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손안에 얼굴을 묻은 윤의 귓불에는 이미 발긋하게 꽃물이 들어 있었다. 영목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윤의 등을 사랑채로 떠밀었다.
“자, 자. 마음 정했으면 어서 들어가서 내 머리 좀 땋아 주게.”
“어서는 무슨 어서입니까? 훤한 대낮부터 나오는 귀신이 어딨다고.”
“처녀 귀신이야 달 뜨면 나오겠지. 나는 이왕 치마저고리 걸치는 김에 자네 끌고 육의전 구석구석 다녀 볼까 하는 거고.”
단번에 해쓱하게 질린 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영목은 낄낄거리며 윤의 손목을 붙잡고 앞장서서 그의 처소로 들어섰다.
영목은 못 이기는 척 끌려 들어오다가 댓돌 위에 서서 자신을 흘기는 윤을 짓궂게 놀려 댔다.
“허허. 대낮부터 윤이 도령 눈길이 너무 뜨겁구만.”
“…….”
“나랑 버선코 맞댈 거 아니면 그리 쳐다보지 말게. 부끄러우이.”
대청마루로 폴짝 올라선 영목이 댓돌 앞에 선 윤의 눈을 가렸다. 윤은 그의 손을 밀어 치우고 신발을 벗은 뒤에 대청으로 올라가 영목과 마주 섰다.
“버선코 맞댔습니다. 이젠 원껏 쳐다봐도 됩니까?”
영목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꼬질꼬질한 자신의 버선 끝에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윤의 버선이 맞닿아 있었다. 영목이 코웃음을 쳤다.
“아이고, 순진한 우리 윤이 도령……. 버선코 맞대는 건 이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
버선코를 맞댄다는 것은 배꼽을 맞댄다는 말을 조금 더 순화한 표현이었다. 버선조차 제대로 벗을 새 없이 급하게 엉겨 붙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목은 순진한 도령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고 스스로를 탓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윤이 가만히 문을 닫아걸었다.
“압니다, 저도.”
“뭐?”
“버선코를 맞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요.”
“…자네가 그걸 어찌 알아?”
“관심이 없는 거지, 들을 귀가 없진 않습니다.”
윤은 나직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받아치면서 너른 방 안의 문과 창문을 모두 닫아걸었다.
“허허. 윤이 도령도 약관 넘기니 때가 타는구만.”
“다 최 형 덕분입니다.”
꽉 닫힌 창문마다 도톰한 발까지 모두 드리운 윤이 소리 없이 다가와 영목의 앞에 섰다. 영목은 옷을 갈아입으라는 배려로구나, 하면서 들고 있던 옷 보따리를 흔들흔들 흔들었다. 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입을 줄은 아십니까?”
“왜. 못 입겠다 하면 도와주려고?”
“원하신다면.”
거침없이 답한 윤이 영목의 가까이로 성큼 다가섰다. 서로의 버선코가 다시 맞닿았다. 영목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윤이 맞대고 있던 버선코를 살며시 밀었다. 사각대는 천이 비벼지는 소리에 영목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저 발을 감싼 두꺼운 천이 스칠 뿐인데 속 고름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이 친구, 큰일 날 친구로구만. 나는 때가 타다 못해 검댕이라 자네 그런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락거리면 음심이 뻗친다고!”
영목이 보따리를 휘두르며 뒤로 몸을 물렀다. 그가 물러난 만큼 윤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시라고 이러는 건데요.”
“…어?”
“아직 제가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모양이지요.”
영목이 설마, 하며 눈을 찌푸린 찰나에 윤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 답지 않게 발소리를 내며 걸어간 윤은 책이 펼쳐진 서안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갓끈이 얼굴선을 따라 늘어지자 그는 번거롭다는 듯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갓을 풀어 내려놓았다.
한결 가뿐한 차림이 된 윤이 서안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영목에게 되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댕기였다. 꼭 윤의 입술 색 같은 붉은 비단에 색색의 실로 살아 있는 것 같은 모란이 수놓아져 있었다.
엉겁결에 댕기를 받아 들었던 영목은 조금 늦게 아이고, 탄식하면서 그것을 다시 윤에게 돌려주었다.
“단이 아씨 주려고 아껴 둔 댕기일 텐데, 고작 내 장난에 장단 맞춰 주려고 꺼내 오면 어쩌누?”
“최 형 생각나서 사 두었던 겁니다.”
“…나?”
“예. 이렇게라도 주인을 찾아가니 다행입니다.”
멀거니 선 영목이 철없는 소녀처럼 설레는 가슴에 낯설어하고 있을 때, 윤이 경대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슬며시 어깨를 눌러 앉히는 그의 손은 영목의 기억보다 훨씬 단단했다. 영목이 묘한 기분에 휩싸여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윤은 구깃구깃한 천으로 대충 묶은 영목의 머리카락을 풀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윤의 기다란 손가락이 영목의 머리카락 사이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가볍게 두피를 문지르고 머릿결을 따라 아래로 길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오스스 솜털이 섰다.
영목은 입술을 꾹 물었다. 입을 열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방 안에 둘이 있는 것도, 윤이 제 머리를 빗기는 것도 낯설지 않았다. 애초에 영목에게 상투를 트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 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심장이 멋대로 날뛰었다.
거울 안에서 윤과 영목의 시선이 맞닿았다. 윤은 생각을 읽어 낼 수 없는 눈으로 가만히 영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목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거울 속의 그에게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어떤가? 보고 있으니 막 두근거리지?”
“평소에도 종종 그럽니다.”
“…이 친구, 염통 철렁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
“누가 할 소리를.”
옅은 질책을 흘린 윤이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언제 꺼내 들었는지 촘촘한 빗을 쥐고 곱게 머리를 빗어 내리는 고운 손에 감탄하면서 영목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두근거리기만 하면 어쩌나? 자네도 이제 약관을 훌쩍 넘겼는데 정인과 손등도 스치고 싶고, 손목도 잡고 싶고, 접문도 하고 싶고 그래야지.”
“그 또한 그러합니다.”
“…내가 뭔 소리 하는 줄은 알고 하는 대답인가?”
윤은 말없이 빗질하던 손을 내려 영목의 손등을 덮었다. 윤의 곧고 긴 손가락이 영목의 굳은살 가득한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영목의 손마디를 어루만지면서 손가락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쓸었다. 느리고 조심스럽고 농염한 접촉이었다.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영목이 어깨 너머로 윤을 돌아보았다. 그는 마치 영목이 그렇게 돌아보길 기다렸던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둘의 입술이 닿았다. 말캉한 살이 간질간질 스치고 더운 호흡이 영목의 입술 안으로 흘러들었다.
흔들리는 영목의 눈 안에 비친 저를 보면서 윤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금씩 조금씩 틈을 막으며 잠식해 오는 접문이었다. 맞닿은 살이 서로의 타액으로 젖어 들었다. 더, 더 깊이 숨을 탐하는 윤의 입술이 느슨한 곡선으로 풀어지는 것이 생생히 전해졌다.
윤의 손이 맥박이 요동치는 영목의 손목을 말아 쥔 순간, 영목이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훅 뒤로 물렀다. 윤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던 그대로 멀어지는 영목을 바라보았다. 한낮에 가까워지는 아침의 햇살이 젖어 반짝이는 붉은 입술에 빛을 더했다.
윤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영목의 뺨을 감싸고 따뜻한 엄지가 입술을 쓸었다.
“어떻습니까. 저도 아는 것 같지요? 손등 스치고, 입술 맞대고, 손목 맞대는 게 뭔지.”
“…….”
영목은 기가 차서 입술만 몇 번 들썩이다 말았다. 젖어서 더 붉은 윤의 입술이 온전한 미소를 걸고 휘었다. 저 입술을 제가 적셨다 생각하니 영목의 귓가에 열꽃이 피었다.
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에 내려 두었던 빗을 집어 들었다. 헝클어진 영목의 머리카락을 빗으로 곱게 빗어 내리는 윤의 얼굴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네는 어찌 사람이 그런가?”
“제가 뭘 어쨌다고.”
“그, 그, 그 잘난 낯짝은 어째 낯빛 하나 변하질 않느냐는 말일세!”
윤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윤은 빈손으로 삿대질하는 영목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잡은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너른 가슴 아래에서 윤의 심장이 영목의 손바닥을 빠르게 두드려 댔다. 얼굴을 한껏 낮춘 윤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낯짝은 원체 이리 생겨 먹었고, 심장은 최 형 곁에서 항상 이리 뜁니다.”
“…….”
“이제 만족하십니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영목은 파드득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만족이 되겠나? 어?”
영목이 갑작스레 언성을 높이자 윤의 눈꼬리가 미미하게 구겨졌다. 영목은 그의 왼쪽 가슴 위에 놓인 손을 움직여 단정하게 묶인 그의 옷고름을 움켜쥐었다.
“자네 가슴이 원래 이렇게 뛰는지 나 때문에 뛰는지 내가 어찌 아나?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확인해 볼 터이니 꼼짝 말고 가만있게.”
부욱.
새하얀 옷고름이 풀어지다 못해 뜯어졌다. 윤의 옷 속으로 겹겹이 누벼져 있던 포근한 솜이 방 안에 온통 흩날렸다. 연일 눈발 날리는 바깥 날씨를 꼭 닮은 풍경에 슬쩍 휘는 것 같던 윤의 긴 눈이 스르륵 감겼다.
목화솜이 눈처럼 내리는 늦은 아침, 둘의 버선 끝이 이제야 제대로 맞닿았다. 겨울로 접어든 지 한참인 날에 한여름을 닮은 열기와 습도가 스며들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몰아치는 열락과 귓가를 울리는 물소리가 방 안을 뒤덮었다.
습한 공기 속에서 때아닌 땀을 흘리며 영목은 윤과 함께 바다를 거니는 상상을 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웃음 짓다가 흰 거품이 이는 포말을 손가락질하며 “우리가 처녀 귀신 잡으러 가던 날 같구만!” 하면 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짓궂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자 윤이 뜨거운 숨을 끊어 뱉으며 영목의 목덜미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영목은 힘든 것도 잠시 잊고 윤의 머리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영목은 노을이 물들어 있던 하늘에 휘영청 달이 뜨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윤의 몸 위에서 눈을 떴다. 윤은 제 배 위에 영목을 올리고 등 뒤로 팔을 둘러 단단히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치마저고리 차려입고 해 질 때까지 운종가 육의전을 누비겠다던 영목의 계획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영목은 윤의 심장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