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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44화 (44/157)

44화

“아이구. 비형랑께서 어찌 여길 오셨습니까? 술이랑 잔치라면 죽고 못 사시는 양반이?”

“으음, 내가 잔치도, 술도 좋아하는 건 맞는데… 좋아하는 짓을 하느라 염치없이 굴 정도로 덜된 놈은 아니라우.”

민재는 불란서 의사 선생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옷소매를 힘차게 휘익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큼지막한 면포 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거. 호우준이 전해 달라고 한 연초잎.”

그는 거진 이불 보따리만 한 부피의 주머니를 윤의 허벅지 위에 턱 올리고 손을 탁탁 털었다.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알싸하게 풍기는 냄새만 맡아도 쉽게 볼 수 없는 최고급 연초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 많이 주셨습니까?”

“사업이든, 연애든… 도령 말 들으면 실패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진즉에 많이 준비해 두었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민재가 서래원 쪽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샛초록 도깨비불이 거센 속도로 쭉 뻗어 나갔다. 도깨비불은 서래원의 대문 안쪽에서 드글대는 망령들에게로 곧장 달려들었다. 한여름 풀 색의 불꽃이 야무지게 망령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어휴. 땅 주인이 오시니 이제야 허리 좀 펴겠네요.”

신부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는 얼굴로 어깨에서 힘을 빼고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윤의 시선이 화려하게 날뛰는 도깨비불에서 창백한 신부의 얼굴을 지나 싱글싱글 웃는 민재에게서 멎었다. 머리에 쓴 말총 흑립부터 발에 신은 태사혜까지― 흠잡을 곳 없이 차려입은 풍채 좋은 청년이 담담히 그의 시선을 받았다.

“있잖어, 도령. 내가 입 잘못 놀린 거… 그거 너무 맘 상해 하지 말어. 내가 생각이 없어 그러지, 악의가 있어 그런 건 아니야.”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건 비형랑께 이리 과한 사과를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알지. 도령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내가 미안해하고 또 미안해하는 거구.”

문턱 너머에서 물동이와 쪽박을 정리하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윤의 눈이 보일 듯 말 듯 가늘어졌다.

‘저 신부… 비형랑과 내가 단둘이 이야기할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최 형을 서낭신에게 보낸 거였어.’

의원 일과 괴담 기록 말고는 매사에 무르고 피곤해하기만 하는 사내라 생각했건만. 판을 안배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윤은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민재가 건넨 연초 보따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호 겸인 어르신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래. 염치없지만 우리 영목이 잘 부탁한다.”

갑자기 영목의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윤은 약간 당황했다. 딱히 숨길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손을 잡고 걷던 것이 벌써 소문이 났나 싶어 귓가에 열이 올랐다. 연초 보따리를 등 뒤로 밀어 놓으며 귓가를 문지르는 윤의 모습에 민재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애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잖어. 영목이는 이 연수산의 온 신들이 다 살피고 다 키운 아이야. 그렇게 저만 모르게 귀애받으며 크다가 갑자기 한양에 적응하려면 걔가 적잖이 힘들 거거든.”

윤은 영목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삭였다. 한성에서 나고 자란 자신보다 영목 쪽이 훨씬 한양 토박이 같았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영목은 그곳이 제집인 양 활개를 쳤다. 어디에 있든 쉽게 어울리지도, 적응하지도 못하고 겉도는 쪽은 항상 저였다.

“알았지? 영목이 걔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한양살이가 적잖이 힘들 거야.”

윤은 또 한 번 탄식을 삭였다. 힘든 것으로 치면 영목이 심심할 때마다 두들겨 패고 다니는 한성 잡배들 쪽이 제일이었다.

윤의 얼굴이 미약한 시름에 잠기자 민재가 느슨한 얼굴로 허허 웃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한양에서 우리 영목이가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도령처럼 생각 깊고 곧은 친구가 생겨서 참 다행이야.”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윤은 영목과 만나 다행인 쪽은 저 자신이라 생각했다. 이런 치하는 자신을 항상 든든하게 지켜 주는 영목의 차지여야 마땅했다.

민재는 고개를 젓는 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거듭 칭찬했다.

“우리 영목이랑 다르게 말도 참 참하게 한다, 도령은.”

민재가 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순간, 저만치에서 날듯이 달려온 영목이 윤의 어깨에서 민재의 손을 떼어 냈다.

“아이구, 우리 윤이 도령 가녀린 어깨 부서집니다!”

“뭐래냐. 이제 도령 어깨가 너보다 훨씬 넓고 단단하구만.”

영목이 제 어깨를 내려다보며 입을 삐죽였다. 민재는 키득대면서 턱으로 서낭신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서낭신은 잘 달래 줬냐? 어제부터 도령이 또 연수산에 왔다고 잔뜩 골이 나 있더만.”

“당산나무 나뭇가지에 색깔 천 좀 달아 드리고 나무 밑에 돌탑 몇 개 쌓고 엽전 몇 개 올려 기도 좀 드렸더니 싱글벙글하세요.”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손을 얹은 영목이 턱을 치켜올렸다. 민재는 잘난 체하는 영목과 저 멀리에서 너울대고 있을 서낭목 쪽을 쳐다보면서 실없이 웃었다.

“그 양반도 참 얄팍하다니까. 인간이 제사만 지내 주면 그저 좋아 가지고.”

“제사 싫어하시는 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그런데……. 아, 까먹을 뻔했다!”

민재가 눈을 끔뻑이면서 소매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허공에서 새카맣고 기다란 무언가가 나타났다. 툭 떨어지는 물건을 반대쪽 손으로 요령 좋게 잡아챈 그가 윤을 보며 씩 웃었다.

“이거. 도령이 부탁했던 거.”

“벌써 다 만드셨습니까?”

윤과 영목의 시선이 민재의 손에 못 박혔다.

민재가 허공에서 꺼낸 것은 멋들어진 환도였다. 검푸른 빛이 도는 철갑상어의 가죽이 검집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칼집의 입구와 끝, 중앙의 고리는 섬세하게 두드려 편 금속에 황금을 입혀 반짝반짝 빛났고, 끈목 중앙을 장식한 띳돈의 표면 또한 금박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허리춤에 칼을 매달 때 쓰는 게 전부인 끈목마저 매끈하게 무두질해 단단하게 땋은 소가죽이었다. 면면이 뜯어보면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으면서 언뜻 보면 진중해 보이는 것이 꼭 윤을 닮은 칼이었다.

윤은 영목을 바라보며 그 칼을 가리켰다.

“최 형 드리려고 주문한 것입니다. 받으십시오.”

영목은 질린 눈으로 검을 쥔 비형랑과 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윤이 도령이 어르신께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고요?”

“어. 네가 매달고 다니는 칼이 영 마음에 안 찬대.”

물동이를 정리한 불란서 의사 선생이 뒷짐을 지고 다가와 은은한 먹색으로 빛나는 칼을 구경했다.

“오. 서해 용왕 아들이 가져다준 철갑상어 가죽이네요? 멋집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감탄을 흘릴수록 영목의 이마는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던 영목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며 윤을 흘겼다.

“자네는 돈 쓸 곳이 그렇게 없나? 기껏해야 노름판, 기생집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나 같은 놈한테 이런 칼이 말이나 돼?”

“에라이, 이놈아. 선물을 받으면 ‘고맙습니다’ 하라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비형랑이 영목의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그의 손에 칼자루를 쥐여 주었다. 윤은 여상히 고개를 주억이면서 영목을 달랬다.

“창귀 때려잡는 수고에 비하면 수행비가 짜다며 매번 투덜거리시기에 준비해 보았습니다. 부디 최 형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영목은 대답 대신 칼집에서 환도를 꺼내 들었다. 스르릉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모습을 드러낸 칼날은 은색이 아니라 검집과 똑같은 색으로 새카맣게 빛나고 있었다. 겨우 평정을 찾는가 싶던 영목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어르신… 환도를 대체 뭘로 만드신 겁니까?”

“용 비늘.”

상상도 못 한 답변이었다. 영목과 윤이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묵이랑 서해 용왕 아들이랑 쌈박질할 때 걔들 비늘 떨어진 걸 주워 뒀거든. 문세경이 것도 몇 개 섞었구.”

“비늘 수집은 저도 좀 도왔답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꽤나 뿌듯해하는 얼굴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비형랑 어르신이야 워낙에 철딱서니 없이 요상한 걸 만들어 내는 분이라 치고… 의원 나리까지 장단을 맞추시면 어쩝니까! 말리셔야죠!”

“왜 말립니까? 도깨비가 용 비늘로 칼을 만들면 얼마나 대단한 칼이 나올지, 내가 제일 궁금했는데요?”

“그래! 용 비늘을 이렇게 멋들어지게 주무를 수 있는 장인은 이 세상에 나뿐일걸?”

주무르고 말고를 떠나, 용 비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장인부터 흔치가 않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환도를 요리조리 훑어보는 불란서 의사 선생과 마냥 뿌듯해하는 비형랑을 쳐다보면서 윤은 입술을 뗐다가 입술을 깨물기만 반복했다. 영목이 쓸 칼을 만들어 달라 주문한 윤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주문 때문에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무시무시한 무기가 생겨난 것만 같았다.

윤이 입술을 벙긋거리는 이유를 엉뚱하게 해석한 민재가 손을 휘휘 저으며 화통하게 웃었다.

“에이. 고민하지 마, 도령. 계산은 됐어.”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나야말로 예전부터 영목이 저놈이 그지 같은 쇳덩어리를 칼이랍시고 매달고 다니는 게 아주 꼴 보기 싫었단 말이지. 도령이 때마침 그런 주문을 해 줘서 신나게 만들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가져가.”

영목이 윤을 째려보자 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민재가 영목의 허리에 제가 만든 칼을 솜씨 좋게 매달며 입을 뗐다.

“도령이 정 그렇게 삯을 치르고 싶으면… 나 그림 하나만 그려 주라.”

“어떤 그림을 그려 드리면 되겠습니까?”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시에 민재가 자신이 그린 난초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정성껏 난초를 쳐서 남가 상단에 있는 제일 좋은 비단에 표구하여 선물드려야겠다.’

윤이 이런 생각으로 빚진 듯 무거운 가슴을 한숨에 실어 내보내고 있을 때, 민재는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주문을 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랑 서낭신이랑 수문 대감을 한가운데 넣어서 이 동네의 이 사람, 저 사람을 다 그려 주라.”

“…사람을요?”

“응. 서산 대신 혼례 기념으로다가.”

“…….”

“서래원 사람들이 서산 대신 혼례에 못 끼었으니까 이 사람들을 한가운데 넣어서 그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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