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56화 (56/157)

56화

‘등 뒤에 쏙 숨겨지던 도령이 언제 이렇게 컸을꼬.’

어린 날의 윤은 설움과 분노를 익숙히 짓누른 눈으로 세상의 조롱을 견디던 자그마한 아이였다. 기억 속 어린 소년은 더 이상 작지도, 연약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영목의 키를 훌쩍 넘어서 버린 윤의 몸은 지난 몇 년 사이 더욱 다부지고 단단해졌다. 세경이 준 호두를 기어코 부수어 보겠다며 나름대로 훈련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목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땀으로 젖은 윤의 가슴을 쓸며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이 몸마저 부럽고 분하네. 세경 마님이 강제로 먹인 온갖 기화요초로 단련된 나보다 사내로 태어났을 뿐인 윤이 도령 몸이 더 단단하다는 게 분해.’

사람들은 윤을 보고 난초라 했지만 영목은 그를 볼 때마다 항상 한겨울 매화를 떠올렸다. 제 몸 위로 쌓인 눈을 고집스럽게 짊어지고 핀 하얀 꽃. 윤의 발간 눈매와 손끝마저 매화를 꼭 닮았다 생각하며 영목은 혼자 웃었다.

단단한 가슴에서 기다란 목덜미를 지나 도홧빛 열기가 남은 뺨과 눈가를 쓰다듬으며 영목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네에게 나는 대체 뭘까.”

“말씀드렸잖습니까. 마른나무에서 떨어진 나의 울타리, 나의 장벽, 나의 칼, 나의 신이라고.”

잔뜩 낮아진 목소리가 젖은 살결을 울리고 귓가로 스며들었다.

“…사람 참. 깼으면 기척이나 하지.”

영목의 핀잔에 윤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윤이 지금처럼 드물고도 드물게 활짝 웃으면 왼쪽 뺨에 깊은 볼우물이 파였다. 그게 왠지 얄미워 영목은 윤의 뺨을 꽉 꼬집었다. 그제야 윤이 기다란 속눈썹을 들어 올려 눈동자 가득 영목을 담았다.

“뭐가 그리 불만이십니까?”

“자네는 내 무엇이 그리도 좋아서 매번 이렇게 귀한 것 보듯이 나를 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윤이 엷은 갈색의 눈동자 가득 영목을 담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새길 듯이 영목을 눈에 담으며 그는 더없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조부님도… 남에게 무르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얕잡혀 보인다고만 가르치셨어요. 사람이 항상 단단하고 강할 수가 없는데도 그래야만 한다고 배웠습니다.”

“…….”

“최 형은 내 약한 면을 내보여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내가 뒤로 숨을수록 좋아해 주는 세상 단 하나뿐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남윤의 눈 속에는 온전히 최영목만이 존재했다. 영목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었던 적도, 누군가에게 소중히 여겨졌던 적도 없었다. 영목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윤은 처음 그대로 변함없이 영목을 귀하게 마주 보며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약한 나를 좋아해 주는 최 형을 좋아합니다. 처음 뵌 그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아니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

윤의 눈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영목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영목은 대들보를 때려 부수는 것만이 자신의, 최영목이라는 인간의 존재 가치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윤에게 최영목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최영목이었고,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저 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목은 자신이 바라는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영목은 슬며시 입술을 물어 웃음을 숨기고 윤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그렇게 듣기 좋은 말로 구슬려도 물레방앗간은 갈 거야.”

“…어련하시겠습니까.”

윤이 영목을 안은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영목을 바라보며 만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목은 답지 않게 목이 메어 입술만 실룩였다.

“난… 솔직히 모르겠네. 자네와 내가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최 형도 저도 처음이었던걸요. 잘하고 아니고를 누가 평가하겠습니까?”

“이 사람아… 내 말이 행위의 우수성을 논하는 거겠나?”

“저도 압니다. 알지만 모르는 척 다른 소리를 하는 거고요.”

과하게 태연한 대꾸에 영목이 완전히 말을 잃은 틈을 타 윤은 영목의 몸에 속곳부터 고쟁이, 속치마까지 척척 옷을 걸쳐 주었다. 여인 옷 수발드는 것은 어디서 배웠느냐 물으려던 영목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병치레 잦은 단아를 어르고 달래며 키우다시피 한 게 윤이 도령이니… 늘어진 사람 몸에 옷 입히는 게 익숙할 수밖에.’

가만히 그의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던 영목이 손을 뻗었다. 영목의 손이 윤의 뺨에 닿았다.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윤은 녹을 듯 눈꼬리를 접으며 영목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우리가 갑자기 머리에 열이 올라 정을 나눈 줄 알았는데. 서로 상처를 핥은 거였구만.”

“상처만 핥진 않았지 싶은데요.”

“…….”

“정도 잘 나누었지 싶습니다.”

영목의 손에 얼굴을 기댄 윤이 천천히 얼굴을 돌려 영목의 손바닥 안에 입술을 찍었다. 말캉한 살결이 제 굳은살을 더듬고 문지르자 영목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허접한 도령 체력 생각하여 적당히 봐주려 했건만.”

영목이 기껏 걸쳐 입은 저고리를 북 뜯어 헤치고 윤에게 올라탔다. 영목의 손 틈새에 입술을 부비던 윤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가에 곡선을 매달았다.

“그리 하시고 또 하시면 제대로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내 걱정 말고 자네 허리나 챙겨. 나는 용이 기른 산삼이랑 영지 먹고 큰 놈이야.”

영목이 코웃음을 치며 옷을 벗었다. 기껏 차려입은 치마저고리가 덧없이 허공을 날자 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결국 그날은 윤도 영목도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을 거쳐 다음 날이 되도록 방 밖을 나서지 못했다. 둘은 새 아침이 훤한 대낮이 되고 낮의 햇살이 서쪽으로 기울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행랑아범이 왔다 간 모양입니다.”

곱게 바른 창호 문에 드리운 밥상 그림자를 가리키며 윤이 핏 웃었다. 영목은 얼굴을 찡그리고 급하게 옷을 꿰어 입었다. 제가 보아도 엉망으로 걸친 옷을 내려다보며 혀를 차던 그는 나른히 늘어진 윤을 일으켰다.

“일어나게. 그만 놀고 가서 처녀 귀신 후딱 잡고 오자고.”

“…그러고 나가시게요?”

“하룻밤 버선코 맞댔다고 바가지 긁을 생각 말고 얼른 옷이나 입어.”

“…….”

윤은 한숨지으며 새 옷을 걸쳐 입고 영목을 돌려세워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제법 그럴싸하게 차려입은 보람도 없이 영목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잔뜩 쉰 목소리로 쩌렁쩌렁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들 나 좀 보시오! 어떻소? 반할 것 같지 않소? 웬만한 처녀들보다 내가 곱지?”

피곤하지도 않은지, 영목은 온 한성 사람들에게 죄다 알은체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허리를 두드리며 그를 뒤따르던 윤이 시름 깊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영목이 너 목소리는 왜 그러니?”

만나는 사람마다 쉬어서 평소보다도 더 걸걸한 영목의 목소리를 타박했다. 어떤 낭자가 말술 마신 목소리를 내고 팔자로 걷느냐며 영목의 등짝을 치기도 했다. 영목은 그럴 때마다 너스레를 떨며 윤을 가리켰다.

“아, 물어 뭐 해? 우리 윤이 도령이랑 밤새 뜨거운 시간을 보내서 그렇지!”

“예끼, 이놈아! 아유……. 도련님은 좀 좋은 친구 사귀십시오. 제발요.”

지나가던 사람이 영목의 목이 쉰 이유를 묻고, 영목이 윤을 가리키면, 그 사람이 질색하며 윤에게 대신 사과했다.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묵묵히 걷는 윤이 한 번씩 깊은 탄식을 토할 때마다 영목은 더 크게 낄낄거리며 더 짓궂은 소리를 했다.

“순진한 도령 꾀어서 물레방앗간 가려니 이것저것 가르쳐야 하지 않겠소? 우리 윤이 도령도 알 것 다 알 만한 나이가 됐지, 뭐.”

“영목이 저거는 못 하는 말이 없어! 어휴!”

윤이 다섯 번쯤 마른세수를 했을 때, 드디어 인적이 뚝 끊겼다. 스산한 바람 소리의 끝자락에 덜컥, 쿵,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창천 물레방앗간 근처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저기가 문제의 물레방앗간일세.”

영목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가리켰다.

“내가 좀 알아봤는데, 그 처녀 귀신은 거칠게 할 때만 나온다더구만.”

“거칠게…라니……. 대관절 무엇을…….”

“뭐겠나?”

영목이 음흉한 얼굴로 요상한 허리 짓을 하자 윤이 질색하며 눈을 가렸다. 영목이 크게 키득거렸다.

“저 물레방앗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내 저고리를 쫙 찢어 내게. 어제 내가 자네 옷에 한 것처럼.”

“…최 형이 제 걸 뜯으시는 게 빠르지 싶습니다. 어제 하신 것처럼.”

영목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나라도 윤이 도령 비단옷을 몇 번씩 찢어 먹으려니 손이 떨려서.”

윤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옷고름과 영목의 옷고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목이 자신의 옷고름을 펄럭펄럭 흔들고 윤의 갓을 톡톡 건드렸다.

“물레방앗간 들어서자마자 자네 갓을 집어 던지고 내 저고리를 한 번에 쫙 뜯게. 알았지? 귀신도 속을 만큼 거칠게 해야 해.”

“…집엔 대체 뭘 입고 가시려고 연신 찢으라, 뜯으라 하십니까.”

영목이 눈을 껌뻑이며 아담한 물레방앗간의 뒤쪽을 가리켰다.

“이 친구, 날 아직도 모르나? 내가 갈아입을 건 저기 물레방앗간 뒷문 문고리에 꽁꽁 묶어 매달아 놨다네. 자네 집 가기 전에 미리 손을 써 두고 왔다고.”

“하아…….”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세. 자네 갓 던지고, 내 저고리 뜯고, 확 밀어 눕히는 거야. 응?”

윤이 무어라 핀잔하기도 전에 나이 든 아낙 둘이 지나가며 영목을 향해 혀를 찼다.

“으이구. 도련님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좋은 거!”

“어? 그렇지 않아도 어제 아침부터 오늘 나오기 전까지 윤이 도령에게 온갖 좋은 거 다 가르치고 나오는 길인데. 어떻게 알았수?”

느물거리는 영목의 대꾸에 윤이 헛숨을 들이켰다. 광주리를 머리 위로 올린 아낙이 웃음 반 질책 반으로 영목의 어깨를 때리면서 윤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영목이가 한 말 새겨들으시면 안 되는 거 아시지요?”

“이제라도 늦지 않으셨으니 도련님은 영목이 말고 좋은 친구 사귀세요, 제발.”

“안 돼, 안 돼. 내가 우리 윤이 도령 물고 빨고 침 바르고 다 했어.”

장사를 마치고 들어가던 아낙들이 깔깔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멀어졌다. 아낙들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영목이 제 어깨로 윤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오늘 좋은 친구 사귀라는 말을 백 번쯤 듣는구만.”

“다른 말들이 너무 남우세스러워서 그 말은 귓가로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왜. 내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 왜.”

윤이 긴 눈을 내리깔고 영목을 흘기며 짧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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