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저기 범산에 이무기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백사 님이요.”
“아아, 맞아! 그 양반이 연수산으로 유학을 오고 싶다며 우리 윤이 도령 옆구리를 쿡쿡 찔렀었지.”
영목이 능청스럽게 윤에게 맞장구를 쳤다. 턱을 쓰다듬던 수문 대감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백사가 이 동네로 오고 싶대? 아니, 여기 뭐 배울 게 있다고? 아… 문세경한테 용이 되면 뭐 해야 하는지 예습하러 온대니?”
“그게… 세경 마님이 아니라…….”
영목이 길게 말꼬리를 늘였다. 그제야 영목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깨달은 수문 대감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백사 걔도 참 이상한 애다. 이 집 서양 이무기한테 배울 거라곤 남 속 긁는 기술 정도일 텐데.”
“수문 대감… 우리 미하는 이무기가 아니라 어엿하게 다 큰 용이에요.”
“흥. 누가 생긴 것 보고 그런답니까? 심술보가 딱 미운 일곱 살 심술보잖소?”
“…….”
“아직 으른 되려면 한참 멀었다 싶어 다들 서양 이무기라 부르는 게지.”
불란서 의사 선생은 양심상 항변할 수가 없어 입을 꾹 닫고 다시 물만 죽죽 끼얹어 댔다. 픽 코웃음을 친 수문 대감이 턱을 괴며 윤을 향해 돌아앉았다.
“도령은 새초롬히 낯가리고 만날 그늘 찾아 앉아 있으면서 은근히 발이 넓네?”
“장사치에겐 인맥과 친분이 절반인걸요.”
윤이 태연히 대꾸하며 약재를 손에 쥐었다.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을 쳐다보며 영목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 윤이 도령이 일을 너무 잘해서 미치겠구만……. 못 풀 숙제를 안겨서 연수산에 붙잡아 두려 했더니 안 해결해도 될 이무기 유학까지 척척 해결해 주고 앉았어!’
울고 싶은 기분으로 비소하면서 영목은 괜스레 윤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휙 빼앗았다.
“최 형은 왜 갑자기 심술이십니까?”
“심술은. 윤이 도령 고운 손으로 할 짓이 아니다 싶어서 내가 하겠다는데, 왜.”
윤이 기막혀하는 사이 수문 대감과 불란서 의사 선생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문턱에 걸터앉아 있던 수문 대감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럼 번거롭지만 내 얼른 범산으로 가서 백사를 데리고 오겠소. 의사 선생은 여기서 잡귀들에게 소금물이나 끼얹고 있으시게.”
“소금물이 아니라 성수라니까…….”
불란서 의사 선생이 불만스레 항변했지만 수문 대감은 들은 척도 않고 뒷짐을 진 채 휘적휘적 멀어졌다. 본디 가택신은 그 집을 비우면 안 되는 법이었으나… 어차피 일 년 내내 문을 활짝 열고 사는 서래원에서 문단속을 관장하는 수문 대감이 할 일 따위는 딱히 없었다.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다녀오세요.”
불란서 의사 선생은 성수 취급이 영 박한 게 억울한 듯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맨날 잔소리만 하게 두느니 옆 산으로 마실이나 보내는 편이 훨씬 낫다 싶은 표정이었다.
‘시어미 여행 보내는 며느리 같은 얼굴이네.’
수문 대감의 뒤통수에 “다녀오십쇼!” 하고 인사한 영목이 짓궂게 씩 웃었다.
“수문 대감 어르신도 귀여우시다니까요. 범산 산군 보러 가신다고 솔직히 말하셔도 되는데.”
“모르는 척해 주어요. 수문 대감은 당신께서 외사랑 하시는 걸 아무도 모르는 줄 아시니까.”
연수산 범산 할 것 없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정분을 산군과 수문 대감 본인들만 몰랐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시원스레 물을 흩뿌리면서 사람 좋게 허허 웃었다. 보는 사람도 따라 웃게 만드는 시원한 미소라 영목도 빙그레 입꼬리를 늘였다.
“서산 대신 혼사는 잘 끝났나요?”
그의 물음에 영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서양 창귀를 초대하면 그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나 하면서 좀처럼 남의 집 문턱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고집스레 서래원에 가두고 있었다.
‘내 눈엔 사시사철 피로해 뵈는 저 양인보다 온 사방에 번쩍번쩍 나타나는 서양 용이 훨씬 해로워 보이는데 말이지…….’
영목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연수산에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싶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의 의사를 존중할 뿐이었다.
물바가지를 휘두르면서 불란서 의사 선생은 구석 응달에 놓인 커다란 항아리 하나를 가리켰다.
“서산 대신께서 지나는 길에라도 들러 주시면 직접 축하드리려고 좋은 술을 담갔답니다. 입에 맞으셔야 할 텐데.”
“아이고. 술 얘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신랑이고 신부고 어찌나 말술을 마셔 대는지 계속 있다간 저도 술독에 빠질 것 같아 도망 나온 참입니다.”
영목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바위 위에 쌓인 약재들을 쳐다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약재를 더 준비해 둬야 하나.”
“예에. 아주 많이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도 때도 없이 연초 피워 대, 하루가 멀다 하고 술 마실 핑계 찾아……. 이 나라 신들만큼 몸에 안 좋은 짓 하며 놀기 좋아하는 신들도 드물다니까요.”
“몸에 안 좋은 짓 해도 자기들은 마냥 건강하니 그러는 게지요. 분위기 타서 어울려 노는 인간들만 숙취에 죽어나지.”
불란서 의사 선생과 영목이 서로의 말에 격렬히 동의했으나, 윤이 보기에는 불란서 의사 선생이나 영목도 남 말 할 처지들은 아니었다.
‘밤낮 한성의 온 뒷골목을 헤집으며 술 마시고 노름하고 싸움질하는 최 형은 말할 것도 없고…….’
윤의 눈이 불란서 의사 선생을 향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툭 치면 과로로 혼절할 것 같은걸.’
창백한 낯의 저 양인은 낮밤 없이 약을 만들고, 환자를 치료하고, 뭔가를 기록했다. 말이 좋아 흡혈귀지 피를 탐하거나 갈증에 시달리는 모습 따위는 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나 저쪽이나 건강 챙겨 가며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할 일을 대충 다 끝냈으니 서래원에서 조용히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온 것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서래원도 마냥 이롭고 조용한 곳은 못 되는군.’
제대로 쉴 수 없다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 윤은 자신의 수고와 체력과 이번 연수산행을 저울에 올려 득실을 셈하며 손을 탁탁 털었다.
“약초 정리는 다 하였습니다. 서래원의 출입이 어렵다 하시니 저희는 그럼 이만 한양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단호한 윤의 선언에 영목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윤을 이 연수산에 안전히 붙잡아 두어야 하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쓸 만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영목이 미적미적 옷자락을 꼼지락대자 윤이 스윽 눈을 내리깔고 그를 재촉했다.
“가시지요, 최 형.”
“무에 그리 급해. 아무리 그래도 서릿재 어르신이나 다른 분들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 하지 않겠나?”
“지금쯤이면 다들 인사불성으로 취해 계실 터인데요. 인사는 다음 달쯤 연수산에 올 때에 맑은 정신으로 나눔이 낫지 싶습니다.”
“집에 꿀 발라 두었나? 놀며 쉬며 가지, 좀.”
영목은 구시렁대면서 적당한 핑곗거리를 맹렬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양을 떠나온 지 이제 고작 사흘. 영의정이든 우의정이든 무슨 일을 벌였다면 지금쯤 한창 남가 상단을 신나게 뒤집고 있을 터였다.
‘지금 윤이 도령이 한성으로 돌아가면 혼자 다 짊어지고 죽으리라는 대방 마님의 각오가 무의미해져. 영의정네가 마님의 목숨 하나로 화풀이를 끝낼 때까지는 윤이 도령이 연수산에 숨어 있어야 하는데.’
영목은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문턱 너머의 불란서 의사 선생을 쳐다보았다. 영목을 가만히 마주 보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문득 작은 탄성을 뱉으며 서래원 뒷마당을 가리켰다.
“아, 영목. 내가 깜빡했네요. 떠나기 전에 후원으로 가서 서낭신께 인사 좀 해 주겠어요? 여길 지키시느라 서산 대신 혼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면서 아주 심통이 나 계시답니다.”
“아이고! 서낭신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내 정신 좀 보라지.”
더없이 좋은 핑계가 생겼다 싶은 영목이 무릎을 치면서 윤을 돌아보았다.
“자네 여기 잠시 기다리고 있게. 내 얼른 서낭신을 뵙고 적당히 핑계 대며 달래 드리고 오겠네.”
“그러십시오.”
영목이 손에 들고 있던 약재 나뭇가지를 휘휘 휘두르며 서래원 담장을 빙 둘러 멀어졌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영목을 눈으로 배웅하다가 윤을 바라보며 푸스스 미소 지었다.
“이상한 동네와 얽혀 도령이 고생이네요.”
“고생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윤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며 서래원의 현판을 눈에 담았다.
서래원은 땅 주인인 민재마저 손을 놓은 도깨비 터였다. 수문 대감의 말대로라면 터 기운이 세다 못해 온 세상 악의를 다 빨아들이는 땅이었다.
‘억센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해 비형랑이 손수 서낭당을 세우고 서낭신이 깃들 당산나무를 심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디 생겨 먹기가 글러 먹은 곳이라 서낭신은 터의 안정을 위해 좀처럼 서래원을 비우지 못했다. 괜한 곳에 발목 묶였다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서낭신의 불만은 엉뚱하게도 윤을 향했다.
- 남가 상단이 조선 팔도 천주쟁이들을 연수산으로 다 끌어 들이는 바람에 서낭목의 신력이 줄어드는 거야!
천주쟁이들이 연수산에 들어온 뒤로 나뭇가지에 오방색지 묶어 가며 소원 비는 사람이 줄었다나 뭐라나. 이런 핑계로 서낭신은 윤을 유난히 싫어했다.
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영목이 멀어진 발자취를 더듬었다. 그의 시선이 저 뒤쪽 어딘가로 향하자 불란서 의사 선생이 물바가지를 찰박대면서 윤을 달랬다.
“바라는 것 많은 산골 사람들에, 궁금한 것 많은 도깨비에, 도령이 보이기만 하면 심술보를 부풀리는 서낭신에……. 어찌 고생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로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윤은 입을 다물고 마른 약초 가지만 탁탁 두드려 정돈했다. 불란서 의사 선생도 더 이상 입을 떼지 않고 버글대는 악귀들에게 물 끼얹는 일에만 열중했다.
“에구. 나는 궁금한 것 많고 눈치 없는 도깨비라 적당히 끼어들 기회를 놓쳐 버렸으니 그냥 대충 앉아야겄다.”
언제 와 있었는지, 민재가 목덜미를 벅벅 문지르며 윤의 맞은편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마당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항아리로 성수를 보충하러 갔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재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