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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60화 (60/157)

60화

“손님방이 꽤나 특이합니다?”

“서방님이 여기에 재우라 하셨단다.”

강자영은 창고 문턱도 넘지 않고 코와 입을 막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목이 네가 여기 일주일만 얌전히 갇혀 있으면 목숨도 살려 주고 양자로도 입적시켜 주시겠대.”

“누울 자리와 먹을 것만 주시면 일주일이 문제겠습니까? 한 달도 빈둥대지요.”

“혹여 네가 기운 좋게 날뛰면 안 되니 사흘에 한 번, 물 정도는 넣어 줄 거야.”

김씨 집안 인심이 이 모양이니 뒤에서 그렇게 욕을 처먹는 거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다. 영목은 입을 꾹 닫고 씩 웃으며 지푸라기조차 없는 땅바닥에 척 하니 드러누웠다. 겨울 한기가 몸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영목은 아무렇지 않은 척 기지개를 쭉 켰다.

“열흘 뒤에 보자꾸나.”

일주일이라 해 놓고 금방 사흘을 더 갖다 붙인 자영이 새털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사라졌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무섭게 복면 쓴 놈이 영목의 환도를 꺼내 들었다.

“갖다 대. 마님께서 시키신 일이다. 얌전히 옆구리 내주면 그 쬐끄만 계집애 목숨은 살려 주신대.”

“이 집 식구들 취향 참 이상해.”

영목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환도 칼날에 옆구리를 들이밀었다. 후드득 피가 떨어지자 환도를 쥐고 있던 놈이 더 놀라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영목은 그를 비웃으며 제 옆구리를 가리켰다.

“빨리 안 치우면 내 칼, 내가 다시 가져간다?”

“…미친놈.”

그가 영목을 떠밀고 창고 문을 걸었다. 영목은 자물통 덜컥이는 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온 천장이며 벽에 주렁주렁 걸린 새끼줄을 끌어 내려 바닥에 깔았다.

‘꼼짝없이 당하려니 미치겠구만.’

아무리 영목이 평범한 인간과는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라 해도, 때는 동장군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늦겨울.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상처 입은 몸으로 버틸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새끼줄 더미 위에 몸을 웅크린 영목은 천장 구석에서 뿌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틈 하나를 발견했다.

‘저기로 어떻게 머리통이랑 어깨만 잘 빼내면… 밖에 있는 놈들을 따돌리고 나갈 수 있겠어.’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옆구리를 대충 지혈한 영목은 엉망으로 엉킨 새끼줄을 쭉쭉 풀어 올가미를 만들었다.

‘천장이 드럽게 높아서 도저히 맨몸으로 뛰어 올라갈 수는 없고… 이 올가미를 들보에 걸치면 구멍까지 기어 올라갈 수 있겠다.’

영목이 대충 완성한 올가미를 던지려던 순간, 그가 탈출하기 위해 노리고 있던 구멍에서 자그마한 갈색 덩어리들이 뿌연 김을 뿜으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앵속(罌粟)까지 던지고 지랄이야!’

앵속은 양귀비 열매를 짜서 만든 덩어리였다. 극소량을 조심히 잘 쓰면 진통을 줄여 주는 약재가 되지만 조금만 양이 늘어나도 환각이 보이고, 복용량이 엄지손톱보다 커지면 배 속을 다 뒤집을 정도의 극약이 되었다. 덩어리째 삼키면 속이 헐고 연기를 들이마시면 정신이 무너진다는 점에서 조금 다를 뿐, 씹어 먹으나 코로 연기를 들이켜나 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영목이 최 역관의 탕약에 섞어 먹였던 몹쓸 것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젠장. 인과응보라 치고 당하기엔 너무 억울한데.’

급히 코와 입을 가렸는데도 구역감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쉬지 않고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작은 덩어리들과 그 덩어리들이 뿜는 지독한 연기에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의식을 잃으면 안 돼. 누가 내 몸을 살피면, 여인이라는 게 들통나면 안 돼.’

영목은 급히 손끝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헤집었다. 눈물 나는 격통 덕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뭔 놈의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하냐!’

터지는 욕설을 겨우 참은 그는 비틀대면서 새끼줄로 허리를 칭칭 감아 상처를 덮었다.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로 더러운 줄이었으나 상처가 덧날 것 따위를 염려할 계제가 아니었다.

한참이나 더 쏟아져 내리던 앵속의 비는 영목이 비틀대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에야 겨우 멎었다. 영목은 바닥을 구르는 앵속 덩어리를 발로 슥슥 쓸어 한데 모으고 남은 새끼줄을 그 위로 죄다 덮어 버렸다.

창고 안을 가득 메웠던 앵속의 연기가 잦아들수록 약 기운으로 영목의 시야가 흐려졌다.

‘이러다간 윤이 도령이랑 단이 구하러 가기 전에 내가 먼저 뒤지겠구만.’

영목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어 흐려지려는 의식을 다잡았다. 그리고 앵속 더미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구석에 몸을 기댄 뒤 벽에 얼굴을 묻었다. 텁텁한 흙이 부슬부슬 부스러져 얼굴로 쏟아졌지만 상관없었다. 앵속의 연기에 비하면 흙먼지 냄새 쪽이 몇 배나 상쾌했다.

앵속 냄새, 메주 냄새, 흙냄새, 피비린내 따위만 가득한 곳에서 영목은 윤의 접선에서 풍기는 향기를 떠올리려 애썼다. 빛 한 점 없이 가물거리는 시야에 윤과 단의 얼굴이 물결처럼 일렁이다 먼지처럼 부스러져 허공을 부유했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내가 정신을 차리고 구하러 가야 하는데.’

아지랑이처럼 너울대던 영목의 시야와 의식이 겨우 맑아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앵속이 날아들었던 구멍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황금색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가 들어와 몸을 뒤지지 않는지에만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영목은 낭패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바로 그날이야, 아니면 며칠이 지난 거야? 앵속 때문에 시간마저 흐릿해.’

옆구리의 상처가 곪는 모양인지 근지러우면서도 쿡쿡 쑤시는 뭉근한 통증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몸을 일으킨 영목이 죄 없는 햇빛만 노려보고 있던 순간, 문이 열렸다.

“네가 고생하는구나.”

몸이 두껍고 키가 매우 큰 사내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찡그린 얼굴로 눈만 들어 쳐다보는 영목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숭늉 한 대접이었다.

‘먹고 죽는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로 사내의 얼굴 한 번, 숭늉 대접을 한 번 쳐다보던 영목은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숭늉을 입가로 가져갔다. 사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웃는 입매가, 왼쪽 뺨에 깊이 패는 보조개가 윤과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영목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너를 양자로 들이는 걸 반대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뜻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내겐 네가 필요해.”

영목은 커다란 대접으로 삐죽대는 입을 감췄다.

‘필요하다면서 사람을 이따위로 굴리나?’

양자가 되는 조건으로 이딴 방에 일주일인지 열흘인지 갇혀 있으라 명령하는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었다.

‘부창부수라더니 옆구리에 칼집까지 넣은 강자영도 만만찮게 정상이 아니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대거리할 기운조차 없어 영목은 말없이 숭늉만 조심스레 들이켰다.

“네가 우리 윤이와 아주 친하게 지낸다지? 그래서인가… 나는 너도 꼭 내 아들 같구나.”

들으면 들을수록 김욱진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마저 윤과 닮은 것 같았다. 영목은 전신에 닭살이 돋는 이상한 기분에 몸서리치며 숭늉 사발로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영목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사내는 정말로 제 친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영목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네가 나를 좀 도와주겠니?”

최대한 하찮고 무력하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영목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얗게 마른 입술에서 툭, 하고 피가 터졌지만 영목은 개의치 않고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으리, 저는 지긋지긋한 중인 신세 벗어나고 싶어서 탈상하자마자 마님께 양자 입적을 시켜 달라 조른 놈입니다. 뭐든 그저 명령만 하십시오.”

그는 말없이 영목을 쳐다보기만 했다.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 낼 수 없는, 한없이 평온한 얼굴로 영목의 눈을 응시하던 그는 아주 한참이 지나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새하얀 무명 손수건을 꺼내 영목의 입술에 대어 주며 입을 뗐다.

“네가 여기 갇힌 그날… 내 안사람네 가문과 내 아버지가 움직이셨다. 남가의 모든 사람들이 죄다 추포되었어.”

윤이 도령도요? 하는 물음이 영목의 입가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참은 영목은 피 얼룩이 진 무명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숨을 삼켰다. 김욱진은 퍽 다정스레 영목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깊이 한숨을 지었다.

“나는 인혜 하나라도 빼내기 위해 평양에서 한성으로 달려왔다. 험한 문초를 당할 게 뻔해서, 인혜가 그런 일을 견딜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빼내려 했건만…….”

그가 말을 끊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영목은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얼굴을 그제야 찬찬히 뜯어보았다. 뿌연 먼지가 가득한 어두운 골방에서 보아도 헌헌장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미남이었다. 동그란 눈매는 선량해 보였고, 진한 눈썹은 믿음직해 보였다. 곧게 뻗은 코와 신중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고르는 입술에는 자꾸 윤의 얼굴이 겹쳐졌다.

영목이 살면서 보아 온 그 누구보다 진중하고 선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울 것 같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인혜는 내 얼굴은 보려고도 않더라. 묻는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아. 아무리 내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김씨 가문의 사람이라도 인혜를 멋대로 데리고 나올 수는 없는데… 추운 날씨에 모진 고초를 겪으며 큰일이 나진 않을지 매일, 매 시각 걱정스럽다.”

“제가 무엇을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그가 남인혜를 빼내기를 바란다면, 영목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욱진이 눈에 보이는 것만큼 좋은 놈인지, 아니면 남인혜가 말한 것처럼 나쁜 놈인지 판단하기 이전의 문제였다.

‘대방 마님을 제대로 빼내려면 약을 좀 먹어야겠어. 여기로 끌려오며 여기저기 몸이 상한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면서 진통제를 달라 해야겠다.’

영목은 안개가 낀 듯 아직도 멍한 머리와 욱신거리는 옆구리에 한숨지으며 김욱진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에서는 영목이 상상도 못 한 요구가 흘러나왔다.

“네가 가서 윤이 그 아이에게서 자백서를 받아 다오.”

“…예?”

“천주학을 믿고, 그 무리들과 함께 어울렸으나, 남가의 다른 이들은 무관하다는 자백서다.”

생각지도 못한 말들 앞에서 영목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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