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아이고. 자는 사람 붙들고 왜 이러실까.”
“모르는 척 말아라! 우리 가문 사람들을 불태우고 그 목을 잘라 조부님 댁에 던지는 짓 말이다! 네놈 짓이지?”
영목의 멱살을 틀어쥔 강자영이 윽박을 질렀다. 영목은 잠에 취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마음이 급하긴 급했나 보네. 항상 달고 다니는 시커먼 복면 검귀들도 없이 혼자 달려온 걸 보면.’
남몰래 집을 빠져나가 밤새 불을 지르고 훌쩍 되돌아와선 한낮까지 늘어지게 자고 있던 영목은 그녀가 흔드는 대로 휘청이면서 느릿느릿 대꾸했다.
“제 짓이라니요. 온 한성 사람이 죄다 꽝철이 짓이라고 입을 모으는데. 소문 못 들으셨어요?”
“둘러대지 마라! 너지! 네놈이 분명해!”
“마님께 매일 앵속을 한 덩어리씩 받아먹고 하루 종일 폐인처럼 늘어져 있는 제가요? 듣자 하니 그거 한 덩어리면 호랑이도 잡는다더만. 그렇게 독한 걸 매일매일 씹어 먹으면서도 정신 멀쩡히 살아 있는 제가 괴물이라던데요?”
영목이 강자영을 올려다보면서 나른하게 되물었다. 추궁하던 강자영마저 말을 잃었을 정도로 너무나 느긋한 음성과 나른한 낯이었다. 영목은 제 멱살을 쥔 여자를 올려다보며 쓰게 자책했다.
‘어차피 강자영은 내게 단의 행방을 알려 주지 않았을 거야. 괜한 미련 두지 말고 지금처럼 했어야 했어. 온갖 놈들을 온갖 방법으로 해치고 다니며 겁을 주어야 했다. 진작 그랬다면 윤이 도령도, 대방 마님도 그렇게 괴롭게 죽지 않았을 텐데. 내 잘못이다.’
머릿속과는 영 다르게, 영목은 잠에 취한 눈을 끔뻑이며 미련한 체에 힘썼다. 그런 영목의 모습에 부아가 치민 강자영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어유. 아파라.”
매서운 기세에 뺨이 금세 붉게 부풀고 터진 입술에서는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영목은 뺨을 매만지는 척하면서 강자영이 눈치채지 못하게 소매를 훑었다. 결심이 서면 자결이나 하려고 숨겨 두었던 가느다란 장침이 만져졌다. 영목의 눈이 행복한 웃음으로 환하게 휘자 강자영이 온 얼굴을 다 구기며 화를 냈다.
“네 이놈!! 남단, 그 계집애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지? 그 업둥이 손목부터 잘라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릴 테냐!”
“누가 압니까? 단이도 이미 한참 전에 죽었을지.”
“…허. 이놈 봐라……?”
“살아 있는 건 맞아요?”
“영목아, 네가 비뚤게 굴면 그 업둥이가 험한 꼴 보게 된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지 않았니?”
“아, 그래서 되도록 안 비뚤어지려고, 잘 훈련된 개처럼 살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말이지요.”
영목은 피가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리고 제 피가 묻은 손등을 강자영의 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유독 제게만 이리 가혹하시니 안 삐뚤어질 수가 있나.”
“…뭐?”
강자영이 천천히 눈썹을 구겼다. 영목은 좁아지는 그녀의 미간을 살살 문질러 펴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왜 저한테 지랄이시냐고요. 전 부인 시체 끌어안고 평양으로 훌쩍 떠난 야속한 서방은 어쩌지도 못하면서.”
“너… 너, 말 다 했느냐!”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많으나―”
약에 취한 듯 풀어진 발음으로 웅얼대며 말하던 영목이 눈에 이채를 띠고 씩 웃었다.
“제 정인이 감사와 사과는 응분의 재물로 표하라 해서요.”
불안해진 강자영이 피할 새도 없이 영목이 그녀의 정수리에 장침을 꽂아 넣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감사할 일은 하나 있는데 달리 드릴 재물이 없어서 이렇게나마 작은 정성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영목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쪼개지 않는 이상 빼낼 수 없을 정도로 침을 꾹꾹 눌러 쑤셔 넣자 강자영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원래는 윤이 도령과 똑같이 만들어서 서소문에 걸어 두려고 했는데 말이지요.”
“끅, 끄윽… 큭.”
“사촌 댁에 불 지르고 오다가 우연찮게 권가를 발견해서 살려 드리는 겁니다. 아시지요? 남가의 청지기였던 권가.”
짚 인형처럼 무너져 내린 강자영을 쳐다보며 영목은 홀가분하게 미소 지었다. 두려움도 죄책감도 없었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윤이 그의 인간성이고 그의 양심이었다. 김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영목에게서 인간성과 양심을 앗아 갔다.
‘그러니 기백 명을 죽이고 수십 채의 집을 불태워도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겠지.’
영목은 그동안 등신같이 참고 당하기만 했던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윤이 항상 저를 귀히 바라보며 사람처럼 대해 주었기에 사람같이 굴어야 한다고,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쓸데없는 짓거리였다.
‘갓 태어난 동생 업고 나뭇가지로 사람 찔러 죽인 괴물이면서… 어울리지도 않게 사람 흉내를 내고 살았네.’
영목은 콧노래를 흥얼대면서 혼절한 강자영을 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의 방으로 갔다. 꽝철이의 저주니 뭐니 하는 소문이 겁나 노비들이 열심히 도망을 치고 있는 탓에 집 안은 그 어느 때보다 한적했다.
보료 위에 강자영을 대충 내려놓은 영목은 느긋하게 그녀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물레방앗간에서 빼앗긴 내 환도가 분명 여기 있을 거야.’
강자영은 남인혜를 부수는 것과 영목을 소유하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앵속으로 절인 폐인으로 만들어서까지 인형처럼 곁에 두려 했던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사람이 내 물건을 검귀 따위에게 넘겼을 리 없지.’
영목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는 강자영의 옷장 가장 안쪽에서 빼앗겼던 환도를 찾아냈다.
윤이 선물해 주었던 새카만 칼을 움켜쥐자 영목은 울컥 목이 메었다. 그는 눈물을 흘릴 주제도 못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품에서 붉은 비단 끈을 꺼냈다. 함정인 줄도 모르고 물레방앗간으로 갈 생각에 들떠 있던 날, 윤이 영목의 머리에 묶어 주었던 댕기였다. 영목은 모란 수 놓인 붉은 댕기를 칼집 고리에 몇 번이나 매듭지었다.
‘윤이 도령이 내게 준 것들이 참으로 많았는데… 이제 내 손에 남은 흔적은 이 둘뿐이네.’
입 안에 쓴 물이 돌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영목은 의식을 잃은 강자영을 반듯하게 눕혔다.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그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참 하찮고 연약한 인간인데. 나는 대체 뭐가 그리 두려워서 참고 당했나.’
꽤나 한참 동안 강자영을 내려다보던 영목은 지을 수 있는 한 가장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아무도 없느냐! 마님이 쓰러지셨다!”
그날 이후로 강자영은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누워 숨만 쌕쌕 쉬고 있을 뿐이었다.
강자영이 갑작스레 산송장이 되자 꽝철이의 저주라는 소문에 날개가 달렸다. 체면치레 좋아하는 사대부들마저 영의정과 우의정 집안사람들 만나기를 꺼려 했다. 영목이 바라던 그대로.
제 부인이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다는데도 평양에 있는 김욱진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도망치기 바쁜 하인들 때문에 우의정의 시름만 날로 깊어 갔다.
영목은 이때다 싶어 우의정 집 우물에 투구꽃의 즙을 부어 넣기 시작했다.
‘묽게 희석한 투구꽃즙을 꾸준히 마시면 서서히 쇠약해진다. 최 역관 탕약에 앵속이랑 섞어서 아주 요긴하게 썼던 걸 이렇게 또 써먹는구만.’
영목은 우의정의 집 우물에 독을 타고 까맣게 그을려 모락모락 김이 이는 머리통들을 영의정의 집 담벼락 안으로 던져 넣기를 꼬박 두 달간 계속했다.
‘불타 죽을까 무서워서라도 영의정이 우의정을 찾아오겠지.’
영목은 남가의 식솔들 중 살아남은 이들을 수소문하며 그렇게 짐작했다. 그러나 영목의 짐작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평양에 처박힌 아들은 감감무소식, 며느리는 혼수상태, 본인의 몸도 쇠약해지자 우의정이 먼저 발을 동동 구르며 영의정을 찾아갔다.
“우리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지 싶소만.”
“오. 마침 찾아뵈려던 참인데 잘되었소.”
제집에도 꽝철이가 찾아올까 두려워진 영의정은 우의정을 쌍수 들어 반겼다.
두 늙은이는 장장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참으로 시시했다. 두 영감은 ‘모든 것이 오해이고 음해로 밝혀졌으니 부디 남가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별 반대 없이 빠른 윤허가 떨어졌다. 싱겁게도 그게 다였다.
두 영감은 영목을 앞세워 남가 상단 한복판에서 굿판을 벌였다. 오래 비워 둔 집에서는 으레 이렇게 굿판을 열어야 한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한성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이 꽝철이를 달래고 김씨와 강씨 가문의 안녕을 비는 굿이라는 걸.
열 달 만에 남가의 대문에 걸린 금줄이 잘리고, 대역 죄인의 오명도 씻겼다. 한성 사람들은 요란스럽기 그지없는 굿판에 떡이라도 얻어먹으려 모여서도 저마다 입 앞에 손을 대고 수군대기 바빴다.
영목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이 소란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한 집안의 흥망이 두 영감의 쿵짝에 좌지우지되는 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욕지기가 치밀었다. 울컥 솟는 구역감을 힘겹게 견디며 그는 폐허가 다 되어 가는 집 안 꼴을 둘러보았다.
휘황찬란하던 남가의 물건들은 두 가문에서 알뜰하게 빼돌린 지 오래였다. 아흔아홉 칸 기와집은 아흔아홉 칸짜리 흉가가 되었다. 사람도, 짐승도 얼씬대지 않은 탓이었다.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 했던가. 결국엔 대방 마님의 예상 그대로 되었네. 성질 풀릴 때까지 남가를 짓밟고, 당상관이 돌아오기 직전에 선심 쓰듯 누명을 벗기는 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는 영목이 저들을 짓밟을 차례였다.
물론 영의정이 은밀히 키우는 사병들을 모두 동원해 영목을 친다면 영목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나도 알지. 사병을 키운다는 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뜻이라… 역적으로 몰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섣불리 군사를 움직이진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야. 나는 집 안에 돌아다니는 검귀들을 매일 다섯 놈 정도만 꾸준히 몰래 죽이면서 착실히 수를 줄여 나가면 돼.’
시커멓게 썩어 가는 영목의 속도 모르고 두 영감탱이는 영목을 남가 상단으로 떠밀었다.
“남가의 억울함도 다 풀렸겠다, 영목이 네게 그 금패가 있으니 상단 일을 도맡아야지?”
“남양일이 돌아오면 잘 둘러대는 것 잊지 말고.”
내심 찔리기는 했던 걸까, 아니면 당상관이 청의 황제에게 나쁜 말이라도 전할까 두려웠던 걸까. 영의정과 우의정은 영목에게 몇 번이나 거듭 당부했다.
‘모양 빠지는 영감탱이들……. 그렇게 후환이 두려우면서 왜 남가를 건드려?’
늙은이들 등쌀에 진저리를 치면서 영목은 본격적으로 남가의 식솔들을 찾아 나섰다.
그 많던 식솔들 중 절반은 이미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나머지 절반은 영목의 꼴도 보기 싫다며 소금을 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