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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45화 (45/157)

45화

불란서 의사 선생이 씩 웃으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기대되네요. 서래원에서 제일 볕 좋은 곳에 걸어 두겠습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기대에 부푼 얼굴로 창백한 뺨에 홍조까지 띠며 좋아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이렇게 그려 달라는 듯이 두 손을 모아 쥐고 윤의 앞에서 반듯하게 자세까지 잡아 보였다. 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 저는 시서화에 능한 것이지 인물을 그리는 데에는 자신이―”

“사람이 잘하는 것만 하려 하면 쓰나.”

터무니없는 요구에 기가 찬 윤이 말을 잇지 못하자 민재가 시원스레 껄껄 웃었다.

“쉬이 치르는 값은 재미가 없지. 비형랑 수공비가 그만큼 비싼 거려니 생각하고 열심히 그려 줘.”

영목은 허리에 매달린 칼에 기가 질려서, 윤은 난데없는 그림 숙제에 넋이 나가서 입을 열지 못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걸고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한 뒤 서래원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신부의 등을 쳐다보며 민재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도령. 있잖냐… 재차 말하지만, 지난밤에는 내가 진짜 미안했다. 나잇값도 못 하고 입이 방정이었어.”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더는 괘념치 마십시오.”

“도령 마음 풀릴 때까지 뭐든 해 주고 싶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윤은 미미하게 눈꼬리를 찌푸리면서 영목의 칼을 쳐다보았다.

‘별생각 없이 부탁한 주문이 저런 무시무시한 무기로 돌아왔는데… 무슨 필요를 어떻게 더 말하라는 건지.’

연수산에 더 머물렀다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빚진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윤은 간절하기까지 한 눈으로 영목을 졸랐다. 어떻게든 연수산에서 뭉갤 생각만 잔뜩이던 영목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르신, 우리 윤이 도령이 뭐가 그리 급한지 아까부터 집에 가자고, 가자고 노래를 불러 싸서 이만 가야겠습니다.”

“그래. 저기 범산 이어지는 데까지 지름길 터 놨어. 네 칼로 땅을 쿵쿵 두 번 치면 길이 보일 거다. 조심해서 가라.”

민재는 영목과 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윤이 도령, 이 칼에 도깨비 지름길 말고 또 무슨 희한한 기능이 있을까? 응?”

“…….”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칼인 것 같나?”

죄책감만 가득이던 윤의 얼굴에 약간의 억울함이 더해졌다.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대단한 물건이 만들어질 줄 알고 주문한 것도 아닌데 죄다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말이지 억울했다. 그는 가늘게 뜬 눈 가득 비난을 담은 영목을 쳐다보면서 등 뒤에 놓아두었던 연초 보따리를 그에게 건넸다.

“호 겸인 어르신이 주신 연초잎이랍니다. 그만 흘겨보시고 이 보따리나 챙기십시오.”

“응? 이 많은 연초를 진짜 날 다 줘?”

“이번에 연수산에서 중요한 계약을 하신다 말씀하셨잖습니까. 이 연초라면 최 형이 아무리 허술히 계약하시더라도 손해를 메우고도 남을 터이니 최 형이 가지세요.”

영목이 큼지막한 보따리를 대충 둘러메면서 미간을 좁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바위 위에 정리해 두었던 약초들을 서래원 대문 옆의 멍석에 가지런히 내려 둔 뒤 영목을 향해 돌아섰다.

“뭐야……. 어차피 말아먹을 계약이니 연초잎이나 팔아서 적자 메꾸란 소리야?”

“선후가 틀립니다. 최 형께서 아무리 크게 망해도 이 연초를 팔면 손해는 아닐 터. 그러니 부디 마음 편히 가지시고 마음 가시는 대로 계약에 임하시라는 거지요.”

입술을 삐죽이던 영목이 잠시 숨을 멈췄다.

“내가 무슨 계약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듯하더니… 그사이에 내가 뭔 짓을 해도 괜찮을 방도까지 생각해 줬나?”

“옆집 장사에는 입 대지 않는 게 장사치의 기본 소양 아니겠습니까.”

윤이 눈을 내리깔며 무심한 듯이 옷자락을 털었다. 영목은 무표정 뒤로 감춘 그의 수줍음과 제 어깨에 둘러멘 연초잎과 허리에 묶인 검을 쳐다보면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내 거래가, 내 결심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는데 말이야…….”

영목이 세경과 한 거래는 금전이 오고 가는 거래가 아니라 목숨이 오고 가는 거래였다. 연초잎을 아무리 팔아도 이득과 손해의 균형을 메꾸기 어려운 도박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영목에게는 윤의 이런 착각과 무뚝뚝한 배려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저 마냥 고마웠다. 줄곧 무겁고 갑갑하기만 했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영목은 진심을 담아 활짝 미소 지었다.

“고맙네. 자네 덕에 잘됐다, 잘못됐다가 아니라 어떻게 돼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됐어.”

“최 형께서 연초잎이라도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입니다.”

“연초잎이 아니라 자네 마음 씀이 마음에 드는 거야.”

영목이 윤의 어깨에 턱 하니 팔을 걸쳤다. 손가락 걸고 걷는 것은 해도 어깨동무는 싫은 모양인지, 윤은 그의 팔이 제 어깨에 닿기 직전에 몸을 틀어 거리를 벌렸다. 영목은 피식대며 진심 반, 농담 반으로 윤을 향해 감탄했다.

“우리 윤이 도령은 어떻게 이렇게 내게 필요한 것만 필요한 순간에 딱 건네줄꼬.”

“제가 아끼는 이들은 하나같이 과하게 속 깊은 사람들뿐이라 제가 눈치껏 건네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에 쥐질 않거든요.”

부끄러워하거나 못 들은 체할 줄 알았던 윤의 입에서 묘한 말이 흘러나왔다. 영목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좁히자 윤은 가만히 뒷짐을 지고 단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단아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애가 참 당돌한 듯하지만 제가 아는 여덟 살짜리 중에서 가장 속 깊고 신중한 아이랍니다.”

“…하긴. 아픈 아이들은 빨리 철들지.”

“예. 그래서인지 정말 가지고 싶은 것, 진짜 하고 싶은 것은 꾹꾹 참아요. 덕분에 저는 단아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그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마련해 주는 재주가 생겼답니다.”

“윤이 도령을 눈치 보고 노력하게 만들어서 길들이다니. 단이 아씨도 참 대단해.”

영목이 단을 들먹이며 놀리자 윤은 담담히 본심을 드러냈다.

“어디 단아뿐이겠습니까. 제 눈치와 노력엔 최 형의 지분이 가장 큽니다.”

“갑자기 왜 내 탓이 되나? 나만큼 자네한테 대놓고 이것저것 뜯어 가는 잡놈이 또 어디 있다고.”

영목이 제 목에 두른 비단 목도리를 가리켰다. 윤은 어느 틈에 또 흐트러진 목도리를 정돈해 주면서 다정히 대답했다.

“최 형이야말로 진짜 필요하신 것은 절대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으시니까요. 껄끄러운 일일수록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제가 모르게 처리하려 하시고요.”

“내가?”

“예. 최 형께서요. 그러니 제가 눈치껏 살피고 부단히 노력하여 최 형의 심중을 파악하려 하는 게지요.”

“…뭔. 흰소리하려거든 걸음이나 빨리 걷게. 연수산 떠나기 전에 꼭 인사드려야 할 분이 남아 있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모르는 척 덮으며 영목이 성큼성큼 큰 걸음을 옮겼다. 윤은 접선을 꺼내 들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영목의 보폭에 맞추었다. 둘 사이에서 접선이 느리게 펄럭이며 윤이 좋아하는 알싸한 향기를 흩뿌렸다.

“세경 마님께 인사 올리러 가시는 게지요?”

“응. 스승님 심술에 비하면 서낭신 심통은 아무것도 아니거든. 잠깐이라도 얼굴 비치고 가겠노라 말씀드려야 뒤탈이 없지. 이리 쭉 가면 곧 만날 수 있을 걸세.”

영목이 턱으로 낙엽 쌓인 오솔길을 가리키자 윤이 작게 감탄했다.

“최 형의 눈에는 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이신다더니… 용에게로 가는 길도 보이시나 봅니다.”

“허허. 똘똘한 도령이 가끔 맹한 소리를 하네.”

“…예?”

영목은 검지를 펼쳐 새파란 가을 하늘을 가리켰다. 안개처럼 흩뿌리던 여우비마저도 완전히 멎은 맑은 하늘 여기저기에 가느다란 흰 연기 몇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초 연기일세. 큰 신을 찾을 땐 땅이 아니라 이렇게 하늘을 보면 돼. 이 동네 어르신들은 죄다 뻑뻑 곰방대를 빨아 대니까.”

이마에 손차양을 드리운 윤이 가을 하늘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제일 뚜렷한 연기는 산신, 그다음으로 뚜렷한 연기는 비형랑, 이런 순서로 찾아가는 거지.”

“…아.”

“세경 마님은 꽃밭에서 나는 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연초로 태우시니 연기의 색부터 남달라서 찾기가 더 쉬워.”

영목이 어느 지점을 정확히 가리켰다. 가느다랗게 피어올라 신선의 구름처럼 둥그렇게 말리는 연기 중, 유독 푸르스름한 빛깔이 하나 있었다.

“저 연기가 있는 곳에 세경 마님이 계시다는 말씀이시지요?”

윤이 접선으로 그 연기를 가리키자 영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푸르스름한 구름이 생기고 있는 곳을 향해 얼마나 걸었을까. 키 큰 침엽수 옆에 그 나무만큼이나 꼿꼿하게 선 세경의 모습이 보였다.

“세경 마님, 안녕하셨습니까.”

윤은 깍듯이 인사를 건네며 안녕하지 못하다는 세경의 답을 기다렸다. 세경은 윤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안녕 못 해요.” 하고 쏘아붙인 뒤에 휙 사라지곤 했다. 영목의 마음이 윤에게 기울고 있음을 깨닫자마자 시작된 홀대였기에 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잘 모르겠네. 지금 내 기분이 딱 평소만큼 불쾌한 건지, 평소와 비교도 못 하게 불쾌한 건지… 잘 모르겠어.”

세경이 잔뜩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혀를 두어 번 차고 연초 연기를 훅 뿜은 뒤에 사라지던 여느 때와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도령이 보기엔 어느 쪽인 것 같나요? 내가 이리도 심란한 게 도령 탓일까, 원체 시끄러웠던 속이 도령을 만나 더 불편해진 걸까?”

시험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다분히 강요 어린 그녀의 시선에 당황한 윤은 어색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영목에게 눈짓했다. 영목은 멋쩍게 웃으면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갑자기 세경이 발을 쿵 구르며 인상을 구겼다.

“왜 잘 어울리고 난리야?”

“…예?”

“그냥 사이좋아 보이는 것도 짜증 났는데 도령 키가 훤칠해지니 이젠 서로 잘 어울려 보이기까지 해서 더 짜증이 난다고요.”

둘을 흘겨보며 세경이 미간을 더 깊이 구겼다.

“하여튼 간에. 정도껏 곱상해야 모르는 척을 하지……. 나는 뽀얗고 연약하고 착한 애들에게 너무 약하다니까.”

윤으로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세경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에게 휙 집어 던졌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펼쳐 날아오는 것을 받아 낸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엇입니까?”

“호두잖아요. 별별 희귀한 것을 다 접하는 상단의 후계자라면서 호두 처음 보나요?”

“…….”

세경이 윤의 얼굴에 연초 연기를 훅 뿜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손부채질을 하며 콜록대자 그녀는 들으라는 듯 크게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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