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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49화 (49/157)

49화

집을 내어 준 것도, 사용인들을 바꾼 것도 윤이었지만 한성에선 영목의 욕만 자자했다. 제 아비 사고를 핑계로 순진한 윤이 도령에게 들러붙어 한몫 챙긴다나 하면서.

“상 치르는 놈이 윤이 도령 사랑채에 얹혀살면서 신수 훤해졌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흉을 보더만. 하도 욕을 먹어서 백 년은 더 살겠어, 아주.”

권가도, 영목도, 온 한성 사람들도 다 아는 이야기라 부정하기도 어색했다. 권가는 그냥 말을 돌렸다.

“저희 도련님은 대방 마님과 함께 교월루에 올라 계십니다.”

“아……. 오늘이 남가 상단 창고 열리는 날이던가? 인사드리러 왔다가 좋은 구경 하는구만.”

남가 상단은 달에 한 번씩 각 건물의 금고에 모아 둔 돈을 정산한 뒤 건물 한 채 규모의 웅장한 창고에 보관했다. 비형랑이 어렵게 한양까지 몸소 와서 성의껏 만들어 준 남가 상단의 돈 창고는 열쇠도, 자물쇠도 없이 오직 남인혜의 목소리만으로 열리고 닫혔다.

남인혜가 감정도 온도도 없는 싸늘한 음성으로 금고를 열라 명령하면 도깨비 조화처럼 스르륵 문이 열리는 장관. 그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려 창고가 열리는 날만 되면 남가 상단의 담장에는 구경꾼들이 빼곡히 들러붙었다.

‘연수산에서 온갖 기묘한 것들과 함께 자란 내가 보아도 신기한데 한성 사람들 눈에는 오죽 신기하겠어?’

영목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높다란 담장에 온통 구경꾼들이 매달려 있었다.

“오늘따라 담벼락에 구경꾼이 더 많이 매달려 있는 것 같으이?”

“그게… 오늘은 귀한 차(茶)가 들어와 그걸 사겠다는 분들이 상단 마당을 꽉 채우고 계셔서요.”

“아, 저기 청나라 황제가 마신다나 하던 그 차?”

“예에. 겨우겨우 한 수레 공수해 왔습니다.”

권가는 영목과 나란히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남가 상단으로 이어지는 문을 지났다. 영목의 눈길이 현판에 닿았다. 단정하게 쓰인 세 글자가 영목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

[경초재(勁草齋)]

남가의 본채 안마당에서 왼쪽으로 난 쪽문을 지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본디 남가 여인들이 기거하던 별당이었다. 아담하고 호젓하던 별당은 남인혜가 친정으로 쫓겨 돌아온 직후 상단으로 사용하면서 무섭게 부지를 넓혀 갔다. 이제는 새파란 청기와를 얹은 으리으리한 건물만 여덟 채라 더 이상 예전 별당의 모습은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남가와 척을 진 우의정과 영의정은 경초재에 새 건물이 들어설 때마다 상소를 올렸다. 궁궐 아닌 민가는 99칸 이상은 지을 수 없다는 법도를 들먹이면서. 하지만 당상관 남양일은 남가와 남가 상단은 엄연히 별개의 건물이라 주장하며 태연하게 그들의 비난을 비켜 갔다.

세 가문의 기 싸움은 분에 못 이긴 우의정 댁 마님이 석 달을 앓아누우면서 더더욱 입소문을 탔다. 이후로 우의정네 식솔들은 경초재 현판 앞을 지날 때마다 “법도도 모르고 사치만 부리는 중인 놈들!”이라 외치며 침을 뱉곤 했다.

‘대방 마님이 몸 좋은 떡대들을 고용하여 비단옷을 입히고 몽둥이를 들려 경초재 담벼락에 세워 둔 뒤로 침 뱉는 일은 좀 적어졌다지.’

우의정과 영의정 가문이 시비를 걸 때마다 보란 듯 더 화려하게 증축하는 곳. 겁주려는 목적으로 고용된 하인들에게마저 비단옷을 입히는 상단. 경초재는 그 존재 자체로 남인혜의, 남가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늘처럼 경초재의 현판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영목은 항상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세경을 따라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던 그날이 생각나서, 저 같은 사람이 감히 드나들 곳이 아닌 것만 같아서.

“두 분 모두 교월루에 올라 계시니 도련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예서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권가가 모시는 사람들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교월루를 가리켰다. 영목은 남가와 함께 나이 들고 있는 사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날 도둑놈처럼 밤에만 몰래 오다가 이렇게 한낮에 올려다보려니 느낌이 또 다르구만.’

처음엔 아담하게 두 층뿐이었던 교월루는 몇 해 전 한 층을 더 높여 거대한 3층짜리 팔각 누각이 되었다. 남인혜가 집무실처럼 사용하고 있는 드높은 누각의 지붕마다 눈부신 청기와가 새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 호화로운 누각에는 찬 바람을 막기 위한 얇은 비단과 주렴이 겹겹이 둘러져 있었다. 안에 앉은 사람의 얼굴은 미처 보이지 않았다. 훤한 햇빛이 비치어 보인 누각 안쪽의 인영이 사내 하나, 여인 하나인 것으로 보아 오늘은 윤과 남인혜가 마주 보고 앉아 있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창고를 열어라.”

주렴 안쪽에서 남인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창고의 육중한 철문이 끼익대는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렸다. 구경꾼들의 감탄사가 찬 바람에 실려 누각에 드리운 주렴을 흔들었다.

모든 사람이 창고 안쪽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오직 영목만이 홀린 듯 주렴을 쳐다보았다. 남가 상단은 주렴마저도 호화로웠다. 봄과 여름에는 꼭 저희 남가 사람 같은 서늘한 색 옥구슬 주렴을, 가을엔 구슬 한 알 한 알이 모두 붉은 산호로 만들어진 것을, 겨울에는 상아와 진주를 엮은 주렴을 걸었다. 붉게 칠한 대나무 구슬을 사용하는 보통의 주렴을 생각하면 호사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저 주렴은 남가 상단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우의정이 몇 번이나 상소를 올려 더 유명해졌다. 과한 사치를 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당상관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흠잡을 곳 없이 공손한 태도와 목소리로.

-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교월루의 주렴은 소신이 청의 황제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물건이옵니다. 그런 물건을 사치품이라 치부하며 거두어 달라는 상소가 이리 수시로 올라오니… 이 일이 혹여 청에 잘못 와전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심히 두렵사옵니다.

당상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 반복하여 올라오는 상소에 미욱한 신의 마음이 하염없이 무겁사옵니다. 하여, 이번 연행 때에 황제에게 작금의 사태를 숨김없이 고하고 하사받은 물건들을 남김없이 돌려드리려 하나이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큰일 날 소리였다. 조선의 대신들이 청나라 황제의 하사품을 고까워한다고 말하면 황제가 어떻게 진노할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주렴 사태는 결국 상소를 올린 우의정이 주상께 큰 꾸지람을 듣는 우스꽝스러운 꼴로 마무리되었다.

- 앞으로 두 번 다시 남가의 주렴에 대하여 언급하지 말라. 사소한 투기로 불필요하게 짐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어명이 떨어진 이후 사시사철 당당하게 사치스러운 주렴을 내걸고 있는 한성에서 가장 높은 누각. 교월루의 존재 자체가 더 이상 남가가 우의정 가문의 위세에 지지 않는다는 증거인 셈이었다.

‘그래서 위험해. 당상관 어르신은 청의 비호가 있다고 쳐도, 대방 마님은 다르다. 가문이 아니라 대방 마님 혼자 화살받이가 되겠다는 각오는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원망을 자처하는 건 너무 위험해.’

영목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그와 남인혜가 사달이 날 거라 예견한 날로부터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으나 우의정도 영의정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최 역관 하나 죽인 것은 선전 포고 축에도 들지 않을 터인데. 보통 오래 수그리고 있다는 건 더 크게 치겠다는 뜻……. 그래서 더 불안하단 말이지.’

영목은 한숨을 삭이며 수십 명의 일꾼들이 지게로 수북하게 돈을 쌓아 나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촤르르륵, 가벼운 엽전이 묵직하게 쏟아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그 순간이었다.

“이 교만 방자한 것들! 내 이럴 줄 알았다!”

한 남자가 구경하는 인파를 거칠게 밀어젖히며 남가 상단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수시로 남가에 시비 걸 일만 찾아다니는 우의정네 청지기였다.

“이 천박한 것들! 하는 짓이 꼭 이렇지, 꼭!”

그가 다 쉰 목소리로 꽥꽥 소리치며 소동을 피우자 교월루 안쪽에서 남인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가. 거기 있는가? 밖에 무슨 소란인가?”

“마님, 그것이…….”

주렴 안쪽에서 던져진 싸늘한 물음에 권가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찾아온 적막은 우의정네 청지기가 빽 내지른 고함에 산산이 부서졌다.

“너희 남가 놈들이 청나라 황제가 마신다는 보이차(普洱茶)를 들여왔다지?”

“…….”

“남가 상단과 거래하는 다원(茶院)에서 구할 수 있다는데! 이상하게 내가 가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더라고?”

교월루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발끈한 우의정네 청지기가 한층 언성을 높였다.

“내 혹시 모르니 직접 알아보겠다며 들른 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 이렇게 잔뜩 쌓여 있구나!”

문제의 차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남가 상단의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겸인들이 혀를 차며 우의정네 청지기에게 눈을 흘겼다. 영목도 똑같이 혀를 끌끌대면서 고개를 저었다.

‘차 한 덩이 얻겠다고 몇 시진을 기다린 사람들이 한가득이건만. 그 틈을 헤치고 들어와서 차 내놓으라 말하니……. 저러니 우의정 댁이 한성 인심 다 잃은 게지.’

남인혜는 우의정네와 영의정네에서 찾는 물건을 대놓고 아니 팔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영의정이나 우의정 댁에서 구하는 물건들을 구해 주는 상인과 거래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을 뿐.

온갖 사치품과 희귀한 물건들을 다루는 남가 상단과의 연줄을 유지하기 위해 상인들은 두 집안에서 물건을 찾을 때마다 눈치껏 ‘다 팔렸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작년에는 연수산 국화주, 지난봄에는 망건을 장식하는 옥관자, 이번에는 보이차가 그랬다.

‘…양반님네들이야 사치품 자랑하는 재미로 사니 약이 오를 대로 오르긴 했겠네. 번번이 한성 유행에 뒤처지고 있으니 우의정네 청지기가 체면이고 뭐고 없이 남가 상단에 쳐들어올 만도 해.’

영목은 남인혜가 벌이는 시비가 정말 위험하다 생각하면서 재차 고개를 저었다.

한참이나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남가를 모욕하던 청지기가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그의 씩씩대는 숨소리가 잦아들자 교월루 주렴 안쪽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윤아.”

“예.”

“저이가 대체 무엇이 쌓여 있다고 저리 소란을 떨어 대는지 네가 직접 보고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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