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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37화 (37/157)

37화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정식 거래 계약서를 내어 주지.”

“사양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슬며시 찌푸린 눈으로 윤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호우준이 꼬리를 펼쳤다. 그의 등 뒤에서 은색으로 반짝이는 풍성한 여우 꼬리 아홉 개가 공작의 깃처럼 반원을 그리며 너울댔다.

“난 도령 말만 믿고 가는 거야.”

뭐가 되든 한번 해 보자는 듯이 눈을 빛낸 호우준이 힘차게 발을 굴러 껑충 뛰어올랐다. 발 몇 번 굴렀을 뿐인데 늘씬한 사내는 순식간에 범산을 향해 멀어졌다.

“윤도, 영목도 잘 가요! 좋은 소식 있길 바랍니다!”

등 뒤에서 불란서 의사 선생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크게 팔을 흔들어 영목과 윤을 배웅했다. 대문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수문 대감도 다시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서래원 안쪽에 선 두 남자의 모습이 검은 점이 될 때까지 멀어지자 영목은 윤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씩 웃었다.

“윤이 도령, 호 겸인네 연초 나 주라.”

“그렇지 않아도 최 형 드리려 하였습니다.”

“그래애? 나 이제 재산 한 푼 없는 빈털터리 되어 버린 거 어찌 알구?”

“아뇨. 그저 선물하려 하였을 뿐인데…….”

늘어지는 윤의 말꼬리에 탄식과 질책이 어렸다.

“또 노름판에서 다 잃으셨습니까?”

“아니. 어제 중요한 거래를 한다고 했잖아. 그걸 성사시키느라 아낌없이 갖다 바쳤거든.”

윤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목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세 번쯤 못 본 척하던 그가 영목의 손가락에 느릿하게 제 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 걸었으니 연초는 나한테 다 주는 거야. 진짜로.”

“예.”

“연초잎 실물 보고 약속 무르기 없네.”

“처음부터 최 형 드리려 했다잖습니까.”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거든. 저도 모르게 변하는 거거든.”

냅다 손을 거둬 가리라 생각했던 윤은 손가락을 건 채로 느릿하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 마음이 변하는지 아니 변하는지 오래오래 지켜보시지요.”

영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면서 모르는 척 얽은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둘은 손가락을 걸고 연수산을 느리게 걸었다. 옹기 가마터를 지날 즈음, 꽃밭을 돌보다 돌아오던 세경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영목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실룩였다.

‘수컷 구미호와 조선에서 제일 큰 신의 연애를 도와주고 있으니 우리의 연심도 이쯤은 내보여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영목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내내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영의정이나 우의정의 이름도 조금은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영목아! 도련님이랑 같이 와서 이것 좀 먹고 가렴. 마침 가마솥 뚜껑에 배추전 부친 참이야.”

“아이고. 저야 거저 주시면 넙죽넙죽 먹죠!”

윤도 싫은 내색 않고 영목이 이끄는 대로 연수산의 이 집 저 집으로 끌려다녔다. 종일 연수산 사람들이 나눠 주는 주전부리로 배를 채우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릿재에 도착했을 때에는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호 겸인 어르신과 서산 대신의 일이 정말 자네 생각대로 될 것 같은가? 잘못되면 어찌하려고?”

티 없이 흰 꽃밭에 주홍색 물이 들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영목이 걱정스레 물었다. 윤은 영목의 옆모습에 시선을 두고 느긋하게 대답했다.

“망할 것부터 생각하고 판 벌이는 장사치도 있답니까?”

“나. 나는 맨날 연초 장사 옹기 장사 말아먹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부터 해.”

“저는 얼마나 크게 남겨 먹을까 하는 생각만 합니다.”

“…잘났네.”

“최 형이 몇 번이고 말아드셔도 제가 최 형 몫까지 남겨 드릴 터이니 절 믿으세요.”

눈꽃 같은 흰 메밀꽃이 가장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어진 손을 간질였다. 손이 아니라 마음이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윤의 긴 속눈썹 아래로 노을 그림자가 너울대고, 가을바람에 새하얀 메밀꽃과 새파란 비단 목도리가 파라락 흔들렸다.

이 풍경을 눈에 새길 듯이 바라보며 영목은 생각했다. 이 기분, 이 모습을 평생 품에 안고 살다가 아주 힘든 날에 한 번씩 꺼내 보면 되겠다고. 그러면 조금은 행복해질 것 같다고.

“최 형, 저는―”

굳게 닫혀 있던 윤의 입이 달싹인 순간, 소리도 없이 나타난 민재가 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야. 호우준이 서산 대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범산으로 갔댄다.”

그 말에 영목은 새삼스럽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서산 대신의 기분이 좋은 날에는 노을에 창포 꽃잎 같은 청보라색이 일렁였는데 오늘은 온통 주황뿐이었다.

‘주황색 노을은 서산 대신이 불안할 때던가, 불쾌할 때던가.’

영목은 고향과 진배없는 곳의 하늘 색이 기억날 듯 말 듯 흐릿해진 제 기억력에 혀를 찼다.

‘한양에서는 이제 몇 년, 연수산에서는 평생이었건만. 내 머리통은 뭐가 문제냐.’

찌푸린 눈으로 하늘을 흘기던 그는 습관처럼 윤을 보았다. 영목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린 윤의 연갈색 눈동자에 주황색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생각을 읽어 내기 힘든 눈동자가 해 지는 하늘을 가득 담고 영목을 향했다.

‘아, 젠장. 나는 이제 노을 지는 순간마다 윤이 도령을 떠올리게 되겠네.’

영목은 기쁜 듯 씁쓸한 듯 웃으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윤이 둘러 준 파란 목도리와 때아닌 눈밭 같은 흰 꽃들에도 주황색 노을이 일렁였다. 눈을 내리깐 보람도 없이 눈 두는 곳마다 온통 윤과의 기억, 윤의 손길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 호우준이 연수산에서 몸을 뺀 거, 이거 네놈들 그림이지?”

영목과 윤의 묘한 기류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민재가 둘의 어깨에 팔을 걸고 거침없이 앞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윤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영목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킬킬 웃었다.

“둘이 서로 없이 못 사는 거 온 연수산이 다 아는데 호우준은 왜 달포째 끙끙 앓다가 갑자기 몸을 빼? 그 구미호는 서산 대신과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거래냐?”

“혼인이요.”

영목이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 사이에 윤이 긴 고민 없이 단번에 답을 내놓았다. 민재가 부리부리하게 큰 눈을 끔뻑끔뻑 떴다.

“구미호가 서산 대신이랑 혼인을 하고 싶어 한다고?”

“그런 반응들이 나오시니 호 겸인 어르신이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앓아누우신 게지요.”

민재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인마! 어디 감히 구미호가 산신에게 비비냐는 개소리가 아니야!”

“그럼요?”

“서산 대신 그 양반 그 성정을 평생 견디면서 상전 뫼시듯 살고 싶은 건가 싶은 거지.”

이번에도 윤은 거침없이 즉답을 내놓았다.

“은애하는 이의 무언가는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꺼운 것이더이다.”

영목은 윤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민재도 윤의 말을 되새기며 말을 잊은 채 묵묵히 걸었다.

그들은 전날 밤처럼 서릿재의 대청마루에 앉아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음식들을 열심히 먹었다. 입맛 까다로운 윤도 민재가 내어 주는 음식만큼은 가리지 않고 썩 잘 먹는 편이었다.

민재가 소매를 떨치자 빈 그릇과 접시가 사라지고 흰 쌀알이 동동 떠 있는 식혜와 약과, 단감이 차려진 소반 세 개가 나타났다.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영목을 향해 민재가 뿌듯하게 가슴을 펴고 에헴, 헛기침을 했다.

윤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식혜 사발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우르릉, 하늘이 매섭게 울었다.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던 민재가 대번에 미간을 접고 혀를 끌끌댔다.

“어이구. 이럴 줄 알았다. 서산 대신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으니 호우준 돌아올 때까지 비가 엄청 내리겠구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면서 윤이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빗줄기가 조금만 더 세지면 문세경이가 제 꽃밭 망가진다고 호우준 멱살 끌고 데려올지도 몰라.”

“아. 세경 마님께 아직 인사를 못 드렸네요.”

“도령은 당분간 문세경이 피해 다녀라.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문세경이 기분이 아주, 아주, 아아주 더럽더라고.”

민재는 절대 사정을 모르지 않는 얼굴로 영목에게 눈을 흘겼다. 영목은 모르는 척 제 상에 놓인 음식들을 착실히 비우고 윤의 상에 올라간 감까지 죄다 집어 먹었다.

제 것을 아예 접시째 영목의 상으로 옮겨 준 윤이 퍼붓는 빗줄기를 쳐다보면서 민재를 불렀다.

“어르신.”

“어.”

“서산 대신을 잘 살피시다가… 큰 사달 나겠다 싶을 때에 그분을 모시고 서릿재로 와 주십시오.”

민재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왜?”

“산과 고을엔 보는 눈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도깨비 집인 서릿재 어르신 댁이라면 산신께서 아무리 큰소리를 내셔도 담장을 넘어가진 않을 테니까요.”

민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때맞춰서 호우준도 여기로 데려올까?”

“굳이 비형랑께서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꽃밭 때문에 심기 불편하신 세경 마님이든, 서산 대신 등쌀에 못 이기신 무기 나으리든… 두 분 중 한 분이 이리로 데려오실 터이니.”

“온 동네 것들이 다 서릿재 주변에 얼쩡거리겠구만.”

표정을 보아 하니 민재는 제 집에서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아 그저 신이 난 듯했다.

“어르신… 우리 윤이 도령 생각대로 풀리면 다행이겠지만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면 지진이나 산사태쯤은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땐 내가 잘 막아 볼게.”

영목은 속으로 “아이고.” 하는 곡소리를 삼켰다. 이 자리에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난리를 걱정하는 사람은 정말로 저뿐인 모양이었다.

민재는 벌써부터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윤을 채근했다.

“도령, 서산 대신 인내심이 바닥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호 겸인 어르신이 서산 대신을 얼마나 편안히 보살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러니까 도령 생각엔 며칠 정도일 것 같냐고. 일주일?”

윤은 말 대신 살며시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뭐야. 이틀?”

“두 시진(4시간)입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한나절 만에 부글부글하시려고.”

“체면이 있으니 날 밝을 때까진 가까스로 참으실지도요.”

민재가 킥킥 웃으면서 단숨에 식혜를 들이켰다. 설탕에 삭힌 쌀의 포슬포슬하고 달콤한 향기가 빗물 젖은 밤공기에 잔잔히 퍼졌다.

“나는 이틀까진 내색 않고 버티실 것 같은데.”

“내기하시겠습니까?”

“좋지! 뭘 걸 테냐?”

윤은 품에서 전날 민재에게서 받았던 자개 곰방대의 거래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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