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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63화 (63/157)

63화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누군가에게 몸이 만져져 여인임을 들키면 안 된다. 어떻게든, 얼마나 비굴하게든 목숨을 부지하여 윤을 구해야 한다.’

수백 수천 번을 입 속으로 중얼대면서 영목은 새카맣게 되었다가 새하얗게 질리며 점멸하는 시야와 정신을 다잡았다.

영목이 윤과 한 약속을 떠올리며 죽음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을 때, 윤의 종자였던 놈이 영목의 귓가에 제 입을 가져다 댔다.

“최영목. 내가 드디어 우리 형의 원수를 갚았다.”

“내가 원수진 놈이 네놈 형 하나일 것 같냐?”

다 죽어 가면서도 영목은 바람 새는 소리로 놈에게 빈정댔다. 놈이 코웃음을 치며 영목의 상처를 무릎으로 꾹 눌렀다.

“지난 대기근 때에 범산에서 네놈이 목을 꺾어 죽인 이 중 하나가 내 형이다. 쌀을 가져온다던 형을 도우러 갔다가 네놈이 우리 마을 장정들을 죄 잡아 죽이는 걸 내 숨어서 지켜보았지.”

“아이구, 그래쪄요? 형아 구하러 달려들 생각은 않고 쥐 새끼처럼 꼭꼭 숨어서 구경했단 게 자랑이다?”

영목이 비웃자 종자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래. 네놈에게 복수할 거라고 천 번, 만 번 맹세하면서 눈밭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직도 겨울이면 발끝이 욱신거려.”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서 선득한 희열이 느껴졌다. 영목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입에서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핏물만 한 움큼 터져 나왔다.

종자가 흥분 가득한 음성으로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그때엔 네 걸음이 인간이 아닌 듯이 빨라 따라잡지 못하였었지. 네가 계속 미친놈처럼 남가, 남가 중얼거리기에 혹시나 싶어 남가의 종놈 노릇을 했더니 널 만날 수 있었어.”

연신 핏물을 토한 영목은 자신의 지난날을 또 후회했다. 어린 윤에게 종자를 들이라 추천한 것이 바로 저였다.

‘내가 그딴 소리만 안 했더라도 저놈이 남가 담장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을 텐데. 젠장.’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는 영목을 쳐다보며 놈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뒤틀었다.

“참고 또 참으며 때를 기다렸는데, 결국 이렇게 복수할 기회가 생기는구나. 역시 하늘은 날 버리지 않으셨다!”

그 하늘은 내 하늘이 아닌가 보네.

영목은 비죽비죽 웃으면서 손발의 감각을 확인했다. 피를 너무 흘려서 턱이 덜덜 떨렸다. 놈은 영목의 목을 틀어쥐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남가 상단 금고가 어떻게 열리는지 실토해. 그러면 살려는 주겠다.”

“단이 아씨를 어디 숨겼는지 말해 주면 알려 줄게.”

뜻밖의 요구였는지 놈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 업둥이 계집애?”

“남가의 단이 아씨 말이다, 이 새끼야.”

“그래, 걔. 나는 온 가족 잃고 굶어 죽을 판인데 고 핏덩이는 남가의 애기씨로 귀애받는 걸 볼 때마다 어찌나 배알이 꼴리던지.”

“이제 고작 열서넛밖에 안 된 어린애한테 몹쓸 짓 한 놈 배알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어디 있는지나 말해.”

그는 숨넘어갈 듯 끊어 말하는 영목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면서 약 올리듯 히죽 웃었다.

“네놈이 범산에서 우리 형을 나뭇가지로 찔러 죽였을 때 내 나이도 열세 살이었는데. 재밌는 우연이네.”

“…….”

“금고 여는 법부터 말해.”

영목이 연수산 도깨비와 친분부터 쌓아야 한다는 소리를 하려던 순간, 노인이 영목의 몸 위로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둘이 무얼 그리 수군대나?”

“아, 그게, 일전에 말씀드렸던 남가 상단 금고 여는 법을― 끄윽……!”

잘난 듯이 떠들던 종자 놈이 영목의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림 같은 토사구팽이구만.’

허무하게 단명한 놈의 낯짝이 가물대는 영목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영목이 입술을 물고 킬킬댔다.

“영상 대감! 서신을 받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달려 들어온 한 떼의 사내들이 영목과 죽은 놈을 우르르 둘러쌌다. 노인은 당황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영목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이 아이가 바로 내 사위의 양자, 영목일세. 남윤을 설득하여 자백을 받아 낸 기특한 아이지.”

“아아. 이 친구가 한 일입니까?”

“그렇네. 큰일을 하고 오던 길이었건만, 남윤에게 충성하던 종자 놈의 칼에 찔렸어.”

“저런……. 얼른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달려들어 왔던 한 떼가 다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방 안에 영의정과 영목만 남았다.

“많이 고통스러울 텐데 잘 버티는구나. 네깟 놈이 내 손녀의 양자가 된다는 게 더없이 괘씸하여 아주 아프고 오래 앓을 곳으로 찔렀는데 말이야.”

주름 자글자글한 노인이 영목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배부른 호랑이 같은 음성에 자못 안타깝다는 얼굴이 정말 안 어울린다 싶어 영목은 또다시 키들댔다. 킬킬대는 영목을 재미난 것 보듯 구경하던 그가 턱을 괴고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뗐다.

“금방 처치할 터이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양자 따위야 죽여도 상관없지마는… 우리 자영이가 울고불고 빌어 목숨을 살려 둔 것이니 남은 여생은 자영이에게 감사하며 죽은 듯 살거라.”

그 말이 무슨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영목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만면에 미소를 걸고 영목을 내려다보던 영의정마저 놀라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죽은 듯이 살라니요. 이제부터 대차게 설쳐도 모자랄 판에.”

영목은 피 웅덩이 한가운데 놀란 얼굴로 나뒹구는 영감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끌어모아 품속에서 남가 상단 대방의 금색 증명 패를 꺼내 보였다.

“이 패가 제 손아귀에 있으니 남가 상단은 제 것이잖습니까?”

영의정이 탐욕 가득한 눈으로 금색 목패를 쳐다보았다. 다 죽어 가던 영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팔자 좋은 한량이 노리개 흔들듯이 그 패를 휘휘 흔들었다.

“김씨 가문에서 저를 양자로 들이셨으니 남가 상단은 김씨 가문에 속한 셈이로군요. 대감께서 제 양어머니의 조부님 되시니 강씨 가문에 속했다고 보아도 되겠구요.”

“…….”

“이거 참. 저와 김씨 가문과 강씨 가문 모두에게 경사로운 일 아닙니까?”

남가의 재산이 탐난다면 이 이상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용케도 알아들은 영의정이 고개를 한 번 주억였다.

“외증조부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시겠지요?”

“…그렇다마다.”

쭈글쭈글한 노인에게서 재차 확인을 받은 영목은 다친 사람 같지 않은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의원을 불러 준다니까 어딜 가느냐!”

“남가 상단으로 갑니다. 제 것이 된 곳으로 가서 양껏 이 기쁨을 누릴 생각을 하니 아픔이 싹 가십니다요.”

“움직일 수 있는 상처가 아닐 터인데…….”

“저 종자 놈이 너무 살살 찔렀나 보지요.”

영목은 기막혀하는 영의정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면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달려오던 의원이 피 칠갑을 하고 절룩대는 영목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자네가… 환자인가?”

“아, 의원 나리십니까? 별일 아니니 약만 주십쇼, 약만.”

별일이 아닌 게 아니라며 버티는 의원으로부터 강탈하듯 약 보따리만 받아 든 채 영목은 휘적휘적 남가 상단을 향해 걸었다.

‘젠장맞을. 어떻게 꼬여도 이따위로 꼬였지.’

끝없이 욕을 퍼부으며 걸음을 옮긴 영목은 거진 폐허가 된 남가 상단의 마당에 홀로 서서 깊은 한숨을 뱉었다. 숨소리 하나 없는 적막한 사방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통도 울음도 이를 악물어 참아 낸 그는 증명 패를 꾹 쥐고 금고로 다가갔다.

“열려라. 내가 들어갈 만큼만.”

혹시라도 누가 따라 들어올까 겁이 난 영목이 자신마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게 명령을 속삭였다. 도깨비가 만든 문은 용케도 영목의 음성을 알아듣고 빨아들이듯 그의 몸을 안으로 받아들였다.

빛 하나 들지 않는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영목은 약 보따리를 뒤집어엎었다. 그러고는 무슨 약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되는대로 옆구리에 갖다 얹었다. 치료 같지도 않은 치료를 하는 내내 작은 소음에도 흠칫거리며 날을 세우던 영목은 아무도 제게 닿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목은 의외로 개운하게 눈을 떴다. 이렇게 피를 흘리고 이렇게 큰 상처를 입었으니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싶던 염려와 달리 머리도 맑고 몸도 가벼웠다.

‘역시 강자영이 아침저녁으로 먹이던 그 탕약이 문제였어.’

물론 옆구리의 상처도 보통이 아닌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창고에 오래 처박혀 있다 보니 어둠에도 슬슬 눈이 익었다.

“자아. 이제 사치 좀 해 볼꺼나.”

주변을 두리번대던 영목은 척 봐도 보통 옷감이 아닌 듯한 명주 한 필을 잡아 들고 쭉쭉 찢기 시작했다. 이어 상처 위에 약초를 짓이기고, 그 위를 명주로 둘러 묶었다.

“치료 끝냈으니 이젠 몸보신 차례지?”

밖에서 볼 때보다 더 넓은 창고 안에는 영목이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그는 말캉하면서 쫀득한 반건시를 볼이 터지도록 입 안에 욱여넣었다. 금분을 발라 말린 육포는 턱이 아프도록 먹고 또 먹었다. 벽 한편에 놓인 거대한 약장에서 몸에 매우 좋을 것 같은 환약도 한가득 꺼내 씹었다.

“내가 멍청하게 굴어서 일을 거진 다 말아먹었으니까… 더 심하게 말아먹기 전에 몸 챙기고, 정신도 챙겨야 해. 뭐든 주워 먹고 말짱하게 나아야 해.”

영목은 광기 어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들을 사람 없는 말을 웅얼대면서 창고를 뒤지는 그는 영락없는 미치광이였다.

몸에 좋을 것 같은 것들을 양껏 먹고 마시고 상처에 바르는 동안 영목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잘 챙겨 먹은 덕인지 상처에 질척이던 피고름이 말끔히 멎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이제는 쿨럭쿨럭 기침을 해도 더 이상 피가래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제야 영목은 살면서 만져 본 옷감 중에서 제일 고운 옷감으로 만든 도포 한 벌과 흑립을 챙겨 들고 창고 구석의 비밀 문을 밀었다.

‘내가 창고를 엉망으로 어지럽힌 걸 아시면 대방 마님이 엄청 크게 웃으시겠지.’

그는 윤과, 남인혜와, 단의 얼굴을 내내 생각하며 어둑한 통로를 걷고 또 걸어 범산 소나무 밑의 문으로 나왔다.

‘더 이상 춥지 않네.’

붓꽃이 한창인 것을 보니 아마도 5월 말 정도일까. 높은 하늘에 반달만 오롯할 뿐, 짐승마저 모두 잠든 깊은 밤이었다. 영목은 적막만 가득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심경으로 반쪽짜리 달을 쳐다보던 영목은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을 향해 좁은 오솔길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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