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하.
남인혜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와 흰 연기가 함께 흘러나왔다. 꽤나 한참 동안이나 허공을 향해 웃던 그녀는 평소와 달리 비스듬히 사방침에 기대앉으며 영목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내가 방금 전과 똑같은 질문을 세경 마님께 했었단다.”
“스승님은 뭐라시던가요?”
“일단 때려 부수고 나야 알 일이라며 일축하셨지.”
“스승님답네요.”
“내 보기엔 스승보다 영목이 네가 낫구나.”
남인혜가 다시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세경 마님께 고자질하겠다 농담하려던 영목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괜히 목이 메어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품 안에 깊이 숨긴 금색 증명 패가 허리춤에 매단 새카만 칼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김씨 가문 양자가 되겠다고 강자영에게 대가리 밀어 넣어 보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 누구의 잘못일까 】
날이 밝자마자 영목은 우의정네 집 담을 넘었다. 강자영이 머무는 안채까지 숨어들어 간 그는 능청스레 강자영에게 양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흘렸다. 그렇게 강자영의 비위를 맞추고, 남인혜의 정보통들과 접선하고, 담무회의 체계를 다지다 보니 두 달이 금세 지나갔다.
남인혜의 세작들이 대부분 기루인 향화각에 포진해 있고 담무회는 투전판을 본부 삼고 있는 탓에 영목은 어쩔 수 없이 투전판과 기방을 오가며 매일을 보냈다.
‘시커먼 아재들과 꽃 같은 기생들 틈에 묻혀 지내느라 우리 윤이 도령 얼굴 까먹겠구만.’
요즘 영목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향화각에서 남인혜의 귀와 눈 역할을 하던 일패 기생 하나가 영목에게 연일 괴상한 숙제를 내고 있는 탓이었다. 새 대방으로서 신뢰할지 말지 시험을 하겠다나 뭐라나.
“마지막 숙제요. 창천 물레방앗간 처녀 귀신 잡아 주시오. 윤이 도련님과 함께.”
이날도 그 기생은 영목에게 듣던 중 가장 거지 같은 숙제를 냈다. 부글부글 끓고 있던 영목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생의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다.
“정말? 정말 도련님과 함께 창천 물레방앗간 처녀 귀신 잡으러 갈 거요? 할 수 있겠소?”
“거참. 자기가 시켜 놓고 쓸데없이 말 많네. 나 최영목이야. 처녀 귀신 잡는 게 어렵겠나?”
혀를 차며 기방을 나선 영목은 채신머리없이 팔랑팔랑 저잣거리를 쑤시고 다니다가 투전판으로 굴러 들어갔다. 몇 달 사이에 제법 그럴싸한 조직이 되어 가는 담무회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영목은 다음 날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털레털레 남가로 갔다.
“영목 오라버니!”
하루가 다르게 훌쩍 자라 이젠 제법 처녀 태가 나는 단이 영목을 반기며 달려왔다. 영목은 씩 웃으면서 단에게 손을 흔들었다.
“윤이 도령 만나러 왔는데 단이 아씨가 제일 먼저 반겨 주네. 잘 있었어?”
“네에. 오라버니는 요즘 왜 이리 격조하셨어요?”
아씨 오빠 살리려고 기방과 투전판에서 굴러먹느라 그랬지.
영목은 차마 순진한 아씨에겐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고 빙그레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그나저나, 우리 단이 아씨는 이제 시집가야겠네.”
“네? 아, 아니, 으, 영목 오라버니는 진짜!”
영목을 반기며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던 단이 발칵 성을 내며 저만치 멀리 있는 유모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모의 뒤로 몸을 숨겼다.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단이 유모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모가 제법 매섭게 영목을 노려보았다.
“영목 도련님! 우리 아씨, 이제 돌아오는 생일에 열세 살 되십니다! 시집은 뭔 놈의 시집이에요!”
“어허. 아직 열셋도 안 됐어? 한양에서 제일 키 큰 열세 살 되겠구먼?”
“유모가 저는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꼭 닮았으니 키도 더 많이 클 거랬어요!”
“으음? 내가 아는 윤이 도령은 열세 살 때 아주 앙증맞고 깜찍했는데?”
그러니 단아, 너는 아마 날 닮았을 거야.
영목은 건네고 싶은 말을 삼키며 말없이 곁으로 다가온 윤을 올려다보았다.
“그치, 윤이 도령? 자네 열세 살 땐 쬐끄맸지?”
“예. 제가 자그마할 때에도 최 형은 노름판에서 연일 밤을 지새우셨지요. 오늘처럼.”
노름판이라는 말에 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약간 민망해진 영목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윤의 힐난을 막았다.
“허. 내가 설마 거길 노름하러 갔겠나? 일로 간 걸세, 일.”
“일이라.”
“그래. 요즘 한성 가마꾼들과 파발꾼들을 관리하는 게 내 소일거리지 않나? 발로 벌어먹는 사람들이 죄다 거기 있으니 낸들 별수 있어?”
영목은 윤도 담무회의 일을 알고 있으니 이 정도면 대충 넘어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윤은 물러설 마음이 없는 듯했다.
“금일 꼭두새벽부터 절 찾아온 한량은 조금 다른 얘기를 하던데요. 최 형께서 한판 거하게 따겠다며 투전판에 들러붙어 계신다고.”
“…아.”
“그리고 크게 따시면 그 기념으로 재밌는 일을 벌이실 거라고.”
윤이 소맷자락에서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영목은 윤이 유난히 날카로운 이유를 깨닫고 실없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친구, 이상한 친구로구만. 이따가 해 질 때쯤 저잣거리에 붙이라고 준 걸… 왜 자네에게 전해 줬을꼬.”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영목을 쳐다보던 윤이 다량의 질책을 담아 입을 뗐다.
“그래서, 밤새 거하게 따셨습니까?”
“땄지! 나는 이기는 패에만 걸거든.”
“이기셨으니 이 ‘재밌는 일’도 하실 거고요?”
“물론. 남아일언중천금 아닌가.”
영목은 윤이 책망하듯 들고 흔들던 종이를 빼앗아 쫙 펼쳐 보였다.
[금일 저녁, 최영목과 남가 윤이 도령이 물레방앗간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리라.]
화들짝 놀란 유모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기웃대는 단의 눈을 가리고 영목에게 혀를 찼다. 유모는 오라버니들 곁에서 더 놀겠다는 단을 이끌고 서둘러 별채를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윤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탄했다.
“정말로 이걸 육전 거리 한복판에 갖다 붙이려 하셨다고요?”
“응. 내가 그간 상중이라 너무 얌전히 지냈잖나. 내가 얌전히 지내니 자네도 적적했을 거고.”
“거절하겠습니다. 악명 자자한 물레방앗간 처녀 귀신 잡자고 하시는 수작인 것 다 압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오.”
영목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윤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그가 훌쩍 커 버린 탓에 꽤나 불편한 자세가 되었지만 영목은 개의치 않았다. 윤은 한숨지으며 영목의 팔을 걷어 냈다.
요즘 한성에는 창천 어귀의 물레방앗간에 처녀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본디 물레방앗간은 청춘 남녀들의 밀회 장소로 아주 애용되는 장소였다. 인적 드문 곳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고, 쿵덕거리는 소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창천 물레방앗간에 나타난다는 처녀 귀신은 달포 전쯤부터 스멀스멀 사람들의 입을 탔다. 어찌나 한이 많은지 정분을 나누는 청춘들을 방해하고 사내의 목을 조른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있었다.
사실 윤도 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몰래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처녀 귀신이 물레방앗간을 찾는 연인들을 괴롭힌다는 소문만 파다했지 명확한 피해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만취하여 물레방앗간 근처에서 행패를 부리다 행방이 묘연해진 양 진사 댁 둘째 아들 정도가 다였다.
조금 더 알아보던 윤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거칠게 놀기 좋아하는 연인들이 제 밤일을 부풀리면서 만들어 낸 이야기일 게 뻔하다고.
‘창천 물레방앗간은 백정촌 근처라 인적이 더 드물어. 굳이 가서 추잡스러운 일에 휩쓸릴 필요 없다.’
윤은 고개를 저어 악명 자자한 처녀 귀신을 머릿속에서 흩어 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악명 자자한 영목을 바라보았다.
범산의 호환이 뚝 멎은 뒤로 윤이 도령이 창귀를 달랬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영목은 자신이 윤이 도령을 보필하며 창귀를 때려잡았다며 온갖 곳에 입을 털고 다녔다. 화마 입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제가 먼저 죽는 줄 알았다고 어찌나 엄살을 떨어 댔던지.
영목 때문에 윤이 도령이 귀신을 잡는다는 소문은 더더욱 몸집을 불렸다. 이 무렵 이후로 한성에 귀신 소동 비슷한 것이 벌어지면 다들 영목의 옆구리를 찌르거나 남가의 담장 쪽을 슬그머니 바라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슬쩍 내게 떠보듯이 부탁하는 걸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었건만… 최 형이 처녀 귀신 잡으러 가자며 달려올 줄은.’
윤의 입술에서 깊은 탄식이 새었다. 영목은 넉살 좋게 그의 어깨에 다시 팔을 얹으며 치댔다.
“자네 마음 다 아네. 장소가 하필 물레방앗간이라서 껄끄러운 자네 마음,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걸 아시는 분이 이런 종이를 저잣거리에 갖다 붙일 생각을 하셨습니까?”
“이왕 하는 건 온 동네에 소문을 내고 해야 의심스러워하는 눈길을 안 받는 거야.”
“의심은 무슨 의심이요?”
“뭐긴. 혹시라도 윤이 도령이 최영목에게 잘못 낚여 남색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른다는 의심이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윤이 뻐근해진 목뒤를 주물렀다. 영목은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꾸러미를 내밀었다.
“혹시 몰라 기방에서 치마저고리까지 당당히 얻어 왔다니까! 이 최영목이 한 몸 불살라 여인네처럼 차려입겠다고! 그래서 윤이 도령이랑 물레방앗간 귀신 잡고 오겠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하면서 말이야.”
이번에는 윤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보나마나 판돈 크게 걸고 내기를 하신 게지요? 물레방앗간 처녀 귀신을 잡는다, 못 잡는다로.”
“…거야 물론 했지.”
뻔뻔스러운 대답에 윤의 시름이 더 깊어졌다. 절레절레 고갯짓도 더욱 격해졌다.
정보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 숙제를 꼭 풀어야만 하는 영목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나는 자네 정인이잖나. 남윤은 정인의 부탁도 못 들어주는 사내인가?”
“부탁도 부탁 나름입니다.”
정인이라는 말에 잠시 흔들리는 듯했던 윤이 이내 평정을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영목은 조금 전에 보았던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살살 눈웃음을 치며 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잘 생각해 보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제게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이 아니면 자네 평생 녹의홍상 입은 최영목을 볼 일이 없을 터인데? 입술연지 바르고 치마저고리 걸친 나를 볼 일이 없을 텐데?”
“…….”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