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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66화 (66/157)

66화

“어디 얼굴이 다 뭉개지고도 그렇게 눈 부릅뜨고 노려볼 수 있는지 보자.”

“어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내의 등 뒤에서 동무와 농담이라도 하는 것 같은 가벼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웬 년― 윽!!”

누구냐 물어볼 겨를도 없이 윤의 뺨을 철썩철썩 내리치던 사내의 손이 종잇장처럼 으스러졌다.

“말본새 더러운 아이는 혼이 좀 나야지.”

손부터 시작해 팔이, 어깨가, 전신이 구깃구깃 구겨지던 사내는 비명 한마디 내지르지 못하고 형편없는 꼴로 바닥을 굴렀다. 사뿐사뿐 다가온 여인이 벌레처럼 꿈틀대는 사내를 툭 걷어차며 윤을 책망했다.

“도령, 내가 준 호두로 악력 연습을 게을리했나요? 서천 꽃밭에서 나는 신물을 줬는데 고작 요런 옥사에서 탈출을 못 했어?”

여인의 고운 입술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세경이었다. 이맛살을 구긴 세경은 검지로 윤의 턱 끝을 잡고 상품을 품평하듯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세상에. 잡티 하나 없이 마냥 곱고 뽀얀 게 귀여워서 맡아 주겠다 한 건데. 그걸 이렇게 망가뜨렸네?”

그녀는 갓난아기를 안아 들듯 묶여 있던 윤을 답삭 들고 옥사를 나섰다. 나가는 길에 인두를 가루처럼 으스러뜨리고 화로를 걷어차 불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건 괴롭혀도 내가 괴롭힌답니다. 우리 종족이 자기 게 남의 손 타는 꼴은 절대 못 보거든.”

말 한마디 뱉을 기운조차 없는 윤의 눈에 새빨간 불길에 집어삼켜진 옥사가 비쳤다. 윤이 무언가 물으려는 순간에 세경이 깜빡 잊었다는 듯이 걸음을 멈췄다.

“세간에는 도령이 죽은 것으로 해 두어야 덜 귀찮아지겠지요? 우의정네 겸인인지 뭔지 하는 저 버릇없는 놈에게 그 역할을 맡기면 되겠다.”

그러고는 윤의 허리에 달린 남가 상단 도방의 증명 패를 떼어 옥사 입구 근처에 성의 없이 내던졌다. 윤의 표정을 읽은 세경이 장난을 들킨 악동 같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착각하지 말아요. 나는 절대 저 겸인인가 뭔가를 죽인 게 아니야. 신은 인간 생사에는 관여할 수 없잖아요.”

“…….”

“나는 급히 나가다가 실수로 화로를 쓰러뜨린 거고, 저 인간은 잠깐 기절해 있느라 불난 곳에서 못 빠져나갔을 뿐. 요 정도의 불미스러운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충분히 생길 수 있지요.”

“왜… 이렇게까지…….”

“묻지 말아요. 나야말로 도령을 이렇게까지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무언가 더 말하려던 윤이 고통에 못 이겨 경련했다. 가만히 윤을 안고 나는 듯이 걷던 세경이 그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윤의 입에서 선혈이 한 움큼 뿜어져 나왔다.

“정신 놓지 말아요. 지금 의식을 잃으면 도령은 죽어.”

“…….”

“아무리 아파도 눈 똑바로 뜨고 버텨요. 죽어 가는 게 아니라 조금 많이 지쳤을 뿐이라는 걸 내게 증명해요.”

대답이 없자 그녀가 윤의 뺨을 재차 내리쳤다. 축 늘어지던 윤의 목이 반대쪽으로 크게 꺾였다.

“정신 차리라니까요? 나는 신이라 조금 많이 다친 사람을 부축하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건 규칙에 어긋난단 말이야.”

윤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손끝을 세워 제 손등을 긁었다. 모진 고문으로 손톱이 다 뽑혀 나간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나 그는 사력을 다해 손끝에 힘을 주었다. 영목이 내었다가 겨우 아물어 가는 상처 위로 새 생채기가 더해졌다.

‘최 형을 만나야 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윤은 영목을 떠올리면서 손에 고통을 더했다. 세경이 기특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꽃인 듯 화초인 듯 하늘거릴 땐 영 별로였는데, 가시를 세우니까 이제 조금 마음에 드네. 목숨 건지고 싶으면 지금처럼 그렇게 정신 잘 잡고 있어요.”

순식간에 연수산 앞의 입석에 다다른 세경은 윤의 몸뚱이를 입석 아래 살포시 내려놓았다.

“이제 여기부터는 도령의 발로 넘어서야 해요. 바꿔 말하면 이 이상은 내가 도령을 못 데려간다는 거지.”

윤의 눈길이 연수산의 입구를 알리는 거대한 입석과 땅바닥에 널브러진 제 몸뚱이를 느리게 오갔다.

‘인간의 땅에서 내쫓긴 인간이 목숨을 건지려면 제힘으로 신의 땅 안에 들어서야 한다는 건가.’

이유를 알 듯 모를 듯한 규칙이었다. 비전(祕傳)이란 으레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자 윤의 입술에서 한숨인지 웃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경이 허리를 숙여 윤과 눈을 마주쳤다.

“웃는 거 보면 움직일 기운은 있나 보네. 연수산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목숨만은 어떻게 해 줄 테니까 잘해 봐요. 응?”

윤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세경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 참. 죽어 가는 와중에도 인사를 하고 있으니……. 안 귀여워할 수가 없다니까, 정말.”

왈칵 짜증을 낸 그녀는 치맛자락을 획 말아 쥐고 사라졌다.

윤의 눈이 힘없이 감겼다. 주변은 이미 온갖 꽃이 만개한 봄이건만 홀로 남은 윤에겐 온 세상이 마냥 춥고 아프고 캄캄했다.

‘피로하다.’

감은 눈꺼풀 안에는 저를 믿지 못하느냐며 서운해하던 영목의 얼굴만 가득했다. 돈의문 앞에서 만나 연수산으로 피신하자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살아서, 만나서, 전해야 한다. 내가 잘못했다고, 문득 억울하고 사무치게 원망스럽긴 하였으나 믿지 아니한 적은 없노라고 말해야 해.’

윤은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기어서라도 연수산 안에 들어서야 하는데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강이도, 팔꿈치도 으스러진 지 오래였다. 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 문세경이 내게 떠맡기려 일부러 여기 버려 둔 건데… 빤히 알면서 낚이기는 불쾌하단 말이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윤은 흐려진 초점을 다잡았다. 초록색 풀이 돋아난 땅 위, 새카만 가죽 구두 한 켤레가 윤을 향해 서 있었다. 구두의 주인이 또 한 번 크게 혀를 찼다.

“쯧. 가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걸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려… 살려 주십…….”

“그래요. 문세경 수작질에 넘어간 게 아니라 그쪽이 너무 간절히 애원해서 도와주는 걸로 하자고.”

남자는 망가진 헝겊 인형을 끌고 가는 어린아이처럼 윤의 목덜미를 성의 없이 잡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윤의 발끝이 땅에 긴 자국을 그리며 연수산 입석을 지나 옹기 가마터를 지났다. 사내가 기다란 손가락을 펼쳐 땅바닥을 가리켰다.

“본인이 낸 발자국 보이나? 이 정도면 그쪽 발로 경계를 넘은 셈 칠 수 있으니까 이젠 속 편히 기절해도 되지 싶은데.”

“감사…합…….”

윤이 뭉개진 발음으로 감사를 전하며 까무룩 의식을 놓았다. 남자는 그제야 윤을 제대로 안고 서래원으로 향했다.

“무기 나으리 오셨어요?”

잰 발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던 백사가 반색하며 남자를 반겼다. 서래원 안쪽에서 분주하게 오가던 불란서 의사 선생은 그를 보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 나와 잔소리를 퍼부었다.

“미하! 돈의문 영감에게 가서 약초 좀 사 오랬더니! 약초를 길러 오는―”

“아, 시끄럽고. 한가하면 이거나 고쳐 봐. 오다 주운 건데.”

불란서 의사 선생은 묵이 떠넘기는 사람을 엉겁결에 받아 들며 한탄했다.

“미하 너는 세상 쌀쌀맞은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어디서 이렇게 송장 같은 중환자만 데려오냐.”

“눈에 걸리적거리는 걸 그럼 두고 와? 신부라는 놈이 매정하긴.”

“…….”

“상태 보니 쉽게 못 고칠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친히 주워 온 수고가 있으니 하는 데까진 해 봐.”

고개를 끄덕이던 불란서 의사 선생은 품에 안은 사람의 얼굴을 그제야 알아보았다.

“잠깐… 이 사람, 남가 상단 도령이잖아! 어떻게 된 거냐?”

“나야 모르지.”

상세한 설명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의 새파란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묵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숨을 내쉰 불란서 의사 선생이 윤을 안고 방으로 달려 들어감과 동시에 안에서 백사가 재빨리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아……. 의원 나으리… 도령의 상태가…….”

능숙하게 윤의 옷을 벗기던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윤의 몸에는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너무 늦었지 싶은데.’

질끈 눈을 감았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입술을 물고 백사를 향해 손짓했다.

“백사야. 소독을 해야겠다. 소금물과 삼칠근, 선엽초를 가져오렴. 토란도 있으면 곱게 으깨 주고.”

“그게… 소금물이야 항시 준비되어 있으나 약재가 부족합니다.”

“당장 가져올 수 있는 건 다 가져와 봐.”

백사가 팔을 걷어 올리며 달려 나갔다. 묵은 백사와 불란서 의사 선생이 뜨거운 물을 나르고, 윤의 옷을 벗기고, 환부를 살피는 것을 구경하면서 주변을 얼쩡거렸다.

“어때? 내가 주워 온 것, 살릴 수 있겠어?”

“미하 네가 약초를 얼마나 잘 사 왔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약초 줘.”

“어……. 약초 없는데.”

“뭐?”

백사와 불란서 의사 선생이 동시에 묵을 쳐다보았다. 둘의 눈에 질책과 원망이 가득했다. 묵은 약간 억울해하면서 범산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맨날 약 사러 가는 돈의문 영감네 약방이 화마를 입었어. 약방만 탄 게 아니라 그 동네가 모조리 숯 덩어리더라.”

“그건 또 무슨 일이야…….”

“몰라. 숯 더미 속에서 약초를 뒤지기엔 내 손이 너무 귀한 듯싶기에 빈손으로 오다가 저걸 주운 거야.”

얄밉도록 나긋이 웃던 묵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기가 찬 불란서 의사 선생이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에 그는 여상히 뒷짐을 지고 서래원의 문턱을 넘어갔다.

“큭!”

순간 윤이 울컥 피거품을 토한 덕에 불란서 의사 선생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윤의 목을 옆으로 돌려 숨길을 터 주면서 묵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하! 이렇게 위중한 환자가 있는데 일손이라도 도와야지! 어디 가!”

“뭐야……. 당장 약초 필요하다며? 약초 사러 가지 말고 도와?”

“…….”

“아무리 나라도 환자 수발들며 약초를 수급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순 없는데. 어쩔까? 널 도울까, 약초 사 올까?”

“…빨리 다녀와라.”

“노력은 해 볼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묵이 모습을 감췄다.

“개놈 새끼 저거.”

불란서 의사 선생이 싱글대며 사라진 묵의 뒷모습을 향해 낮은 욕설을 뱉었다가 급히 성호를 그었다. 가만히 눈치만 살피던 백사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도령… 살 수 있을까요……?”

“미하가 말은 저따위로 해도 서둘러서 약재를 챙겨 올 거야. 그때까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잘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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