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영목은 윤의 모습이 새벽안개 사이로 스며들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서야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거지 같은 물레방앗간인 줄 알았는데… 장정이 열이나 올라가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고작인 걸 보면 꽤나 야무지게 지은 모양이야.”
영목의 말을 신호 삼아 한 떼의 사내들이 물레방앗간 지붕에서 일제히 뛰어내렸다. 대충 못질해 만든 판자벽의 틈새로 괴괴한 칼날들이 번뜩였다.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물레방앗간의 앞문이 열렸다. 칠흑의 무복에 복면까지 걸치고 문을 열어젖힌 사내 뒤로 덩치 좋은 놈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 * *
‘어림잡아 스무 명 정도인가.’
영목은 상대의 머릿수를 헤아리며 환도를 비스듬히 세워 올렸다. 새카만 검날이 푸릇하게 밝아 오는 새벽빛을 빨아들이며 묘한 암청색을 반사했다. 복면한 놈들이 영목의 칼을 보며 탐욕스러운 눈빛을 빛냈다.
“최영목 네놈 병신 만들고 그 칼은 내가 써야겠다.”
영목은 자랑하듯 칼날을 느긋하게 휘두르면서 우쭐댔다.
“네깟 놈들 눈에도 멋있나 보다? 보다시피 사냥개 배때지 쑤셔 저승 보내기엔 너무 귀한 칼이니까 감사히 여기고 모가지 대.”
“저런. 어린 아씨가 듣고 계신데 말조심해야지.”
문을 열었던 놈이 비웃음 다분한 음성으로 느릿하게 대꾸하며 한 발짝 비켜섰다. 그의 뒤, 입이 틀어 막힌 단과 유모가 굵은 밧줄로 칭칭 묶여 있었다.
“읍! 으으읍!!”
얼굴에 온통 눈물 자국인 단이 안간힘을 쓰며 어깨를 흔들었다. 영목이 미간을 깊이 구겼다.
“…어린애와 노파에게 손대면 개새끼 미만인데.”
“손대려고 댄 게 아니다. 워낙에 호기심 많은 아씨라 제 오라비가 처녀 귀신 잡는 걸 보고 싶었던 모양이더라고?”
“…….”
“뒷문에서 얼쩡대기에 우리 일하는 데 걸리적거려서 잠깐 묶어 두었을 뿐이다.”
옆으로 물러난 놈이 귀엽다는 듯이 단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면서 물레방앗간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밖에 서 있던 한 떼의 사내들도 그의 뒤를 따라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맨 앞에 선 놈이 영목의 칼을 가리켰다.
“상황 파악했으면 이제 그 귀한 칼 내려놔야지?”
“미쳤냐?”
“흠.”
놈이 짧게 콧소리를 내자마자 뒤따라 들어온 놈이 유모의 목을 그었다. 유모의 곁에 있던 단은 쏟아지는 선혈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단은 입을 틀어 막힌 채 비명을 질러 대다 이내 제풀에 축 늘어졌다.
놈이 이번에는 의식 잃은 단의 목에 칼날을 댔다. 가느다란 단의 목에 기다란 생채기가 나고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리는데도 단은 눈을 뜨지 못했다. 영목이 빠드득 이를 갈자 놈이 킬킬 웃었다.
“어때. 아직도 귀한 칼 내려놓을 생각이 없나?”
영목이 바닥에 칼을 내던졌다. 놈이 눈으로 땅을 가리켰다.
“꿇어.”
영목은 입술을 깨물며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수십 개의 칼끝이 영목의 목을 겨누었다. 영목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면서 단의 안위를 살폈다.
그때였다. 사내놈들의 퀴퀴한 땀내 속에서 문득 계화와 사향의 향기가 풍겨 왔다. 익숙한 향. 강자영이 즐겨 쓰는 향낭의 향기였다. 영목은 침착하게 표정을 정돈하고 한껏 미소를 지었다.
“귀한 댁 마님께서 다니시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하여튼, 영목이 넌 참…….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말도 예쁘장하게 한다니까.”
강자영이 기분 좋게 맑은 웃음을 흘리며 손짓을 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복면을 쓴 검귀들이 일제히 길을 텄다. 사각사각 비단 쓸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강자영이 영목의 머리칼을 한 줌 쥐어 들어 올렸다.
“영목아, 향화각의 기녀 아이가 네게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더구나.”
영목의 입꼬리가 비뚤게 실룩였다.
‘숙제를 풀어야 정보를 내어 주겠다던 그 기녀가 강자영의 세작이었나……. 그럼 대방 마님도 줄곧 속고 계셨던 건가.’
강자영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 계집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네가 이해하렴. 그 기녀가 자식처럼 키운 동생이 하나 있잖니? 이제 여덟 살이라던가……. 하여튼 새파랗게 어린 것이 우리 조부님 댁 패물을 훔치다 걸렸거든.”
영목은 이제야 이 함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영의정 댁 패물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운 거야. 보나마나 아이의 손목을 자른다느니 하며 향화각의 그 일패 기생을 협박한 거겠지.’
방금 단을 살리기 위해 검을 내던진 영목으로서는 기녀를 탓할 수가 없었다. 가진 것 없이 절박하게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이다지도 불리했다.
‘대방 마님의 세작들을 이따위로 구워삶고 나를 여기 묶어 두었다면… 아마 지금쯤 의금부가 남가를 발칵 뒤집고 있겠군.’
영목은 제발 윤이 무사히 돈의문 쪽으로 피난하였기를 기도하면서 태연한 척 강자영과 마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포시 기울이며 기절한 단의 뺨을 콕 찔렀다.
“이 애가 제 오라비에게 착 붙어 다니며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군다지? 몸이 약해 오냐오냐 키웠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야.”
말캉한 떡을 찔러 보는 것처럼 검지 끝으로 단의 뺨을 쿡쿡 눌러 대던 자영이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영목아, 이 애에게 제대로 예의를 가르쳐 준다는 이가 있어 그 댁에 보내려 하는데… 괜찮겠니?”
“나 참. 그걸 왜 제게 물으십니까.”
자영의 눈이 영목을 뚫어져라 살폈다. 먹잇감의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는 뱀 같은 눈이었다. 영목은 기가 차다는 듯이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장난스레 입술을 삐죽이자 강자영이 사르르 눈을 접었다.
“아슬아슬하게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어린 아해니 봐 달라는 둥 하면서 허튼소리를 하면 지체 없이 목을 그으라고 명령했거든.”
“어유. 고운 입으로 어찌 그런 무서운 소릴 하십니까.”
영목이 과장스럽게 겁먹은 척을 하며 팔뚝을 쓸어내렸다.
사실 복면 쓴 놈들의 검을 빼앗고 이놈들을 다 베어 죽이는 것쯤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단의 목숨 하나만 포기한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영목은 단을 두 번 버릴 수는 없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대체 강자영이 단을 어디로 팔아넘기려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은 단의 목숨만이라도 건져야 했다.
‘단이 살아만 있으면 된다. 조선 팔도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내면 돼. 복수도 그때 하면 된다.’
계산을 마친 영목은 반듯하게 꿇었던 무릎을 두드리며 에구에구 엄살을 피웠다. 하찮은 것의 재롱을 보듯 그를 내려다보던 강자영이 손을 까딱여 검귀들에게 명령했다.
“이 계집애를 그 집으로 데려가라.”
단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놈이 의식 잃은 단을 어깨에 얹고 물레방앗간 밖으로 나갔다. 강자영은 턱으로 영목에게 일어나라 명했다.
“이제 우리도 가자꾸나.”
“아이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너스레를 떨며 영목이 몸을 일으켰다. 영목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빈틈없이 목을 겨누고 있던 수십 개의 칼끝이 영목의 허리며 등을 에워싸고 함께 움직였다.
“혹여 이놈들과 싸워 볼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그만두어라. 남단인지 뭔지 하는 그 애는 살려야지?”
영목이 코웃음을 쳤다.
“하. 조용히 기별 주시면 구렁이 담 넘듯 담장 넘어 뵈러 갔을 터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거치십니다.”
“네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
“뭔 걱정을 이리 공들여 하신답니까?”
“나는 일평생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 아니더냐? 오만 것이 다 불안하여서 말이지.”
앞서 걷던 강자영이 자못 수줍은 듯이 어깨 너머로 영목을 돌아보았다.
“나는 항시 수많은 불안에 휩싸여 있단다. 영목이 네가 날 이용한 거면 어쩌나. 역적 집안과 한패라면 어쩌나.”
“에이. 그게 무슨 무서운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너는 네가 항상 말했던 것처럼 그저 남가 상단을 차지하고 싶을 뿐이지? 나는 널 믿고 널 김씨 집안의 양자로 들여도 되는 거겠지?”
물론이라 답하려던 영목은 아주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의 방향을 바꾸었다.
“결정은 오롯이 마님의 몫입니다. 저를 받아 주실지, 내치실지. 저는 선택권이 없지요.”
이쪽이 정답이었던 듯, 자영은 발긋하게 뺨을 붉히면서 그제야 온전히 몸을 돌려 제대로 영목을 마주 보았다.
“너는 항상 내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하는구나.”
“그 능력으로 입때껏 살아남았습죠.”
자영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영목도 따라서 눈꼬리를 휘었다.
“맹랑한 것아. 네가 기뻐할 소식이 있단다.”
“예에. 기뻐할 준비 되었습니다.”
단을 떠메고 사라진 놈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영목이 한껏 귀로 기운을 집중하면서 적당히 대꾸하자 자영이 입을 가렸던 손으로 영목의 뺨을 감쌌다. 영목과 자영의 시선이 엉켰다. 자영은 순수한 환희와 약간의 비참함이 어린 눈을 이글대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오늘 서방님께서 은밀히 한양으로 돌아오셨어. 내 부탁에 드디어 고개를 끄덕이셨단다. 너를 양자로 들이시겠대.”
“와. 감사 나으리께서 돌아오셨습니까?”
“응. 남가를 밟겠다 기별드렸더니 한달음에 달려오셨지. 전 부인을 만나러 갈 생각에 들떠 계셔.”
다정스레 뺨을 쓰다듬던 강자영의 손이 영목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 맥이 이리 빨리 뛰는 것은 기뻐서일까? 놀라서일까? 아니면 당황해서?”
“그 모두지요.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셔서.”
영목은 고통스러워하는 내색도 없이 턱으로 저를 겨누는 칼끝을 가리켰다.
“이렇게 많은 쇠붙이에 둘러싸여 걸어가는 것도 당황스럽고요.”
“이해하렴. 내가 조부님께 매사 염려하고 과하게 신중하라 배워서 그렇단다.”
대충 웃어 보인 영목은 남인혜가 외우라 강요했던 두툼한 책자를 떠올렸다. 방 안 사방에 빼곡히 붙어 있던 종이도 떠올려 보았다. 그 어디에도 김욱진이 평양에서 한성으로 돌아오리라는 기별은 없었다. 저를 양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첩보 또한 없었다.
‘사대문 안에 대방 마님의 귀와 눈 노릇을 하는 이들만 기백이다. 한데 그 모두가 쓸모없는 상태란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답이 나오지 않는, 이제 와 답을 알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영목의 목을 놓은 자영은 이후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기쁜 듯이 앞서 걸었다. 자영은 우의정 집의 후원 쪽문으로 들어선 뒤에야 들뜬 소녀 같은 얼굴로 어깨를 좁히며 영목에게 다가왔다.
“손님방이 조금 협소해서 면목이 없네.”
그녀의 말과 동시에 영목은 칼끝에 떠밀려 퀴퀴한 구석으로 안내되었다. 말이 좋아 안내지, 끌려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도착한 곳은 창문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메주와 새끼줄이 주렁주렁 걸린 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