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형님들이 그럴싸한 단체를 만들어 주면 고맙겠다~ 이거지.”
“단체?”
“저기 운종가 육전 시전 상인들은 똘똘 뭉쳐서 목소리 키우잖아. 아재들 같은 가마꾼, 파발꾼, 장돌뱅이들이라고 뭉치지 말란 법 있소?”
“…….”
“버젓이 가게 차린 놈들만 멋들어지게 뭉치라는 법 있나? 우리처럼 발로, 몸뚱이로 먹고사는 놈들끼리도 뭉쳐 봅시다, 좀.”
단도를 꺼내 들었던 사내가 슬그머니 소매 속으로 칼을 감췄다. 꿋꿋하게 자신의 패만 내려다보고 있던 보부상 접장이 영목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영목은 턱 밑에 손을 괴고 한껏 귀여운 척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형님들 단체에 일절 손대지 않을게요. 남가 상단에 한자리 얻을 때 이름만 팔게. 나중에 남가 상단에서 확인차 물어보거들랑 그냥 형님들이 담합한 그 조직의 숨은 대가리가 최영목이다, 이렇게만 얘기해 주면 돼. 응?”
“…….”
도록도록 눈을 굴리며 주판알을 튕기던 사내들이 하나둘 손에 들고 있던 패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제일 나이 많고 제일 머리 잘 돌아가는 보부상 접장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영목은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접장이 손에 쥔 패를 잡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접장은 여전히 입을 떼지 않고 영목의 표정 하나하나를 낱낱이 살폈다. 영목은 어디 마음껏 뜯어보라는 듯이 제 얼굴을 더 앞으로 내밀어 주며 다른 사내들과 눈을 맞췄다.
“아재들, 내가 이름을 생각해 봤는데… 담무회(曇霧會) 어떻소? 우리는 옅은 안개처럼 눈에 띄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멋있네.”
저도 모르게 대꾸한 접장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영목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방실방실 웃으면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치? 접장 아재가 제일 늙었으니 대표 맡으면 딱 되겠다.”
영목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가 슬금 눈치를 살피던 사내들을 쳐다보며 얼른 같이 손뼉을 두드리라고 재촉하자 방 안의 사내들도 못 이기는 척 두툼한 손바닥을 두드렸다.
등 떠밀다시피 담무회를 만든 날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남인혜가 영목에게 은밀히 기별했다. 항상 교월루 앞에서 만났던 여느 때와 달리 이날은 돈의문 밖에서 보자 하기에 영목은 영문도 모르고 날이 지기를 기다렸다.
겨울 해는 유난히 짧았다. 돈의문 근처의 약방에서 괜스레 약사 영감과 노닥대다가 동네 개들을 휘휘 쫓아내다 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사위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밤이 드리우고 성문 닫을 때가 되자 영목은 범산 호랑이를 때려잡겠다 헛소리를 하며 돈의문 밖으로 나섰다. 어둠이 시작되자마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내가 하루 종일 돈의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대방 마님은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어.’
문을 지나가지 않았는데 어찌 문밖에서 만난단 말인가. 영목은 고개를 갸웃대면서 남인혜가 말한 장소로 발을 옮겼다.
범골에서 범산으로 접어드는 입구로부터 비탈길로 이백 보 들어간 산길의 소나무 앞. 말이 좋아 ‘산길’이지 짐승도 이리로는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길이었다.
‘마냥 곱고 가늘가늘한 대방 마님이 이런 곳에 올 수 있을 리가…….’
영목이 생각을 채 끝마치기도 전, 약속한 소나무 앞에서 제비꽃색의 쓰개치마를 두른 여인이 그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나보다 먼저 도착해 계실 수가 있지?’
영목은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찜찜한 얼굴로 인사했다.
“…찾아 계시었습니까.”
“응. 영목이 네게 보여 줄 것이 있어서.”
그 ‘보여 줄 것’이 마치 자신이라는 듯이 남인혜는 턱을 들어 올리고 영목의 앞에 꼿꼿하게 섰다.
“대체 무얼 보여 주시려고 이 야심한 시각에 성문 밖으로 불러내셨답니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기 홀연히 나타나셨어요?”
남인혜는 배시시 눈꼬리를 접으면서 천천히 뒤로 한 걸음씩 걸었다. 영목은 걸음마 연습을 하는 아기처럼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따라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요즘 아주 바빠 보이던데. 끼니는 잘 챙겨 먹니?”
“제가 바쁠 일이 무에 있습니까? 윤이 도령 옆에 붙어서 귀찮게나 굴지.”
“담무회라던가. 이름도 그럴싸하게 잘 지었던데.”
“…….”
물귀신 따라가듯 남인혜를 따라 걷던 영목이 우뚝 발을 멈추었다. 영목은 아직 그 누구에게도 담무회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서서히 구겨지는 영목의 미간을 보면서 남인혜가 소녀처럼 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좋은 선택이다. 담무회를 네 손에 꼭 쥐고 잘 관리하렴. 무엇을 얼마나 먼저 알고 있는지는 꽤 괜찮은 무기가 된단다.”
“…마님이 담무회를 대체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참 쉬운 물음을 어렵게 건네는구나.”
그녀는 다시 뒤로 걸으며 영목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옆으로 길게 구부러진 소나무 한 바퀴를 크게 다 돌았을 때에야 남인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안 감사 김욱진은 등짐꾼들을 천것이라 부르고 홀대하는 모양이다만… 남가 상단 도방은 보부상과 장돌뱅이들에게 팔도 곳곳의 남가 상단 별처를 내어 주었거든. 무거운 짐 내려놓고 푸욱 쉬다 가라고.”
“그런데요?”
“곳간에서 인심 나고, 좋은 잠자리에선 신뢰가 나는 법이지.”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던 영목이 입을 떡 벌렸다.
“와……. 보부상 접장 아재가 윤이 도령 사람이었습니까? 언제부터요? 와. 그 도령, 진짜. 와…….”
눈썹을 늘어뜨렸다가 마른세수를 하는 영목을 보면서 남인혜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네가 담무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윤이가 검계에 큰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검계요? 검계라면… 양반들 다 잡아 죽이겠다고 설치는 미친놈들 모임 아닙니까?”
“맞아. 윤이 말로는 과격한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설칠수록 네가 은밀히 하려는 일이 쉬워질 거라나.”
“참 나…….”
윤이 저를 하도 귀하게 바라보기에, 그 눈길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벌여 선물해 주려고 했건만. 이미 윤은 영목이 뭘 하는지 파악하여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
“담무회 멋지게 키워서 윤이 도령에게 짠, 자랑하려고 했단 말입니다.”
영목이 혀를 차자 남인혜가 싱긋 눈꼬리를 접었다.
“그래서 윤이도 너 모르게 조용히 내조하고 있잖니. 공평하게 너도 윤이가 하는 짓, 모르는 척하렴.”
“공평하긴 뭐가 공평합니까?”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남인혜는 새털같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쿡쿡 흘리면서 뒷짐을 지고 사뿐사뿐 뒤로 걸었다.
“윤이 도령도 도령이지만, 대방 마님은 대체 이 한밤중에 뭐 하시는 겁니까? 장난치는 애들마냥 소나무를 몇 바퀴―”
“두 바퀴 반.”
투덜거리던 영목이 입을 벙긋거렸다. 가로로 길게 기울어진 소나무 가지 아래로 남가 상단의 창고 문과 꼭 닮은 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남인혜는 얼빠진 영목의 표정이 퍽 마음에 드는지 그의 팔을 두드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비형랑께서 사람 흉내를 내며 드물게 한성으로 오실 때에 사용하시는 문이야. 내가 잘 구슬려서 우리 상단과 연결되게 해 두었다.”
잠시 말을 끊은 그녀는 노리개와 함께 매단 남가 상단 대방의 증명 패를 가리켰다.
“이 패를 지닌 사람이 소나무를 뒷걸음질로 두 바퀴 반 돌면 문이 보인단다. 문이 보이니 열 수도 있지.”
남인혜가 무얼 하려는지, 왜 자신을 여기로 불러냈는지 눈치챈 영목이 손을 뒤로 숨겼다. 그녀는 들켰다는 듯이 어깨를 좁히면서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증명 패를 풀어 영목에게 내밀었다. 영목이 고개를 저었다.
“대방의 증명 패를 제게 주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긴. 네가 살아야 우리 윤이도 살 것 아니냐.”
“이상한 소리 마시고 당장 이 문으로, 이 길로 윤이 도령과 도망하세요! 영의정인지 우의정인지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지요? 뭔가 낌새가 있고 뭔가 불안하니 제게 이러시는 게지요?”
남인혜가 빙그레 입술을 늘였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더니. 일평생 서늘하던 남인혜는 죽음을 각오한 날부터 영목의 앞에서 웃음이 늘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영의정, 우의정 가문 고용인들에게 대놓고 시비 털며 막 나가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영목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눈앞에 들이밀어진 금색 증명 패를 밀어냈다.
“차라리 제게 우의정이나 영의정 모가지를 따라고 시키세요. 쉽지는 않겠지만 못 할 것도 없는 짓입니다.”
“얘는. 그치들이 몰래 거느린 사병이 얼마만큼인지 알기나 하니?”
“이래 봬도 세경 마님께서 먹이고 훈련시키신 몸입니다. 장정 몇십쯤이야.”
“장정 몇십쯤이었다면 나도 네게 영감들 모가지나 따 달라고 부탁했으련만.”
우의정이 나라님께서 아시면 안 될 짓들에 여럿 손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는데……. 아무래도 영목의 짐작을 아득히 넘어서는 규모인 모양이었다. 영목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인혜는 다시 그에게 신분 패를 내밀었다.
“영목아. 거절하지 마라. 나는 윤이만큼이나 너도 애틋하다.”
“…….”
“그 패를 가지고 윤이와 도망치렴. 여러 길을 생각해 보았으나… 지금으로서는 너와 윤이가 몸을 피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도인 것 같구나.”
몇 년 전, 연수산으로 가서 숨으라 명령할 때에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뒤를 맡을 테니 꼭꼭 숨으라고. 그때의 영목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주억였지만 오늘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간절히 영목을 탐내는 강자영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안 어르신들을 조르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영목은 김욱진의 양자로 입적될 터였다.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제가 머지않아 김욱진의 양자가 될 겁니다.”
“또 그 이야기니?”
“헛소리가 아닙니다. 제가 우의정 가문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윤이 도령을, 남가를 보호하는 일이 지금보다는 훨씬 쉬워질 거라고요.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게도 계획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자영이는 대가 없이 베푸는 아이가 아닌걸.”
남인혜는 씁쓸히 웃으면서 소나무 아래 나타난 신비로운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문 안쪽이 호랑이 아가리라도 되는 것 같아 영목은 저도 모르게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문을 잡고 선 남인혜가 푸스스 웃으면서 영목의 소매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