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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58화 (58/157)

58화

“내 일이 명명백백히 밝혀지면 저놈의 시신도 발견되겠지? 그럼 저놈도 제사상을 받겠지? 그건 싫은데……. 싫은데. 저놈은 제사 받으면 안 될 놈인데.”

“…….”

“하긴. 진사 댁 아드님과 천애 고아 백정 계집의 목숨이 어찌 같겠느냐마는.”

자조하다, 저주하다, 다시 자조로 돌아온 원귀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윤은 그 처진 어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당히 유해를 수습하고 매년 제사상이나 차려 주려 했던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원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두 목숨은 절대 같지 않지요.”

“…그렇겠지.”

“죽어 마땅한 쓰레기 같은 놈과 억울하게 죽은 꽃다운 생명이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슬픔과 서러움으로 처연히 가라앉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윤은 더러운 것을 가리키듯 한량이 묻힌 곳을 발끝으로 가리키면서 호언장담했다.

“저는 값진 것을 다루는 남가 상단의 사람입니다. 그대와 저 한량의 가치를 절대 같이 두지 않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조드리지요. 제가 이 약조를 어찌 지키는지 확인하시려면…….”

윤이 영목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거기서 나와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나가면…….”

“지금 몸을 차지하신 그이가 그대의 서러움을 다 들어 주고, 대신 욕도 해 주고, 천도까지 해 줄 사람입니다. 염려 말고 나오세요.”

원귀는 입술을 잘근대며 고민했다. 긴 고민 끝에 동그란 머리통이 위아래로 한 번 끄덕인 순간, 영목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윤은 영목을 받쳐 안고 이마를 맞대어 그의 상태를 가늠했다. 열은 조금 있지만 호흡은 흐트러짐 없이 안정되어 있었다. 영목이 깊은 잠에 빠졌을 뿐이라고 확신하자마자 윤의 입에서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도련님을 믿고 싶소.”

그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단은 생전의 모습으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처녀의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윤을 향해 서 있었다. 윤은 푸르스름한 그녀의 형체를 향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드린 대로 기일마다 거하게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때를 보아 고운 사당도 하나 지어 드리고요.”

“사당? 내게? 나 같은 것이 사당의 주인이 된다고?”

“그리될 것입니다.”

윤은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처녀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떠올랐다. 자신의 초상이 걸린 사당에 사람들이 향을 올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레는 모양이었다.

“저를 향해 똑바로 서 주세요. 빠짐없이 기억해 두었다가 한성에서 제일 솜씨 좋은 화공에게 초상화를 부탁하겠습니다.”

그는 수줍게 웃고 있는 단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온 한성의 장정들을 다 불러 모을 겁니다. 그리고 이 물레방앗간 안에서 지신밟기를 해야 한다고 알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귀하께서는 저를 믿고 첫닭이 울기 전에 저승길로 나서세요.”

지신밟기는 땅에 들러붙은 음험한 잡귀들을 장정들의 넘치는 양기로 밟아 해치우는 의식이었다. 잡귀를 물리쳐 좋은 기운을 살린다 하여 주로 명절에 이루어지곤 했다.

‘개만도 못한 한량 놈의 혼백은 지금 처녀 귀신 원한에 발목이 묶여 땅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때아닌 지신놀이 핑계로 자근자근 밟으면 그놈의 혼백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을 거야.’

윤이 한량이 승천할 수 없도록 그의 혼백을 완전히 소멸시킬 계획을 짜고 있을 때였다.

“에라이. 미친 소리 말게!”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든 줄 알았던 영목이 윤의 어깨를 철썩 때리면서 몸을 바로 세웠다. 윤은 영목의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내가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더니! 그 좋은 머리로 나쁜 놈 혼백을 소멸시키려는 몹쓸 생각이나 하고 있나?”

“몹쓸 놈이잖습니까. 다시 태어날 가치도 없는 놈이에요.”

“나도 기분만은 자네와 다르지 않아. 하지만 다시 태어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의 판단은 인간이 하는 게 아니야. 저승에 가면 염라께서 보시고 지은 죄만큼 똑같이 값을 쳐주실 걸세.”

영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같은 값을 매긴다면 더더욱 아니 되겠습니다. 저는 한 푼이든 두 푼이든 이자를 셈하는 것이 당연한 장사치라서요.”

단이 눈을 홉떴다. 윤이 말한 지신밟기가 무슨 의미인지, 둘의 대화를 들으며 뒤늦게 이해한 듯했다. 순박하게 동그랗기만 하던 단의 눈이 흉측할 정도로 커지고 더 커졌다. 단은 흰자위의 핏대가 다 보일 정도까지 눈을 까뒤집었다. 다시 원귀의 모습이 된 그녀는 지체 없이 양 진사네 둘째 아들이 묻힌 자리 위로 달려갔다.

“이 위에서 쿵쿵 발을 구르면 그 한량 놈의 혼백이 소멸된단 말이지! 아하하하하!”

“어휴, 내 이럴 줄 알았어!!”

영목이 왈칵 짜증을 내자 단은 목청 높여 깔깔 웃으며 더 신나게 발을 굴러 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한이 배어 땅이 시커멓게 물들어 갔다. 흙바닥이 썩어 들다 못해 철벅철벅 진탕이 되었을 때에야 단은 다시 살아생전의 앳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 조금 후련하십니까?”

태연하게 묻는 윤에게 영목이 있는 대로 눈을 흘겼다. 썩은 땅 위에 퉤, 하고 침을 뱉은 단이 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도련님 덕이오. 내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겠소.”

“은혜 같은 게 아닙니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셨을 뿐이지.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단은 퍽이나 즐거워하는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방긋 웃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칭찬을 죽어 듣네. 이제서야 사람 취급을 받은 기분이오.”

무어라 핀잔하려던 영목은 말을 삼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영목마저도 한 소리 보태지 못했을 정도로 단의 표정은 너무나 가볍고 행복해 보였다.

“도련님 덕에 더없이 후련하고 가벼워졌소. 날아갈 것 같구려.”

영목은 검게 썩은 물레방앗간 구석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헝클었다.

“어휴. 쌓이고 쌓인 원한을 저 위에 다 쏟아 냈으니 지금 당장은 당연히 가볍고 시원하겠지! 위에 가면 염라대왕이 노발대발할 텐데!”

“그 죗값은 기꺼이 받겠소.”

개운해진 얼굴을 마주하자 핀잔하던 영목도 이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이고… 나도 모르겄다. 거기,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으시오.”

영목은 뽀얀 입김을 길게 내뿜으며 거미줄 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후련하게 웃고 있는 단과 시선을 맞추었다.

“다음 생에는 조금 고생할지도 모르나, 그다음 생은 아주 편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렇소? 나 같은 천것 백정도, 저렇게 땅이 푹푹 썩어 들게 만든 원귀도, 언젠가는 편해질 수 있소?”

“때가 되면 뭐……. 그러니 염라께서 무슨 벌을 주시든 꾹 참고 한 생만 견디라고. 알아들었나?”

“응응. 고맙소.”

단은 둘을 향해 달맞이꽃처럼 빙그레,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사뿐사뿐 걸어 물레방앗간 밖으로 나갔다. 판자를 스르륵 통과한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영목이 윤의 팔뚝을 힘껏 후려쳤다.

“자네 완전히 미쳤구만? 처녀 귀신 한 풀어 주자고 꼬여 왔더니, 귀신한테 땅에 묻힌 혼백을 원한으로 짓뭉개는 법을 알려 주고 있나? 어?”

“아시다시피 제가 단이라는 이름에 꽤 무른 인간이라서요.”

윤이 이미 벌인 일을 어떻게 할 거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영목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가만 보면 영목 저는 인간의 힘으로 수습 가능한 사고를 치고, 윤은 인간의 힘으로 수습 안 될 사고를 치는 편이었다.

“저승 것들이 알면 지랄 지랄 하면서 엄청난 액을 먹일 거야. 그 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런 사고를 치나 그래!”

순간 천장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목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더 헝클어 대며 연거푸 한숨과 욕설을 내뱉었다.

“아! 정말, 내가 윤이 도령 때문에 못 산다, 못 살아!!”

윤이 태연한 얼굴로 제 도포를 벗어 영목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버럭버럭 성질을 내던 영목은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추고 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는 이 길로 곧장 돈의문으로 달려가. 나는 나대로 겨울 산행 할 차림으로 두툼히 끼어 입고 최대한 빨리 자네 따라가겠네.”

윤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작은 속삭임이었다. 빠르게 말을 마친 영목은 다시 목청을 키워 윤이 걸쳐 주는 대로 옷에 팔을 꿰면서 끝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윤은 영목이 쳐다보았던 천장을 한 번 흘끔 바라보았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최 형, 어디 아프십니까?”

“아프긴. 돈의문 의원 영감에게서 약재들 사고 있으라는 소릴세. 뇌물 삼아 약 보따리 잔뜩 들고 곧장 연수산으로 가자고.”

윤의 머리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갑자기 연수산은 왜요?”

“거기엔 서양 용에 우리 스승님까지 성격 더러운 용이 둘이나 있잖나? 용들 덕에 저승에서도 연수산은 함부로 못 쳐들어와. 그러니까 일단 거기 숨어서 저승의 처벌을 피할 방도를 모색해 봐야지.”

다급한 영목의 마음은 조금도 모르는 듯, 윤은 느긋하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는 처벌받을 일 한 것 없습니다.”

“자네가 틀린 일을 한 건 아니지. 하지만 저승에는 저승 법이 있어. 방금 처녀 귀신에게 방법을 알려 주면서 저승 법을 뒤틀었으니… 필시 액을 맞을 거야. 저승 차사들이 눈치채기 전에 피해야 하네.”

“하. 어린 처녀가 억울하게 죽어도 데려가지 않던 차사들이, 제가 규칙 조금 뒤틀었다고 빨리 움직이겠습니까?”

인간의 규칙으로 보면 윤의 말이 맞았다. 차사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여 한겨울 얼어붙은 땅 밑에 묻힌 처녀를 내도록 모르는 척했다. 그래 놓고 처녀 귀신의 한을 풀어 주었다는 이유로 윤에게 액을 날리는 것은 정말 공평치 않았다. 문제는 저승 것들은 하나같이 저 나름대로의 규칙으로만 움직이는 고집불통이라는 데에 있었다.

‘저승도 저승인데… 지금은 그보다도 윤이 도령을 피신시키는 게 우선이다. 내가 된통 함정에 빠졌어.’

영목이 재차 물레방앗간 천장을 흘끗 쳐다보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네. 나는 자네를 지키는 게 일인 사람이야. 서둘러서 안전을 모색하자는 거니 협조하시게.”

“그럼 최 형도 저와 함께 가시지요.”

“이 꼴로 겨울 산행을 어찌 하나? 옷 좀 껴입고 곧장 따라간다니까. 얼른 가!”

영목이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윤을 물레방앗간 밖으로 떠밀었다. 밖에서는 희끄무레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윤은 영목의 성화에 못 이겨 미적미적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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