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네가 윤이를 설득하여 여기에 지장만 받아 온다면, 인혜는 그 즉시 빼 올 수 있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윤이는 튼튼한 장정이잖니. 같은 고초를 겪더라도 인혜보다는 그 애가 더 잘 버틸 거야. 하니 인혜를 먼저 빼내어 살려야지. 아니 그러냐?”
김욱진은 조금 더 간절한 얼굴로 영목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물론 인혜를 구한 뒤에 윤이 그 아이도 빼내 줄 것이다. 자백서 자체가 거짓이라 고할 거야. 이 모든 일이 남가의 재산을 노리는 패거리의 협잡이었다고 말이다. 윤이의 자백서 하나로 남가 전체를 살릴 수 있어.”
“…….”
“영목아. 나는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
영목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욱진도 그를 따라 느리게 도리질 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너희, 돈의문 의원과 안면이 있다지? 이것을 네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여라.”
영목의 눈이 종이를 훑었다. 영감이 약재의 목록을 정리할 때에, 남가 상단에 청구할 영수증을 적을 때에 익히 보았던 영감의 필체였다. 익숙한 필체로 믿어지지 않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남윤의 손에 난 상처가 지나치게 크고 깊은바, 한참 전부터 글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을 쥐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인지라 수결도 자백서도 그의 것이라 보기 어려움]
“보아라. 그 영감이 직접 써 준 것이다. 윤이가 애초부터 자백서를 작성할 수 없었다고 똑똑히 써 있지 않니?”
“저는… 저는 이게 무슨 일인지, 무얼 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넌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자백서는 남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게야. 영목이 네가 남가를 구하는 셈이지.”
김욱진이 표정을 굳히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영목의 눈이 그의 검지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아마도 강자영이 있는 안채를 가리키는 듯했다.
“이 모든 일은 전부 내 내자가 꾸민 일이다. 그이는 평생 인혜를 원망하며 남가를 짓밟길 바랐거든.”
“…….”
“나는 인혜를 살리고 싶다. 가문 어르신들이 인혜를 쫓아낼 때 내가 보호해 주지 못한 것이 평생 나의 한이야. 나는 그 사람을 두 번 버릴 수 없어. 영목이 너도 네 친우를 살리고 싶지 않니?”
두 번 버릴 수 없다는 그의 말이 영목의 마음을 움직였다. 앵속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 흐릿한 영목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김욱진은 품에서 정갈하게 접힌 서신을 하나 꺼내 영목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너만 믿는다, 영목아.”
김욱진이 영목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창고 문을 걷어찼다. 그들이 함께 문을 나서자 창고 밖을 지키고 있던 검귀들이 움찔대며 앞을 막아섰다.
“나으리,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비켜라, 이놈들! 내가 이 집의 주인이고 이 아이는 내 양자가 될 아이다!”
눈빛을 주고받던 검귀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텄다.
김욱진은 곧장 영목을 사랑채로 데려가 씻을 물과 갈아입을 옷을 내어 주었다. 여러 날 갇혀 있는 동안 몸이 많이 허해졌을 테니 꼭 챙겨 먹으라며 탕약 한 사발까지 놓아 주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으면서야 영목은 일이 생각보다 더 엉망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갇힌 것은 겨울의 끝자락이었는데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는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려 하고 있었다.
‘앵속에 대체 얼마나 절여져 있었던 거야…….’
몽롱하고 나른하고 몸이 축축 늘어지는 이 모든 증상이 말로만 들었던 앵속의 부작용과 일치했다.
영목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철썩대며 제 뺨을 쳤다. 뺨이 후끈대자 뒤늦게 옆구리의 상처에 생각이 닿았다. 동여맸던 새끼줄을 풀어내자 흉터만 남기고 거의 다 아물어 가는 흔적이 그를 기다렸다. 영목은 방 안에 놓인 화로에 새끼줄을 태우며 입술을 씹었다.
‘일주일이 지났는지 열흘이 지났는지 감이 없다. 내가 앵속에 당해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사태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는지 짐작도 되지 않아.’
여전히 앵속의 기운이 남아 있어 몸이 무겁고 머리가 멍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영목에겐 나직하게 속삭이던 김욱진의 음성만이 그나마 믿을 만한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일단 윤이 도령이 어쩌고 있는지부터 확인하자.’
영목은 김욱진이 건네준 자백서를 품고 감영의 높다란 담장을 뛰어넘었다. 몸이 얼마나 허해졌는지, 고작 담치기 정도로도 호흡이 흐트러졌다.
곳곳에 포진한 눈을 피해 옥사로 숨어든 영목은 윤의 처참한 몰골에 말을 잃었다.
“자네… 자네, 살아 있는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한 영목이 몇 번을 더 거듭 불러 대고 나서야 더러운 옥사 구석에 거진 시체처럼 구겨져 있던 윤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최 형이십니까.”
“그래, 날세!”
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피딱지가 덕지덕지 엉킨 입술 사이에서 가는 숨이 터졌다. 그가 가까스로 팔꿈치에 힘을 주고 기다시피 영목에게 다가왔다.
“최 형,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최 형이 정말―”
“아니. 일단 내 말부터 듣게.”
영목은 윤의 말을 끊고 김욱진이 건네준 자백서를 펼쳐 보였다.
“여기 서명해야 해.”
“…….”
윤의 눈이 종이 위의 글자와 영목의 얼굴을 오갔다.
“시간이 없어. 내 말 듣고 있나? 응?”
초조해진 영목이 그를 몇 번이나 닦달하자 윤이 쿨럭거리는 기침과 함께 주춤주춤 멀어졌다.
“이름을 쓰라니까 어딜 가?”
“하나 여쭙겠습니다. 최 형께서 김욱진의 양자가 되셨다 들었습니다. 참말입니까?”
“…맞네. 이제 곧 정식으로 그 집 족보에 올라갈 거야.”
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물레방앗간으로 저를 데려가신 것부터가 양자가 되려는 최 형의 계획이라 들었습니다. 그 또한 참말입니까?”
“미친. 누가 그런 소릴 하나?”
“향화각의 기녀가요. 어머님께서 보살피시던, 어머님께 은혜를 입은 여인이지요.”
영목은 자신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쓰게 웃었다. 영목이 웃자 윤의 표정이 더 차가워졌다.
“그날, 최 형께서 돈의문으로 가라 하시어 그리로 걷고 있을 때에 향화각의 기녀가 급히 달려와 저를 붙잡았습니다.”
“하……. 뭐라던가?”
“최 형께서 김가의 양자로 들어가기 위해 남가를 팔아넘겼다고. 제 목숨으로 어머니를 협박해 어머님의 대방 증명 패를 빼앗았다고.”
영목은 고개를 떨구었다가 긴 한숨을 토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디라고 특정 지을 수 없는 모든 곳이 아팠다. 그 기녀에게 된통 당했다는 패배감보다도 저를 쳐다보는 윤의 눈길이, 윤이 저를 의심한다는 사실이 영목을 고통스럽게 했다.
“최 형께서 남가 상단 대방의 패를 자랑하며 떠벌렸다더군요. 기방을 드나드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그러면서 어서 집으로 가 어머니를 모시고 도망하라 울며 매달렸습니다.”
“자네는… 내가 아니라 그 기녀의 말을 믿나? 그래서 돈의문이 아니라 집으로 갔어?”
“최 형을 믿고 싶어서 집으로 갔습니다! 어머님이 무사하신지 확인하고, 대방의 패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영목이 비틀거리며 옥사의 두툼한 나무 문살에 기대 주저앉았다. 고개 숙인 영목의 목덜미에 원망 서린 윤의 시선이 매섭게 내리꽂혔다.
“세상 그 누구보다 최 형을 믿었는데…….”
윤이 마른 음성으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되었네요. 나는 역모를 꿈꾸던 대역 죄인이 되어 이 안에 이 꼴로, 최 형은 제게 자백서를 강요하시며 문 너머에.”
영목은 이것이 다 저를 위해 하는 짓임을 몰라주는 윤이 야속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 봤자 믿을 것 같지도 않으니 긴말 않겠네. 여기 수결이나 해.”
입가에 삐뚠 웃음을 건 영목이 자백서를 흔들자 윤이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다들 최 형을 탓하라 하였습니다. 내 모든 것을 탐내어 나를 현혹하였다면서요. 절대 그럴 리 없다 믿었건만……. 하아.”
“자네, 지금 아프고 힘든 나머지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런 말에 휘둘리는 거야.”
“제가요? 앵속 냄새를 예까지 풍기시는 최 형이 아니라?”
“…….”
“김가의 문양을 자수한 비단옷을 걸치시고 온몸에서 앵속 냄새를 풍기며 보름 만에 찾아와 자백서를 강요하시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보름이라는 말에 영목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영목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마를 짚고 옆구리를 더듬자 윤의 목울대가 크게 울컥였다.
“변명조차 아니 하십니까?”
“내가 뭐라 말한들 믿지도 않을 거면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서로 더 나눌 말이 없지 싶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윤이 벽을 보며 돌아앉았다. 옥졸들의 발소리가 들려와 영목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은 가 보겠네. 내일 다시 들를 터이니 서로 머리를 좀 식히고 다시 얘기하세.”
착잡한 심정으로 발을 돌리면서도 영목은 마음 한구석에 믿음이 있었다.
‘찬찬히 이야기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 거야.’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영목의 생각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윤은 영목을 볼 때마다 점점 더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고문이 날로 모질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처참해지는 윤의 몰골도 영목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3월이 다 지나갈 무렵부터는 김욱진과도 도통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뒤를 봐주기로 약속한 주제에 사랑채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면 어쩌자는 거야!’
김욱진의 종자는 자백서를 받아 와야 김욱진을 만날 수 있다는 말만 반복하며 영목을 돌려보냈다. 속이 뒤집히다 못해 하루에 대여섯 번씩 구역질을 하면서도 영목은 매일 윤이 갇혀 있는 전옥서(典獄署)를 찾아갔다.
“내 말 좀 믿어 주게. 내가 언제 자네에게 안 좋은 일 시키던가?”
윤은 영목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한 곳 하나 없으면서도 눈빛만은 날로 형형해졌다.
“자백서는 미리 다 작성해 두었어. 여기 이 통문(通文)의 내용이 모두 맞는다고, 자네 이름 세 글자만 쓰면 되네.”
“…….”
“돈의문 의원 영감과도 이야기가 끝났대도? 자네가 글을 쓰기는커녕 붓 잡는 것도 불가한 상태라는 소견서가 이미 작성되어 있어.”
영목은 그가 보기 편하도록 종이를 쫙 펼쳐 들었다.
[하나. 무기와 군량은 남가 상단의 창고에 비축하기로 함
둘. 천주교도들은 사대문으로 입성하여 남가의 식객으로 기거함
셋. 이들의 훈련을 김서보가 주관함
넷. 지방의 동지들이 양성하여 올려 보낸 군사는 다섯 가문이 고르게 나누어 솔거 노비로 고용함
다섯. 훈련에 성실히 참여하여 거사에 힘을 실은 군사에게는 남윤이 달마다 백 냥씩을 지급함
여섯. 이국환과 민용래가 제주에서 공수한 말이 도착하면 송상덕을 선봉으로 진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