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백사와 불란서 의사 선생이 곪고 터진 환부를 소금물로 소독하고 있을 때였다.
“되게 바빠 보이네요.”
세경이 태연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울먹이는 얼굴을 꾸벅 숙여 인사하는 백사에게 손을 까딱였다.
“거기. 어린 이무기.”
“네.”
“범산으로 가요.”
“…네?”
“지금 어른들끼리 아주 내밀하게 좋지 못한 짓을 궁리할 참인데 말이야. 거기는 덕 쌓아야 하는 이무기잖아? 괜한 데 얽혀서 손해 보지 말고 멀리 가 있으라고.”
잠시 망설이던 백사가 고개를 저었다. 백사는 범산 산군이 애지중지 기른 구김살 없는 이무기라 영물치고는 성격이 꽤 유순하고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세경은 백사가 설마 용의 명령을 거부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경이 미간을 좁혔다.
“백사. 나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용이고, 백사는 이무기고, 이무기는 용의 명령을 따라야 할 텐데?”
그녀가 제법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백사는 세경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환부의 소독에만 집중하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하나 지금 의원 나으리를 도울 수 있는 이는 오직 저뿐입니다. 제가 이제 막 배우는 단계인지라 큰 도움은 못 될지 몰라도… 그래도 저라도 손을 쉬어서는 아니 된다 생각합니다.”
“마음은 갸륵한데, 난 백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압니다. 저는 없는 듯이 있을 터이니 두 분은 하실 것을 하세요.”
세경의 날 선 기운이 아니 무서울 리 없을 터인데 백사는 고집스러운 대답만 반복했다. 어리고 약한 이들의 발버둥을 기꺼워하는 세경은 더 이상 엄하게 굴 수가 없었다. 그녀가 턱을 긁적이면서 백사에게 물었다.
“…퍽 정결치 못한 짓을 할 건데?”
“산군께서는 제가 아주 정결한 이무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여기에서 다소 정결치 못한 일에 연루된다 한들 덕 쌓는 일에 큰 지장은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평소에 워낙 정결하게 살았으니까요.”
곧 죽어도 이곳에서 맡은 바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고집이라 세경도 이 이상은 강요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가만히 용과 이무기의 대화를 지켜보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백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백사야, 세경 마님께서 무언가 퍽 부정한 이야기를 하실 모양이구나. 너는 수련하는 이무기라 부정한 일을 보고 들어 좋을 것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잠시만 저기 후원으로 가 있으렴.”
백사는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윤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달래듯이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세경 마님의 말씀이 다 끝나자마자 내가 큰 목소리로 너를 부르마. 그때까지 후원 당산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되지 않겠니? 여기서 하는 부정한 이야기가 안 들리도록 귀를 꼭 막고 숫자 500까지 세면 딱 되겠다.”
조곤조곤한 그의 설득에 백사는 결국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사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세경이 장난스레 불란서 의사 선생을 툭 쳤다.
“서양 용은 하는 짓거리마다 영 개차반이던데. 두 번째 제자는 쓸데없을 정도로 성실하고 착한 이무기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미하가… 멋대로이긴 하지만 개차반까진 아닙니다.”
세경은 묵의 편을 드는 신부가 우스워 입을 가리고 쿡쿡댔다. 그러고는 그 웃음이 잦아들기도 전에 파랗게 질려 가는 윤을 가리켰다.
“자아, 내가 강짜를 부려 착한 이무기를 쫓아냈으니 이제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지금 열심히 치료하고 있지 않습니까?”
“으음. 이게 의사 선생의 최선은 아니지요.”
불란서 의사 선생이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마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닐걸. 내가 뭘 요구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대의 표정이 그 모양인 게지.”
“…세경 마님, 나는 서양 의술을 익힌 평범한 서양 의사일 뿐이에요.”
“어머. 세상 어떤 평범한 의사가 박쥐를 부리고 벌레를 다스리고 그림자를 움직인답니까?”
세경은 항변하려는 불란서 의사 선생의 말을 가로막고 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윤의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 인간의 의술로는 살릴 수 없다. 이것이 세경의 판단이었다.
죽어 가는 윤의 얼굴 위로 영목을 떠올린 세경은 평소에 없던 간절함까지 담아 불란서 의사 선생을 설득했다.
“그대는 죽은 걸 되살리는 건 못 해도 거의 죽은 걸 깨어나게는 할 수 있잖아요. 서양 창귀니까.”
“…날더러 이 도령을 흡혈귀로 만들란 말입니까?”
“오죽하면 내가 이런 부탁을 하겠어요?”
세경은 불란서 의사 선생의 선량함에 기대하고 있었다. 남가 상단은 남인혜에서 남윤까지, 두 모자가 살뜰히도 서래원을 후원했다. 세경이 판단하기에 불란서 의사 선생은 그런 은혜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아…….”
그녀의 짐작대로 신부는 죽어 가는 윤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며 한숨만 연발하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간 세경은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척 슬며시 소맷자락을 털었다.
“내가 의사 선생에게 달리 해 줄 건 없고, 이런 잡풀 정도는 간간이 가져다줄 수 있는데 말예요.”
세경의 소매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소금물이 출렁이는 놋쇠 대야 위로 소복이 내려앉았다. 꽃잎이 닿자마자 핏물로 탁해졌던 물이 금세 맑게 정화되었다.
“상처에 꽃잎을 으깨 올리면 제법 쓸 만하답니다? 서천 꽃밭의 살살이꽃에서 떨어진 애들이라.”
깨끗한 헝겊에 그 물을 적셨던 신부가 잠시 머뭇대다가 꽃잎을 으깨 윤의 상처 위로 올렸다. 맑아진 물처럼 윤의 피부도 언제 상했냐는 듯이 원래의 매끈한 형태를 되찾아 갔다. 불란서 의사 선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경은 그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채 남은 꽃잎들을 탈탈 털며 말을 이어 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내 선에서 알아서 했을 거예요. 하지만 신은 인간 생사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는 거지 같은 원칙이 있어서 말이지요.”
비단 버선을 신은 세경의 발이 방바닥을 느리게 두드렸다.
“이 뜨끈한 구들장. 반질반질한 장판. 다 쓰러져 가는 흉가였던 곳을 이렇게 번듯한 의원으로 만들어 준 것.”
“…….”
“서래원이 참 많은 부분에서 남가의 덕을 보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라요.”
불란서 의사 선생은 새카만 제 수단이 늘어진 방바닥과 그 위에 시체처럼 누운 윤을 쳐다보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세경의 목소리가 조금 더 다정해졌다.
“그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나야말로 마음이 썩 달갑지 않답니다. 그놈의 원칙. 짜증 나는 원칙 때문에 나는 도령을 살릴 수가 없어 이래요.”
“후우…….”
불란서 의사 선생이 길고 긴 한숨을 뱉었다. 세경은 그 한숨 소리가 승낙의 대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히 웃었다.
“그대가 내 부탁을 들어주어 도령의 숨만 붙여 놓는다면… 나는 그대가 궁금해하던 서천 꽃밭의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다. 전부터 알고 싶어 했지요?”
불란서 의사 선생의 눈이 툇마루 구석에 놓인 낡은 수첩을 향했다. 세경은 불란서 의사 선생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의 소원이라 하였던가요? 머지않은 언젠가 조선의 신과 신선과 귀신을 정리한 책을 만들겠다는 게.”
그랬다. 그래서 불란서 의사 선생은 예전부터 세경의 서천 꽃밭에 대해 이것저것 묻곤 했다. 세경은 호기심 많은 서양 신부의 질문을 매번 귀찮다는 말로 일축했고.
“나는 인간의 딸로 태어나 땅의 용이 된 유일한 사람.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신비로운 꽃밭의 주인이지요. 그대의 오랜 염원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거래 아닌가?”
그녀의 말대로였다. 윤을 도와주면 꽃밭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겠다는 세경의 유혹이 신부에게는 더없이 달콤했다. 게다가 다디단 유혹에는 ‘거부하면 땅의 용과 척질 각오를 하라’는 경고까지 담겨 있었다. 세경의 말을 곱씹던 신부는 긴 한숨과 함께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경 마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나… 흡혈귀가 된다면 도령은 피를 탐하고, 갈증에 시달리고, 적응될 때까지 햇빛 아래를 걸을 수조차 없을 겁니다. 정녕 이 도령이 그런 꼴로 살길 바라십니까?”
“어머.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만 하면 발전이 없답니다.”
“…….”
“발상을 바꿔 보아요. 가르칠 것이 아주 많은 세 번째 제자가 생긴다― 정도로.”
불란서 의사 선생은 세경을 보며 묵을 떠올렸다. ‘미하’라며 대천사의 이름을 붙여 기르고 가르친, 아들이자 친구이자 제자 같은 용의 얼굴을.
‘동양의 용이나, 서양의 용이나… 용이라는 종족은 어쩜 저리 하나같이 낯이 두꺼울꼬.’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한탄하며 혀를 찼다. 천사의 얼굴과 천사의 이름을 가지고 세상 둘도 없는 망나니처럼 구는 묵도 묵이지만 선녀 같은 얼굴에 신의 이름을 지닌 눈앞의 여인에게선 고요한 광기가 감지되었다.
잠잠하게 미쳐 가는 땅의 용이 살며시 눈꼬리를 접었다.
“나는 그대 생각보다 훨씬 성미가 급하답니다. 인간의 생명 줄은 그대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고요.”
“하아…….”
세경이 부드러이 속삭이는 그 모든 단어가 진심이었다. 그녀는 거부 따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흉포한 본심도 감추지 않고 내비쳤다.
가만히 불란서 의사 선생의 결심을 기다리던 세경은 윤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나오자 신경질적으로 놋쇠 대야를 툭 걷어찼다.
“뭐가 그리 고민스러울꼬. 앞선 두 제자들보다 세 번째가 훨씬 유능하지 싶은데. 가르치는 보람도 있을 것 같고. 덤으로 내 꽃밭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불란서 의사 선생의 시선은 대야 속에서 출렁이는 꽃잎에 못 박혀 떠날 줄을 몰랐다. 그의 손에 들린 헝겊이 복잡한 심경을 담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겨졌다.
문득 세경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새카만 수단 끝자락에서부터 서서히 영역을 넓히던 신부의 그림자가 온 바닥을 잠식하고 있었다.
“어머. 결심을 마쳤으면 말을 해 주지. 괜히 성냈잖아.”
항상 청명한 가을 하늘 색으로 온화하게 빛나던 불란서 의사 선생의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영물이 된 호랑이보다도 더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세경을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