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달칵, 창호 문이 닫히자 윤이 그 앞을 막아섰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했다. 영목은 지체 없이 민재의 방 문을 벌컥 열었다.
“어허. 이 인간 못 배운 것 보게?”
영목의 등 뒤에서 묵이 핀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세경이 안 가르쳤나? 도깨비가 아무리 어린것들을 오냐오냐해도 집주인 방 문을 그렇게 함부로 여는 건 예의가 아닌데.”
“예의고 나발이고, 민재 어르신이 이 장롱에 분명 뭔가를 해 두셨을 거거든요.”
“아. 그럼 열어 봐야지.”
예의를 운운하던 서양 용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영목의 곁으로 다가와 민재의 장롱을 들여다보았다.
‘비형랑은 청사초롱 대신 도깨비불 이끌고 간다며 들떠 있었지. 비형랑의 성격으로 보아 분명 밤새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을 터.’
영목의 짐작대로 장롱 안엔 새파란 사모관대(紗帽冠帶)와 새빨간 활의(闊衣)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반신반의하던 묵이 다시 보았다는 듯이 영목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름이… 영목이라 했나.”
“잘 아시면서 무얼 모르는 듯이 물으십니까?”
“입때까진 별 대단할 것 없이 그저 귀신[靈] 보는 눈[目]이라서 영목(靈目)인가 하였거든. 오늘 새삼 다시 보여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예에…….”
“장롱에 이런 게 있을 줄 어떻게 알았답니까?”
신기하다는 듯 묻는 묵을 향해 영목이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체를 했다.
“비형랑 어르신은 사람 많이 모이는 잔치를 좋아하시잖습니까. 서산 대신도 좋아하시고요.”
“그래서?”
“그래서 그 어르신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의 경삿날을 대비하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신이 나서 정성껏 준비하셨으리라 짐작했고, 보시다시피 제 짐작이 맞았네요.”
묵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흠. 문세경이 맨날 하나뿐인 제자가 몸은 좋아도 머리가 영 아니라고 한탄하길래 얼마나 바보인가 하였더니. 머리 굴리는 것도 제법 괜찮은데?”
영목이 홀릴 듯이 웃는 서양 영물의 표정을 흉내 내며 답했다.
“아유, 나으리도요. 불란서 의사 선생께서 나으리를 두고 얼굴만 그럴싸하지 도통 남 좋은 소리 할 줄을 몰라 걱정이라고 한탄하시던데. 오늘 보니 칭찬도 제법 할 줄 아시네요.”
영목과 묵이 마주 보고 빙그레 눈꼬리를 접었다.
“실례.”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윤이 하등 쓸모없는 신경전을 이어 가는 둘의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영목과 묵이 엇, 하며 거리를 벌린 틈에 윤은 거침없이 옷장에서 사모관대를 꺼내 들었다.
“두 분, 눈싸움하실 정도로 한가하시거든 마당에 장대 세우고 기름 먹인 종이 널어서 차양이라도 치시지요. 비형랑께서 서산 대신 모시고 오기 전에. 빨리요.”
찬바람 부는 말투로 이렇게 툭 말을 던진 그는 사모관대를 곱게 챙겨 들고 쌩하니 몸을 돌렸다.
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영목은 머쓱하게 귓가를 긁적이며 비 쏟아지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비를 쳐다보던 그는 대청마루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기둥에 느슨히 기대선 묵을 불렀다.
“나으리도 구경하지만 마시고 좀 도와주십시오.”
묵이 제 손을 들어 보였다.
“잡일하기엔 너무 귀한 손 같지 않나요?”
“글쎄요. 우리 윤이 도령 손이 더 고운 것 같은데?”
세상에 저보다 더 고운 것이 있을 리 없다는 듯, 살포시 웃어 보인 묵이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영목은 똑같이 고개를 저어 보인 뒤에 더 이상 그에게 미련 두지 않고 빠르게 임시 차양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멋 부리기 좋아하는 비형랑은 햇빛 가리는 용도의 차양은 새하얀 아마포를, 빗물 가리는 용도의 차양은 겹겹이 덧바르고 또 덧발라 기름을 먹인 미색 한지를 사용했다. 영목은 바삐 움직이며 엷은 미색의 기름종이 아래 아마포를 겹쳐 빗줄기를 가렸다.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 쏟아져 우중충한 하늘이 맑은 미색으로 덮이자 그럴싸한 잔칫집 분위기가 났다.
이 정도면 대충 빗물 막고 혼례 치를 정도는 되었다 싶게 제법 운치 있는 모양새가 되었을 즈음― 대문 밖에서 샛초록 불빛이 너울댔다.
도깨비불의 형상으로 날아들어 오던 민재는 간데없이 사라진 대문 앞에서 깊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영목아… 우리 집 문짝 어디 갔냐.”
“무기 나으리가 날려 버렸습니다.”
“어휴, 무기 저놈 저거.”
일러바친 영목과 짜증 내는 도깨비불이 저를 흘기자 묵은 더 곱게 미소 지어 화답했다.
“저 싸가지 없는 서양 용 놈이랑 뭔 말을 하겄냐, 내가.”
짜증을 토하며 문턱을 넘어 들어오자마자 민재는 깊이 허리 숙여 공수했다. 뒤이어 줄줄이 땅에 내려앉은 도깨비불도 모두 민재처럼 번듯하게 차려입은 장정의 모습으로 변했다. 민재를 시작으로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장정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섰다.
훤칠한 도깨비들이 허리를 숙이고 선 길 사이. 위압감 넘치는 여인이 뿌연 담배 연기를 뿜으며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이 연수산의 주인이자 밤새 산이 우릉우릉 울도록 비를 퍼부은 장본인, 서산 대신이었다.
“우리 민재가 이 아침부터 이 요란을 떨면서 날 데려온 이유가 뭘까.”
쭉 뻗은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형형한 안광, 고집스럽게 각진 턱. 기세 좋은 인상도 인상이지만 여인이 담배 연기에 실어 내뿜는 기운이야말로 매서움을 넘어 흉흉할 정도였다.
‘가뜩이나 대하기 어려운 서산 대신께서 화까지 나 계시니 더 무섭네.’
영목은 침음을 삼키며 민재처럼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른 아침부터 심기 불편한 사람 불러 놓고 허리만 숙이고 있으면 재미없지. 물론 어린것이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있어도 재미없지만.”
이건 또 무슨 타박인가 싶어 흘끗 곁눈질하는 영목의 시야에 윤의 모습이 들어왔다. 윤은 이 와중에 홀로 꼿꼿하게 호우준이 들어 있는 방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문지기처럼.
“제일 어린 인간이 저리 뻣뻣한데 나이 든 것들이 고개 숙일 필요 있나.”
서산 대신이 이기죽대는 말투에 ‘쓸데없는 예의 그만 차리고 고개를 들라’는 명령을 실어 흘렸다.
다들 숙였던 낯을 들어 올렸을 때, 서산 대신은 이미 윤의 앞에 서서 흰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도령.”
“연수산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내가 이 산의 주인인 걸 그리 잘 알면서 퍽 과하게 무례한걸.”
“송구합니다. 이 안에 제게 신변을 의탁하신 의뢰인이 계셔서요. 부득이하게 그분을 최우선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보아주시지요.”
서산 대신의 입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녀는 섬세하게 세공된 새카만 곰방대를 깊이 빨았다가 새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남가 상단에 신변을 의뢰하였다는 그이가… 설마 내 반려인가?”
윤은 대답 대신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산 대신을 곧게 바라보기만 했다. 침착한 모습에 괜히 부아가 치민 서산 대신이 윤의 등 뒤, 창호 문 너머에 있을 호우준을 향해 빈정거렸다.
“내 정인도 참 귀엽지 않은가? 되도 않는 핑계를 대고 범산으로 도망쳤다 헛소문을 내더니… 고작 민재네 집에 숨어 어린 도령을 문지기로 세우고 있을 줄은.”
“아니에요. 잘못 찍으셨습니다. 호 겸인은 제가 데려왔어요.”
묵이 생글거리는 낯으로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범산 온천 동굴에 숨어 있는 걸 제가 조금 전에 데려왔지요.”
서산 대신이 한쪽 눈썹을 쭉 끌어 올렸다. 예쁜 것에 약한 서산 대신은 묵에게 유난히 너그러웠으나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영목이 얼른 민재에게 눈짓했다. 지금 서산 대신은 크게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성질 긁는 서양 용의 존재는 하등 이로울 게 없었다.
영목이 무얼 원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챈 민재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묵이 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앗 하는 사이에 민재는 제 등과 벽 사이에 묵을 끼고 꾸욱 누르고 있었다. 서산 대신과 거리를 벌리고 접근을 차단하기 참 좋은 처분이었다.
엉겁결에 당한 묵이 질색했다.
“으, 이렇게 누구랑 닿기 싫거든요? 징그럽고.”
“나도 지금 너만큼이나 싫고 징그러우니까 가만있어.”
서산 대신은 벽에 대고 누르고 눌리며 서로를 비난하는 두 청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닫힌 문 앞에 꼿꼿하게 서서 신경질적으로 연기만 뿜어 댈 뿐이었다. 팽팽한 대치 끝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 있던 윤이 입을 뗐다.
“저희 의뢰인께서 지금 빗물에 젖은 몸을 녹이고 계신 까닭에 객을 맞이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허.”
“객께서는 대청에 오르시어 잠시 다과라도 즐기심이 어떠실는지요?”
그녀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윤에게 곰방대를 까딱여 비키라 명령했다. 윤은 등으로 문을 막아서며 불란서 의사 선생을 들먹였다.
“불란서 의사 선생께서는 제 의뢰인이 안정과 휴식을 취하여야 한다 몇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하여 범산 온천 동굴로 조용히 요양하러 간 것이었는데―”
“그런데?”
윤은 대답 대신 민재의 등 뒤에 눌려 있는 묵을 쳐다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그 시선 한 번에 더 많은 설명이 담겨 있었다. 서산 대신이 대번에 도끼눈을 뜨며 묵을 흘겼다.
“무기 너, 내 반려에게 무얼 한 게냐?”
“요양 중이신 호 겸인 어르신을 데려와 이 빗속에 내동댕이치셨습니다.”
묵이 대답하기도 전에 영목이 잽싸게 고자질했다. 서산 대신의 눈초리가 더 매서워졌다.
“무기야, 아니라고 할 수 있니?”
묵은 답하지 못하고 곱게 웃을 뿐이었다. 용은 거짓말을 입에 담을 수 없는 종족이었기에.
“방글거리는 걸 보니 네놈이 내 정인을 내던져 굴린 게 맞긴 하는구나.”
“던지기만 하셨고 굴리지는 않으셨대요.”
영목이 또 말참견을 했다. 묵은 두고 보자는 듯이 영목을 향해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산 대신의 노기가 윤에게서 묵으로 대상을 바꾸었다. 숨통이 트이자마자 윤은 노련하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
“들으신 대로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도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하나 그이가 정말 많이 아프다면 더더욱 내가 당장 보아야겠다. 비켜라.”
“제 의뢰인께서 몸을 녹이시는 동안 문을 사이에 두고 소통하심이 옳으실 듯합니다.”
후우.
서산 대신이 내뿜은 연기가 쭉 뻗어 나가다가 그림 속 구름 같은 형상으로 동그랗게 말렸다. 그녀가 만든 뿌연 구름들은 꼼꼼히 쳐 둔 차양 아래를 뭉게뭉게 떠돌다가 새로 생긴 구름에 부딪쳐 산산이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