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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57화 (57/157)

57화

“평소에 어디서 어떻게 뭘 하고 다니시길래 다들 최 형 음담패설을 별생각 없이 웃어넘깁니까?”

“다들 내 말을 농담으로 여기면서 웃어넘기는 게 자네에겐 얼마나 다행인가?”

“제게 다행일 건 또 뭐고요.”

“귀한 윤이 도령이 나 같은 놈이랑 붙어먹는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얼마나 큰일이겠냐고. 자네에게 나는 사귀면 안 될 악우 역할 정도가 딱이지.”

뼈 있는 대꾸였다. 윤의 관자놀이에 불끈 핏대가 섰다.

“왜 또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밤새 저희가 나누었던 정을 없던 일로 치부하실 것처럼.”

“생각해 봤더니 그게 나을 것 같아서. 서로 상처 핥아 준 셈 치세.”

“어디를 얼마나 더 핥아 드려야 서운한 말씀 안 하시려나.”

“무… 뭐?”

윤은 한발 앞서 물레방앗간으로 들어선 영목을 밀듯이 바짝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을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영목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당황한 영목이 팔을 휘젓자 윤은 쾅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문을 잠그고는 갓을 벗어 던졌다. 순식간에 저고리가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영목이 너저분하게 뒹구는 짚 더미 위로 날아가는 갓과 갈기갈기 찢겨 흩어지는 옷 쪼가리를 아연히 쳐다보았다. 윤은 손으로 그의 뺨을 잡아 쥐어 얼굴도, 눈도 제게로 고정했다.

“어디부터 핥을까요.”

“윤이 도령! 으, 나한테서 떨어져!”

“거칠게 하라 주문하신 건 최 형입니다.”

도리질을 치던 영목이 손톱을 세워 윤의 목을 움켜쥐었다. 윤은 피하지 않고 제 목을 그의 손에 고스란히 내어 주었다.

“한술 더 떠 제 목까지 조르실 줄은 몰랐는데요.”

“나 씌었―”

말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고 영목이 뒤통수가 등에 닿도록 목을 뒤로 푹 꺾었다. 깜짝 놀란 윤이 영목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목을 졸라 오는 손에 더 바짝 힘이 들어왔지만 윤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최 형?”

“도련님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총 흑립에 비단 도포 걸친 놈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구려.”

영목의 입에서 가느다란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은 그제야 눈썹을 찌푸리며 영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목이 하얗게 흰자가 뒤집힌 눈으로 윤을 흘겼다.

‘최 형 정도 되는 사람의 몸을 이렇게 순식간에 잠식할 정도면… 보통 원귀가 아니군.’

그는 행여 영목의 몸이 상할까 걱정하며 제 목을 조르는 손도 밀어내지 않고 영목의 뺨을 감쌌다. 부드러운 손짓에 놀랐는지 새하얀 눈으로 윤을 흘기던 원귀가 흠칫 어깨를 떨며 몸을 굳혔다.

“내 그대의 말을 누구보다 귀담아듣겠소. 그러니 그 몸에서 나오시오.”

까뒤집은 눈으로 윤을 살피던 영목이 크게 코웃음 치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윤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억눌린 음성으로 침착하게 다시 그를 설득했다.

“귀하가 들어가 있는 그 몸의 주인은 내게 누구보다, 무엇보다 귀한 사람이오. 귀한 이의 몸이 상할까 염려되니 그 몸에서 나와 말씀하시오.”

“흥! 귀하다는 말과 달리 퍽 거칠게 달려들던데?”

“그이가 거칠게 하길 원하였으니까.”

“…….”

영목의 몸을 차지한 원귀는 말을 잃고 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온통 흰자위뿐인 눈에 노골적인 의심이 담겨 있었다. 원귀는 한참 만에 다시 입을 뗐다.

“왜 내게 목을 내어 주지? 도련님 손바닥에서 용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목을 틀어쥔 이 손을 꺾으려면 얼마든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당하고 있어?”

“내 몸이 상하는 것도 싫지만, 내 힘으로 그이를 다치게 하는 건 더 싫소.”

윤의 목을 조르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몇 번을 콜록이며 모자란 숨을 보충한 윤이 지푸라기 위로 내던졌던 갓을 주워 들고 매무새를 정돈했다. 원귀는 핏대 선 흰자위를 번들대며 윤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살폈다.

갓을 고쳐 쓴 윤이 반듯하게 자세를 다잡고 영목의 몸을 차지한 원귀에게로 한 발씩 다가섰다. 원귀는 언제든 다시 달려들 수 있다는 듯이 손끝을 갈고리처럼 세우고는 윤을 위협했다.

윤은 보다 정중한 말투로 차분히 원귀를 설득했다.

“대관절 무슨 연유로 이러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러 왔습니다.”

“내깟 것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무엇 하려고?”

“낱낱이 새겨듣고 한을 풀어 드리려고요.”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지, 영목의 얼굴에 낯선 여인의 얼굴이 겹쳐지며 마구 흔들렸다. 윤은 영목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넘기며 낮게 속삭였다.

“살던 곳과 이름을 알려 주시면 정성껏 상을 차려 제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도련님이… 내 제사를?”

“그 몸의 주인과 함께, 매년 기일마다요.”

번민하던 원귀가 잔뜩 구부려 위협하던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손끝을 어찌나 빳빳하게 세우고 있었는지 힘을 뺀 손이 그대로 굳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윤은 조심스레 영목의 손을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 몸의 모든 곳이 귀하지만, 이 손은 특히나 아주 중하답니다. 최 형은 주먹질도 해야 하고, 칼도 쥐어야 하고, 투전판에서 패도 쥐어야 하거든요.”

“…최영목이 이 손으로 하는 일이라 봤자 고작 그런 것 따위인데. 도련님이 최영목 같은 망나니 손을 어찌 이리 정성껏 주물러 주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죽일 듯 목을 조르던 사람답지 않게, 어린 소녀 같은 투덜거림이었다. 윤은 단을 대하듯 보드라운 음성으로 슬며시 눈꼬리를 휘었다.

“백번 생각해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이가 즐겨 하는 일이 그 모양들이니 저로서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틈틈이 손을 주물러 드리는 수밖에요.”

반신반의하며 내내 미심쩍다는 듯 윤을 흘기던 원귀는 이내 귀 끝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남산 아래 백정촌에 살던 사람이오. 벌건 피 묻히고 산다 하여 단이라고 불렸지.”

“우리 단이와 똑같이 붉을 단 자를 쓰시겠네요. 참으로 고운 글자이지요? 제가 참 좋아하는 이름입니다.”

마치 잘 알던 사이인 것처럼 윤은 살갑게 말을 받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원귀가 이내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우며 풀풀 냉기를 뿜었다.

“남가의 단이 아씨와 천하디천한 백정 년의 이름이 어찌 같겠소?”

“어찌 다르겠습니까?”

“내 생전에 도련님이 단이 아씨 손을 꼭 붙잡고 운종가를 거니는 걸 몇 번이나 보았는데…….”

싸늘하게 웅얼거린 원귀가 윤이 주무르고 있던 손을 매섭게 거둬들였다가 그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어디, 이런 내 손도 잡을 수 있겠소? 단이 아씨 손인 것처럼?”

윤은 원귀가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마디에도, 손바닥에도 굳은살이 잔뜩 박인 영목의 손 위로 피 얼룩이 잔뜩 묻은 다른 손의 형상이 겹쳐졌다. 그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소중한 것을 감싸듯 두 손으로 포개 잡자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영목의 손이 온전히 가려졌다.

“…으.”

잡으라 종용하였으나 정말 잡을 줄은 몰랐다는 듯, 원귀가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 윤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는커녕 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어 잡고 온기를 나누었다.

“손끝이 매우 차네요. 추운 곳에 오래 계시었나 봅니다.”

그저 새하얗기만 하던 영목의 눈이 물기를 담고 크게 흔들렸다.

“나는 저기… 저기 묻혀 있소.”

번뜩이는 흰 눈동자가 흙먼지와 지푸라기가 가득한 물레방앗간의 북쪽 구석을 가리켰다.

“머리채를 잡혀 끌려왔소. 있는 힘껏 몸부림을 치다가 방아채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찧었는지 어쨌는지… 정신을 차리니 이미 내 몸은 저기 묻혀 있더군.”

원귀가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건조하게 웃었다.

“그 개만도 못한 놈은 바로 다음 날 여기로 다른 여인을 또 끌고 와 또 같은 짓을 했소. 내가 묻힌 바로 위에서.”

“…….”

“엉망인 꼴로 끌려온 처녀가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 달라고 울며불며 외쳤소. 그래서… 내가 도왔다오. 그 처녀의 몸으로 들어가 있는 힘껏 놈의 목을 졸랐지.”

윤의 손안에 있는 마디 굵은 손에 아드득 힘이 들어갔다. 윤은 쉬이, 달래면서 차가운 손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원귀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도톰하게 발긋하던 영목의 원래 입술 색과 달리 샛보라색으로 변한 입술이 괴이할 정도로 길게 늘어져 서늘한 웃음을 걸었다.

“내가 내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할 새도 없이 처녀의 정인이 물레방앗간으로 달려왔소. 둘이 얼싸안고 한참을 울다가… 그놈을 파묻더라고. 저기에.”

원귀는 턱으로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의 맞은편 구석을 가리켰다. 윤의 눈길이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움직였다. 때마침 성근 나무판자 틈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허름한 물레방앗간을 기다란 은빛으로 은은하게 밝혔다. 하얗게 눈을 까뒤집은 원귀가 그 은빛을 향해 뽀얀 숨결을 길게 내뱉었다.

“나는 맹세코 죄 없는 이를 해한 적은 없소. 죄 없는 처녀들이 나처럼 험한 일 당하지 않도록 구해 주고 싶었을 뿐이오.”

윤은 원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양 진사 댁 둘째 아들을 떠올렸다. 창천 물레방앗간 근처에서 행패를 부리던 걸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던 한량. 사라진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집에서도 썩 열심히 찾지 않을 정도로 내놓은 자식. 이쯤 되면 내놓은 자식 정도가 아니라 버린 자식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얼마나 추접스러운 짓거리만 하고 다녔으면 진사씩이나 되는 집안에서 손을 놓았을꼬.’

마구 엉킨 실마리들을 찬찬히 모아 정리한 윤이 깊은 탄식과 함께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 숙인 영목의, 원귀의 뺨을 감싸 올려 저와 눈을 맞추었다.

“확인하겠습니다. 저기 묻힌 쓰레기가 양 진사 댁 둘째 놈입니까? 그놈이 그대를 그리하였습니까?”

핏대 선 흰자에서 주르륵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윤은 뺨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한참을 서럽게 흐느끼던 원귀가 어둑한 실내의 구석을 노려보았다.

“저놈 따위보다 나를 기억해 주시오. 나를 궁금해해 주오.”

“…예?”

“나는 덧없이 죽어 묻혀도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백정촌 단이라오. 나는 아무도 내가 왜 죽었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불쌍한 단이야.”

“…….”

“처녀 귀신이 되어 설치다 보면 누구라도 내 설움에 귀 기울여 줄 줄 알았건만…… 누구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어. 그저 무서워하기만 하더군.”

윤은 서러운 흐느낌을 억누르며 부릅뜬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영목과, 자신의 어머니와, 단을 겹쳐 보았다. 원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한 서린 말을 이어 갔다.

“그 한량 놈의 혼백은 깊고 깊은 내 원한에 칭칭 얽혀 발목 잡혀 있소. 땅 위로 올라오지도 못하고 지하에 묶여 있지. 그래서인가… 나도 여기서 떠날 수가 없다오. 내 원한은 해로운 잡초처럼 이 물레방앗간 안에 징그럽게 뿌리내려 버렸어.”

대체 무슨 생각에 닿았는지 처연히 처지던 눈꼬리에 맹렬한 광기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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