 창고 안에 들어 있는 온갖 보화들도 영영 안녕이란 걸 아니까 살수는 안 보내겠지요.”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시체 처리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권가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조금 미안해진 영목은 권가의 말대로 영의정과 우의정을 모아 놓고 금고가 어떤 원리로 열리는지를 직접 보여 주었다.

“보셨지요? 이전에는 전대 대방 마님의 음성으로만 열리던 것이 이제는 제 목소리로만 열립니다. 절 죽이시면 강씨 가문도, 김씨 가문도 떡고물 얻어드시기 힘들 거예요.”

“떡고물이라니, 감히!”

“하긴. 매달 양쪽 가문으로 섭섭잖게 금괴를 보내 드리고 있는데 떡고물이라는 표현은 너무 저렴했네요.”

두 영감이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기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날 이후로 그 많던 살수들이 뚝 끊겼다. 너무나 빤한 결과에 영목은 쓴웃음을 지으며 은밀히 권가를 불렀다.

“찾아 계시었습니까?”

“응. 영의정이랑 우의정 이간질을 시키고 싶어서. 자네가 머리 좀 굴려 보게.”

“…나 참. 잔심부름이나 하는 늙은 청지기한테 뭘 바라십니까?”

영목은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윤이 도령 살아 있을 때부터 나는 몸, 도령은 머리 담당이었어. 내가 머리 잘못 굴려서 남가가 이 꼴이 된 거 모르겠나? 이제 나는 머리 안 쓸 거야.”

묘하게 설득되는 말에 권가가 깊이 한숨을 지었다.

“제가 보기엔 우의정이 영의정보다 좀 더 얕습니다.”

“응. 내가 봐도 그래. 영의정 영감 속이 훨씬 시커멓고 하는 짓이 더 음흉해.”

“그걸 이용하시지요. 영의정을 몰래 만나서 우의정이 남가 상단의 창고를 노린다고 상담하세요.”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 생각하던 영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야음을 틈타 영의정의 집 담벼락을 훌쩍 넘어 노친네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외증조부님. 이렇게 주무실 때가 아닙니다.”

분명 소스라치게 놀랐을 텐데도 영의정은 능숙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무례한 놈. 근본 없는 중인 출신 아니랄까 봐 이 새벽에 기별도 없이 마구 찾아드느냐?”

“사안이 너무 급하여서요. 아, 외증조부님 좀 뵈려 하니 검은 복면 쓴 놈들이 귀찮게 굴길래 적당히 죽여서 치워 놨습니다.”

“…….”

영의정이 영목을 노려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영목은 틈만 나면 강씨 가문이 키우는 검귀들을 잡아 죽여 노친네의 서재에 처박아 두었다.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영목은 환담이라도 나누는 듯한 맑은 목소리로 없는 말을 지어냈다.

“말씀을 드릴까 말까 많이 고민했습니다만… 조부님보다는 외증조부님이 더 믿음직한 뒷배가 되어 주실 듯하여서 말이지요. 아무렴, 우의정보다는 영의정 아니겠습니까?”

영의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아부를 하는 걸 보니 퍽 못돼 먹은 짓을 꾸미는 듯한데.”

“못돼 먹은 짓은 조부님이 꾸미고 계십니다. 제가 김씨 가문의 양자이니 응당 김씨 가문에 더 많은 금괴를 보냄이 옳다며 어찌나 잔소리를 하시는지.”

영의정은 찌푸린 얼굴 그대로 영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영목도 싱글대는 낯으로 노련한 늙은이를 마주 보았다.

“할 말은 그게 다냐?”

“이 정도면 충분치 않습니까?”

“노친네 잠 깨운 패기가 가상해 시간을 내어 주었건만. 허접하기 짝이 없는 이간질이구나. 썩 꺼져라.”

영의정은 들개를 쫓는 것처럼 건성으로 손을 내젓고 휙 돌아누웠다. 영목은 그의 등에 절을 올리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바로 다음 날, 한양에는 우의정이 급환을 얻어 몸져누웠다는 소문이 퍼졌다. 교월루로 차를 가져온 권가가 넌지시 말을 흘렸다.

“소문을 들으니 우의정이 매병 든 노인처럼 멍하니 있다가 피거품 섞인 기침을 한다고 하네요.”

“아, 그거……. 앵속이랑 이것저것 섞인 탕약을 먹인 거야. 내가 그거 먹고 속 다 곯아서 잘 알지.”

“이독제독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나 봅니다.”

권가와 영목은 술잔을 나누듯 찻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믿었던 연초 잎 장사는 요원해졌다. 연수산이 그 누구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며 지독한 안개로 둘러싸인 탓이었다. 남양일의 죽음 이후로 청나라 물건을 얻기도 어려워졌다. 하는 수 없이 남가 상단은 연수산과 청나라의 귀한 물품들 대신 범산에서 나는 기묘한 초목들과 그것으로 만든 약재를 다루는 상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담무회를 총동원한 덕에 어수선하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제법 체계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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