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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38화 (38/157)

38화

“이틀이 넘도록 서산 대신께서 아무 일 없으시면 이 계약서는 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제 말대로 내일 날 밝을 무렵 안에 연수산이 심상치 않다 싶다면―”

윤의 손이 대청마루 한구석의 화로에서 가느다란 흰 연기를 흘리고 있는 민재의 곰방대를 가리켰다.

“어르신이 태우시는 저 곰방대를 주십시오.”

“좋다. 아무렴 내가 연수산 산도깨비로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도령보다도 서산 대신의 속을 모를까.”

자신하던 민재는 다과상을 다 비우기도 전에 하늘을 찢을 듯이 연신 내리꽂히는 번개를 쳐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날 밝기도 전에 내가 확실히 진 기분이구만.”

“어디 기분만 지셨습니까? 진짜로 지셨지.”

영목이 낄낄대며 놀리자 민재가 한숨을 폭 내쉬면서 화로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곰방대를 윤에게 건넸다. 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손수건을 펼쳐 그것을 고이 받아 들었다.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민재가 이쪽 방이고 저쪽 방이고 할 것 없이 도깨비불을 훤히 밝히며 영목과 윤을 깨웠다.

“일어나라, 이 어린 인간들아!”

“…무슨 일이십니까?”

“뭔 일은 없고, 집주인은 심부름하러 내보내면서 객들은 쿨쿨 자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깨웠지.”

설마 하긴 했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영목과 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해라.”

“예에. 잘 다녀오세요.”

“…다녀오십시오.”

둘의 등을 기운차게 퍽퍽 두드려 화답한 민재는 샛초록 도깨비불이 되어 하늘로 떠올랐다. 윤과 영목의 방 안을 채우고 있던 작은 도깨비불도 그를 따라 일제히 마당 한복판으로 날아올랐다.

“어떠냐― 멋있냐?”

하늘을 가득 채운 도깨비불의 한복판에서 민재가 으스대며 물었다. 연신 하품을 하던 영목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맨날 다니던 길로 맨날 뵙는 분 뵈러 가는데 이렇게 화려하게 움직일 일입니까?”

“맨날 보러 가는 길이면 이렇게 안 가지, 인마.”

“오늘이 뭐 별 날입니까?”

영목이 졸음 가득한 눈을 비비며 물었다. 방과 마당을 가득 채운 도깨비불들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키들댔다. 그제야 영목은 눈에서 잠을 걷어 내며 민재를 올려다보았다.

“어? 오늘 진짜 뭔 날이에요?”

“뭔 날이 될 날이지, 인마. 서산 대신께서 집 나간 호우준이 못마땅해서 밤새 이렇게 비를 퍼붓고 계신 거잖냐.”

민재의 설명을 듣자마자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윤이 즉시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영목은 아궁이가 있는 쪽으로 멀어지는 윤을 보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윤이 도령은 알아들었는지 몰라도 저는 이게 대체 뭔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설명 좀 해 주고 가세요.”

“으이구. 원인을 해결해야 않겠냐. 호우준이 혼례 올리고 싶어서 집 나간 거라며?”

원인. 혼례. 좋은 날.

수수께끼 같은 단어를 쭉 늘어놓았다가 이리저리 끼워 맞춘 영목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신부 모시러 가는 행렬이란 말씀이시구나.”

“이제 말이 통하네!”

“동트기 무섭게 깨우는 바람에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래요.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민재가 픽 코웃음을 쳤다. 그가 그러든 말든 영목은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면서 이른 아침의 빛 망울만큼이나 많은 도깨비불들을 헤아렸다.

“저기… 어르신, 아무리 그래도 식전 댓바람부터 이 도깨비 행차는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서산 대신 정도 되는 신의 혼사라면 흔해 빠진 청사초롱보단 도깨비불이 낫잖냐.”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긴 하네요.”

“그치? 연수산 도깨비가 연수산 주인 혼사 앞장서는 거니까 이쯤은 요란해야지.”

민재가 말린다고 마음을 접을 양반도 아니기에 영목은 성의 없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예에, 예. 나으리가 눈치 없으신 것 같으면서 은근 사람 잘 챙기시죠. 다녀오십쇼.”

“저놈 저거, 칭찬이야 뭐야?”

투덜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도깨비불은 청록색 잔영만 남기고 산등성이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새에 윤은 반듯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숫대야를 들고 돌아왔다. 영목은 그제야 에구구 소리를 내며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제 아침엔 자네에게 대접받았으니 오늘은 내가 자네 소세 물 떠 오려 했는데…….”

“아뇨. 최 형은 섬세함이 없으시니까요.”

“…….”

“씻기에 알맞은 소세 물의 따스함은 제가 맞추는 편이 속 편―”

윤이 말을 끝맺기도 전. 담장 너머로부터 서릿재 마당 한복판으로 뭔가가 휙 날아왔다.

첨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는 흙바닥 위로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다.

“어이쿠!”

호우준이었다.

곧이어 서릿재의 웅장한 대문이 먼지처럼 푸스스 부서지면서 새카만 수단을 걸친 묵이 태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뒷짐을 지고 제집처럼 들어온 그는 흙탕물에 젖어 엉망이 된 호우준을 향해 한껏 안타까운 체를 했다.

“저런. 구미호라면서 이렇게 균형감이 없어서야.”

표정도 목소리도 더없이 다정하여 그의 말이 온통 비난이라는 것은 조금 늦게 와닿았다. 잠시 어이없어하던 영목이 얼른 호우준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하며 묵을 흘겼다.

“아니, 나으리! 환자를 이 폭우 속에 던져 굴리시면 어쩝니까!”

“던진 건 맞고, 구른 건 혼자 구른 거고.”

“…….”

“이깟 비 맞고 이 정도 굴러서 병나면 영물이란 이름 갖다 버려야겠지요?”

얄밉지만 맞는 말이었다. 오백 년 묵은 구미호가 가을비 맞는다고 고뿔 걸릴 리는 없었다.

‘무기 나으리는 맞는 말만 해서 더 밉살맞아, 진짜.’

하여간에 묵은 하는 짓은 조금도 친절하지 않으면서 웃는 낯과 음성만은 세상 그 누구보다 다정한 남자였다.

‘다정하기만 한가. 저 홀로 단정하기까지 하지.’

영목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묵을 훑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묵의 몸 주변엔 물 한 방울 묻지 않는다. 항시 다감한 낯짝만큼이나 보송한 그의 몸뚱이도 볼수록 괘씸스러웠다.

“최 형, 호 겸인 어르신을 이리 부축해 주세요.”

영목이 마음속으로 연신 얄밉다는 말만 반복하는 동안 윤은 어디선가 큼지막한 수건 두어 장을 가져와 펼쳐 들고 있었다. 영목은 묵을 흘기면서 그 수건 앞으로 호우준을 안내했다.

“어르신, 우리 도령한테 갑시다. 몸은 괜찮으세요?”

“응. 그냥 좀 놀란 거지, 하루 종일 범산 산군의 동굴에 콕 박혀 온천만 해서 몸은 아주 팔팔하단다.”

“그 동굴… 아늑하고 좋더라고요.”

“영목이 너도 아는구나? 산군께서 손님이 올 줄 아셨던 것처럼 아주 좋은 비단 금침을 깔아 두셨더구나.”

영목과 윤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범산 산군이 그 온천 동굴에서 그들을 멋대로 동침시키려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윤이 헛기침을 하면서 눈을 돌리자 영목이 짓궂게 웃었다.

“하. 고 비단 금침이 원래 제가 누워야 할 거였는데 말입죠.”

그는 윤의 옷고름을 쳐다보며 장난스레 입맛까지 다셨다.

깊은 탄식을 애써 삭인 윤은 호우준의 몸을 수건으로 단단히 감싸고 씻을 물을 준비하겠다며 다시 아궁이 쪽으로 멀어졌다. 묵의 새카만 눈동자가 윤의 발걸음을 쫓아 길게 움직였다.

“어린 인간들. 이제 실토해 봐요.”

“무얼 말입니까?”

“대관절 무슨 장난을 꾸미고 있는 거냐고.”

윤은 묵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걸음 한번 멈칫하지 않고 맨 끝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림같이 뻗은 묵의 눈썹이 크게 꿈틀, 하자 영목이 한숨을 지으며 답했다.

“저희는 뭘 꾸미는 게 아니라 구호 활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호 활동?”

묵의 그림 같은 눈썹이 쭉 치켜져 올라갔다.

“예에. 구호, 활빈, 그런 거요. 인간들은 몸이든 마음이든 병들고 다친 사람이 있으면 보듬어 주거든요. 나으리는 평생 모르시겠지만.”

“설마 모를 리가. 내가 모르는 게 잘 없어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오만을 마주하자 영목은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신이라는 것들이나 용이나 인간의 상식으로는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니까.’

백 마디를 퍼부으려던 영목은 너무나도 진심인 그의 항변에 입 뗄 의욕을 깡그리 잃고 고개만 저었다. 호우준의 표정도 영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도 입을 떼지 않자 세찬 빗줄기만 너른 서릿재 마당을 요란하게 두드려 댔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기다란 속눈썹을 나풀나풀 깜빡이던 묵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손을 뻗었다.

“저기 연수산 제일 알짜배기 땅에 자리 잡은 왜업신도 내가 데려왔습니다. 다 죽어 가는 걸, 왜에서부터 데려왔다고, 내가.”

“예에. 예에.”

“다 고장 난 걸 내가 주워 와서, 내 친구가 고쳐서, 그래서 연수산에서 업신 노릇을 하고 있는 거라니까?”

“예에에.”

조금의 성의도 진심도 없는 대답이었다. 묵은 아닌 척하면서 약간 언성을 높여 영목의 얼굴 앞으로 제 낯을 들이밀었다.

“이 연수산에서 나보다 구호 활동에 열심인 사람은 불란서 의사 선생 정도일걸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신 거지요?”

듣다 못한 호우준의 물음에 그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진심이다마다.”

“…예에…….”

“오늘만 해도 그래요. 호 겸인은 꾀병인 게 분명하지만, 혹시라도 정말 아픈 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리로 데려온 거라고요.”

“그러시구나…….”

묵은 연수산에서 재수 없기로는 누구나 첫손에 꼽는 용이었다. 그런 주제에 스스로는 저 자신을 꽤나 좋은 사람, 꽤나 다감한 사람이라 믿고 있다는 점이 참 문제였다.

“범산 온천에 몸 담그고 있는 것보다도 비형랑이 기운 다스리는 걸 도와주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몸소 데려왔다고, 내가.”

그러나 정정해 준다 한들 들어먹을 놈이 아님을 알기에 영목도 우준도 무성의하게 고개만 주억이면서 묵의 항변을 흘려버렸다.

“무튼, 우리 윤이 도령과 저는 나쁜 일 꾸미는 게 아니라 그저 호 겸인 어르신을 돕고 있을 뿐이에요. 재밌는 일이 벌어질 테니 나으리는 그냥 구경이나 하십시오.”

“흐음. 재밌는 일이라.”

묵은 영목의 말을 믿을 마음이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눈꼬리에 곱디고운 눈웃음을 건 묵이 영목과 호우준을 향해 실토하라 채근해 대고 있을 때.

“호 겸인 어르신, 끝 방에 씻고 옷 갈아입으시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새 씻을 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한 윤이 왼쪽 끝, 아궁이 근처의 방에서 영목에게 손짓했다. 영목은 재빨리 호우준을 부축해서 윤이 손짓하는 방 쪽으로 돌려세웠다.

“호 겸인 어르신, 제가 안 데려다드려도 혼자 걸으실 수 있지요?”

“에라이. 누굴 진짜 늙은이에 진짜 환자 취급을 하니?”

우준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홀로 걸어 윤이 가리키는 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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