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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64화 (64/157)

64화

영목은 지난 몇 년간 항상 윤과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어 온천 동굴로 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니 윤의 온기에 기대 누운 것만 같았다.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흐으…….”

영목이 얼굴을 감싸 쥐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음을 터뜨린 찰나. 동굴 입구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십니까.”

대충 눈물을 닦아 낸 영목이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몸을 숨겼던 기다란 인영이 슬금슬금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어… 나……. 백사야.”

멀찍이서 쭈뼛거리던 커다란 사내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백사의 모습을 확인하고 영목은 잔뜩 긴장해 움츠렸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오랜만입니다, 백사 님. 서래원에서 배우시는 일은 이제 손에 많이 익으셨어요?”

영목이 언제 울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동굴 입구 언저리에서 머뭇대던 백사가 목뒤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영목이 몸을 담근 온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둘러메고 있던 보퉁이를 뒤적였다.

“있지, 이건 막 생긴 상처 위에 바르면 곪고 덧나는 걸 막아 주는 율피분이야. 그다음에 이 고약을 붙이고 깨끗한 천으로 감아 주면 돼. 그리고 이 환약은 식후에 먹어. 통증을 줄여 주거든.”

큼지막한 보퉁이 안에서 이런저런 약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자잘한 호의가 고마워 영목은 굳은 얼굴을 풀고 피식 웃었다.

“이 약들을 백사 님이 다 만드셨습니까? 연수산으로 유학 가신 그날부터 맨날 범산으로 울면서 되돌아오신다길래 의술엔 영 소질이 없으신가 하였는데.”

“에이… 맨날 울면서 뛰어오진 않았어.”

산군이 귀애하는 이무기가 수줍게 귓가를 긁적였다. 영목은 새삼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이렇게 순한 사람들, 이렇게 선의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으니 내가 영의정이나 우의정 같은 놈들을 이길 수가 없지.’

그는 스스로에게 혀를 차면서 이무기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잘 쓰겠습니다, 백사 님. 한데 지금 연수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시라면… 혹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응응. 해. 뭐든 해. 산군께서 우는 사람 소원은 되도록 들어주라고 하셨거든. 그래야 덕 쌓는 데에 도움이 된대.”

잘 울지도 않을뿐더러 남의 앞에서 울어 본 적은 더더욱 없던 영목이 머쓱하게 뺨을 문질렀다. 이무기는 뭐든 말하라는 듯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영목의 입만 쳐다보았다. 영목은 짧게 한숨지으며 어렵게 입을 뗐다.

“제 스승님께… 세경 마님께 전해 주세요. 제 제사의 답을 주실 때가 되었다고. 급하다고요.”

“그렇게만 전하면 돼?”

“네. 최대한 빨리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무기는 보따리를 뒤적여 몇 개의 약을 더 꺼내 놓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혼자 남은 영목은 나란히 한 줄로 늘어선 약을 매만지다가 물기를 털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꽤나 번듯해진 제 몰골에 쓴웃음을 지은 그는 우의정의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유. 몇 달이 지났는데 여기는 여전히 이 꼴인가?”

남가에서 강탈해 온 물건들이 어찌나 많은지, 우의정 집 앞마당은 아직도 정리가 다 되지 않아 난잡하고 어수선했다. 그 어수선함을 타박하며 영목이 태연히 걸어 들어오자 우의정 집 고용인들이 기절할 듯이 놀랐다.

“최… 최영목이다.”

“…살아 있었어?”

“뭐야아. 내가 죽기라도 바랐던 것처럼.”

어디 가서 비명횡사한 줄로만 알았던 영목이 신수 좋게 차려입고 나타나 느물대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강자영은 신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영목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영목아! 어디에 있다가 이제서야 오느냐!”

“아이고. 외증조부께서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제 것이 된 모든 것들을 홀로 좀 즐기겠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강자영이 반가워하는 듯도, 원망스러워하는 듯도 한 묘한 얼굴로 영목을 쳐다보았다. 영목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 보며 물었다.

“제게도 청나라 비단이 꽤나 잘 어울리지요?”

“…그래.”

“윤이 도령은 어찌 되었습니까?”

“네가 자백서를 받아 온 덕에 다른 건 다 잘 처리되고 있는데…….”

“그런데요?”

“한마디도 않는단다. 제 어미 닮아 독한 것.”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영목의 표정을 살피며 윤의 소식을 전했다.

“윤이 그 아이도 참 우습지 않니? 저가 제 손으로 서명을 다 하여 놓고 ‘네, 접니다.’ 한마디는 왜 안 하고 버틴다니? 온몸이 다 으스러져도 비명 한마디 안 뱉는다더라.”

“윤이 도령이 적잖이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지요.”

영목은 백사가 자신의 부탁을 제대로 전했기만을 바라면서 강자영의 손을 다정스레 포개 잡았다.

‘윤이 도령은 스승님이 구하러 올 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돼. 목숨만 붙어 있으면, 도령이 연수산으로 피신만 하면 뒷일은 내가 알아서 수습하면 된다.’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에 강자영이 당황하여 몸을 굳히자 영목은 강자영을 향해 홀릴 듯이 곱게 눈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저희는 단이 아씨에 대해 긴밀히 나누어야 할 말이 있지요?”

“…있고말고.”

“안채로 함께 걷겠습니다.”

강자영과 나란히 보폭을 맞추어 걷는 모든 발자국마다 영목의 한이 어렸다.

‘곧 스승님이 윤이 도령을 구해 주실 것이다. 윤이 도령이 연수산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만 확인하면 강씨고 김씨고 다 잡아 죽일 것이다.’

둘은 자영의 방까지 말 한마디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것을 보니 단이 아씨의 행방에 대한 긴밀한 대화는 나중을 기약해야 할 듯싶습니다.”

강자영은 미련 없이 돌아 나가려는 영목의 옷자락을 잡아 그를 제 곁에 앉혔다.

“어딜 가니.”

“아. 가지 말까요?”

넉살 좋게 대꾸한 영목이 싱글대며 강자영을 마주 보았다. 강자영의 눈길은 영목이 보란 듯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금색 증명 패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그 목패를 노려보며 물었다.

“영목아, 남윤이 걱정되지?”

“걱정할 게 무어 있나요. 대방 마님도 못 꺾은 그 친구 고집을 아버님이 꺾으실지, 조부님이 꺾으실지 궁금할 뿐이지요.”

“서방님이 그 애를 설득하러 가시었으니 무엇이든 답을 가져오실 게야. 넌 그때까지 잠자코 내 곁에 있으렴.”

강자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색 무복을 갖춰 입은 검귀들이 빼곡하게 방을 둘러쌌다. 훤히 열린 창 밖을 쳐다보며 영목이 휘파람을 불었다. 방 안에도, 창밖에도 온통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었다.

“외증조부님께서 윤이 도령 종자 놈을 미련 없이 해치우신 이유가 있었네요. 사냥개들이 이렇게 많으니 한 놈쯤 쓱싹해도 뭐. 그쵸?”

“아무리 많아도 너 하나 상대가 될까.”

“과찬이십니다.”

강자영은 대꾸도 없이 비단 주머니에서 동그란 환약 하나를 꺼내 영목에게 내밀었다.

“널 위해 준비한 거란다. 꼭꼭 씹으렴.”

“뭡니까?”

“앵속을 빚어 만든 환이다. 영목이 네가 이리 건강해진 것을 보니 그동안 탕약으로 먹였던 건 썩 효과가 없었나 봐.”

영목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환약을 입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대체 나한테 뭘 먹였길래 그렇게 늘어지나 궁금했는데 앵속이었어?’

강자영이 시종 일관되게 앵속을 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게 영의정 가문에서 몰래 벌이는 사업인 모양이었다.

‘무슨 재산으로 기백의 사병을 부리나 했더니……. 의문이 풀렸네.’

영목은 이용 가치 있는 정보에 쾌재를 부르며 강자영을 향해 싱긋 눈꼬리를 접었다.

“설마하니 제가 달려가서 윤이 도령을 빼돌리기라도 할까 봐요? 그게 염려되어서 이런 걸 먹이시는 겁니까?”

“응.”

“걱정도 팔자시네요. 윤이 도령을 꼬드겨서 자백서 받아 온 게 접니다, 저.”

어찌나 독하게 만든 환약인지, 영목은 벌써 어질어질한 시야에 눈을 꾹 감으면서 자신의 가슴팍을 탕탕 내리쳤다. 강자영이 작게 웃으면서 영목의 목을 쥐고 그의 맥을 가늠했다. 목을 쥐었던 가느다란 손이 뺨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영목이 네가 서방님과 이야기를 끝내고 한 짓이지. 남인혜를 빼돌리고, 남윤을 빼돌리고, 이 모든 소란이 남가를 음해하려는 짓이었다 둘러대려는 계획이었잖니.”

“세상에. 그리 소상히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할아버님께 네 계획을 고하고 잘 단속하시라 알려 드린 사람이 바로 나인걸.”

태연하게 실토한 그녀가 영목의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조부님께 네 여기를 깊이 찌르라 말씀드린 것도 나란다.”

“어유. 어쩐지. 되게 아프더라.”

강자영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영목아. 너는 실패했어. 너도, 인혜 언니도 실패했지.”

“…….”

“모두 망가지고 실패하고 더럽혀졌다. 이젠 남윤도 그리될 게야.”

영목은 강자영이 남가에 왜 그리 비틀린 집착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닫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제 고통보다 더 아프게. 제 실패보다 더 비참하게. 이거지? 미친.’

이런 것들에게 말려서 이 꼴이라. 나오느니 웃음뿐이었다.

“하여튼 마님… 아니, 어머님 취미도 참 괴팍하십니다.”

농담 같은 핀잔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강자영이 기분 좋게 깔깔거렸다.

“서방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고 정인 비슷한 것으로 귀여워한 아이의 마음 또한 다른 곳에 있으니, 내가 괴팍해지지 않을 수가 있나.”

“제 마음은 항상 한곳에 있는데요.”

“그렇겠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남가의 업둥이 계집에게.”

“잘못 찍으셨습니다. 저는 윤이 도령 좋아해요.”

“네가 정 그렇게 우긴다면야 그렇게 믿어 주고.”

은근히 속삭인 강자영이 서안의 서랍을 열었다. 영목이 방금 먹은 것과 똑같이 생긴 환약들이 서랍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영목아, 남윤은 사는 게 더 비참할 터이니 죽도록 두더라도… 물레방앗간에서 어디론가 끌려간 그 업둥이 계집은 살려야 하지 않겠니?”

“진짜 잘못 찍으셨다니까요. 단이 아씨가 아니라 윤이 도령 쪽입니다.”

“어느 쪽이든 네 목을 죌 괜찮은 수단이지.”

“그렇네요.”

영목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강자영을 마주 보고 웃었다.

“먹을 거지? 나를 안심시켜 줄 거지?”

“이깟 걸로 안심이 되신다면 얼마든지요.”

“역시 영목이 너밖에 없구나.”

강자영이 자애롭게 미소했다. 영목도 그녀의 웃음을 흉내 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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