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영 불편하다는 게지. 내 마음 따위는 알 바 없이 몸만 독점하면 된다는 건가 싶기도 하면서.”
“깊이 생각 마시고 그러려니 하고 사세요. 서산 대신이나 저기 범산 산군 정도면 무던한 산신이십니다.”
영목의 조언에 불란서 의사 선생은 짧은 감탄을 흘리면서 두툼하고 낡은 수첩에 영목이 한 말을 적어 넣었다. 보나마나 조선 산신의 특성이 어쩌니 하는 문장이리라. 불란서 의사 선생은 언젠가 꼭 조선의 신과 요괴를 정리한 책을 펴겠다면서 새로 알게 된 지식들을 시도 때도 없이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윤이 보기엔 불란서 의사 선생의 이런 지적 욕구도, 영목의 조언도, 호우준에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짓거리였다. 남녀 간의 내밀한 이야기에 머쓱해하던 윤은 빨리 이 자리를 파하려면 다시 저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며 툇마루를 가볍게 탁탁 두드렸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호 겸인 어르신은 서산 대신께서 어르신의 몸만 좋아하시는지, 마음도 어르신에게 있으신지 확실히 하고 싶으시다는 거지요?”
“그렇지.”
“서산 대신께서 너무 큰 신인 탓에 구미호이신 어르신 입장에선 대놓고 물을 수 없어서 속병만 앓고 계신 거고요?”
“도령 말대로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신접살림이라도 차리자 하고 싶지만…….”
호우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 따위 구미호가 감히 서산 대신에게 대볼 거리나 되나?”
“아이고, 어디 대보기만 합니까? 낮밤 없이 깊이깊이 파고들고 계시면서 무얼.”
갑자기 영목이 끼어들어 음흉한 농을 치는 바람에 불란서 의사 선생의 창백한 낯과 윤의 말간 낯이 동시에 화르륵 불타올랐다. 듣는 두 사람은 당황해서 눈을 가리고 입을 가리는데, 영목과 호우준은 태연하기만 했다.
“…최 형, 제발 말씀을 조금…….”
“왜? 방금 전엔 나랑 한 이불 덮고 자자 말해 놓고는, 남의 이불 속 사정 듣는 것은 부끄러운가?”
“그거랑 이거랑 어찌 같습니까?”
“다를 건 무어야.”
영목은 낄낄대면서 장난스레 윤의 귀를 틀어막았다.
“호가 어르신, 우리 윤이 도령이 이렇게 키만 컸지, 금세 빨개지는 아가랍니다. 적당히 돌려 돌려 말하자고요.”
“이 이상 어떻게 더 돌려 말하라고…….”
적잖이 곤란해하던 호우준은 턱을 몇 번 쓸면서 수차례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무튼, 그러시기에 이쯤이면 우리가 서로 몸 통한 만큼 마음도 통하였다 싶어 합환주 나누자 말씀드렸어.”
“세상에. 서산 대신께 청혼을 하셨습니까? 멋있네, 우리 어르신!”
영목이 과장되게 감탄하며 손뼉을 치고 부산을 떨수록 호우준은 더 깊이 시름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윤이 불란서 의사 선생에게 어찌 된 일이냐 눈으로 물었다.
“저 친구가 용기 내어 물었는데 서산 대신께서 대답을 않으셨답니다.”
“아…….”
“그날 이후로 틈만 나면 이렇게 서래원에 드러누워서 끙끙 앓아요.”
“서산 대신께서 무기 나으리 말은 잘 들어주시니 그 나으리께 진심을 떠보라 부탁해 본 건데… 들은 척도 안 하시고. 휴…….”
멋지다며 짝짝 박수를 치던 영목이 입술을 물며 손을 내렸다.
호우준과 불란서 의사 선생이 답을 구하는 얼굴로 영목과 윤을 쳐다보았다. 영목과 윤은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러니저러니 조언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한성 처자들과 노닥거리기로 악명 높은 영목도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낸 적 따윈 없었다.
‘목숨 걸고 사내 행세 중인 내가 누구랑 뭘 해 봤을 리가. 기껏해야 손목이나 잡아 보았지.’
이런 두 사람에게 도와 달라며 붙들어 앉힌 신부나, 속없이 한탄 중인 수컷 구미호나, 그 소리를 진지하게 들어 주고 있는 윤과 영목 자신까지 죄다 문득 한심해졌다.
무거운 침묵만 속절없이 길어졌다. 하는 수 없다는 듯 불란서 의사 선생이 조심스레 여우를 달랬다.
“호 겸인, 차인 김에 금욕해 봐요.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니―”
호우준이 불란서 의사 선생의 말을 단칼에 부정했다.
“서산 대신과 내 몸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보다 솔직해지자면 청혼한 날 이후로 더 하신다고. 더는 힘이 들어 쉬고 싶노라 내 쪽에서 애걸할 정도란 말입니다.”
‘몸’이 아니라 ‘눈’이라 정정할 기회를 놓친 윤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낯으로 깊이 한숨지었다.
“어르신, 저 또한 의원님 말씀처럼 잠시 거리를 두시라 조언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불안한데 몸까지 거리를 두라고?”
호우준이 펄쩍 뛰며 정색했다. 영목이 “저렇게 뛰시는 걸 보면 안 아프신 건데?” 하고 놀리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영목에게 눈을 흘겨 무언의 비난을 던진 윤이 차분하게 호우준을 달래기 시작했다.
“어르신, 저는 장사꾼이지 매파가 아닙니다. 하나 조심스레 말씀드리건대… 장사치가 객의 마음을 사는 일과 사내가 정인의 마음을 얻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호우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되겠다 말씀하신들, 현재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이것뿐입니다. 서산 대신과 거리를 두세요.”
“…못 해. 깊이 마음 둔 쪽이 나이니 곁에서 몸뚱이라도 바짝 들이밀어야지, 어떻게 멀어진단 말인가.”
손사래를 치는 그를 향해 윤은 도방이라 적힌 자신의 금색 신분 패를 들어 올렸다.
“남가 상단 도방의 이름을 걸고 단언하자면 물건을 팔든 인생을 팔든― 사는 쪽의 마음을 얻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
“아쉽게 하는 거지요. 저것을 얻지 못하면 아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
못 한다고 고개를 젓던 호우준이 천천히 바로 앉았다. 윤은 그가 자세를 잡는 시간이 마음을 잡는 시간이라 생각하면서 재촉하지 않고 끈기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호우준이 이마에 질끈 묶고 있던 무명 끈을 풀어냈다. 윤은 수컷 구미호의 손에 쥐인 기다란 흰 무명 끈을 쳐다보면서 쐐기를 박았다.
“두 달 전에 서산 대신을 편히 모시라 조언드렸던 것, 지금 거리를 두라 말씀드리는 것 모두 아쉽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쉽게……?”
“예. 지난 몇 달간 서산 대신을 살뜰히 모시던 어르신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신다면 서산 대신께는 어르신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느껴지실 테니까요.”
이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영목이 몸을 발딱 일으켰다.
“아이고. 됐네, 그럼. 답 나왔으니 우린 가세.”
윤은 불란서 의사 선생과 호우준에게 꾸벅 목을 숙여 인사한 뒤에 가자고 손짓하는 영목을 따라 몸을 돌렸다. 윤의 붉은 입술이 옅은 곡선을 그렸다. 제가 말한 ‘아쉽게 하라’는 수작질을 영목이 제일 찰떡같이 알아먹었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발딱 일어나 가 버리면 망설이던 호 겸인 어르신은 아쉬워서 내 조언을 덥석 물 거야. 최 형은 그걸 노린 거다.’
아니나 다를까, 저기 등 뒤에서 호우준이 급히 신발을 발에 꿰는 소리가 들렸다. 영목은 윤에게만 보이게 고개를 틀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도령, 도령이 말하는 그 ‘아쉽게 하기’가 성공하려면… 대관절 얼마나 멀리로 거리를 두어야 하나?”
그때 서래원의 대문 옆에 앉아 있던 자그마한 남자가 윤에게 물었다. 눈이 댕그란 이 남자는 집 안의 문단속을 관장하는 열쇠와 자물쇠의 신인 수문 대감이었다.
수문 대감은 불란서 의사 선생 때문에 제가 할 일이 없다며 항상 불만에 차 있곤 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아픈 이든 아플 것 같은 이든 언제든 드나들어야 한다며 항상 문을 활짝 열어 두길 고집했으니까. 그래서 수문 대감은 누가 서래원을 오가든 항상 뾰로통하게 문 그늘이 지는 구석에만 숨어 있었다. 그런 신이 이렇게 튀어나와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묻는 것을 보니 서산 대신의 연애가 연수산의 큰 이야깃거리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윤은 수문 대감에게 눈인사를 건네면서 저만치에서 귀를 쫑긋대고 있을 호우준에게도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키워 답했다.
“서산 대신께선 늦든 빠르든 정인께서 자신의 곁으로 되돌아올 거라 믿으시기에 굳이 찾지 않으시는 겝니다. 정인께서 연수산 안에 계시니까요.”
“어허. 그럼 저 구미호가 연수산을 떠나 있어야 한단 말인가? 연수산 영물이 무슨 핑계로 산을 떠나?”
수문 대감이 턱 밑에 손을 괴고 윤을 올려다보았다. 윤은 망설임 없이 답을 내주었다.
“범산 온천 동굴로 요양을 간다는 핑계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호 겸인 어르신께서 마음의 병으로 고생 중이신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일 테니까요.”
언제 앓아누워 있었냐는 듯, 어느새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나온 호우준이 수문 대감과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가 범산으로 간다 치고. 그 온천 동굴엔 얼마나 머무르는 게 좋겠나?”
“아쉬우신 분이 직접 찾아오실 때까지요.”
“…서산 대신께서 설마 게까지 날 찾아오실까?”
“두고 보시지요. 사람은 간절히 손에 넣길 원하는 것이 생기면 산 넘고 물 건너 줄도 서고 밤도 새운답니다.”
윤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낯에 생기가 도는 수문 대감이 다음에 보자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배웅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호우준은 곧 결심을 마친 얼굴로 윤과 함께 성큼 문턱을 넘어섰다.
“도령이 일러 준 대로 행하여서 그분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내 도령에게 특등 연초를 내어 주지.”
윤이 한쪽 눈썹을 흘끗 들어 올렸다.
“서산 대신 피우시라고 기르는 것이라 절대 팔 생각 없다시더니. 제게 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대가로 주겠다는 거야. 내가 직접 관리하는 특등 연초이니 어디에서도 못 보았을 품질임을 자신하네.”
영목은 호우준의 제안을 들으며 윤의 얼굴을 살폈다.
‘중매는 잘하면 옷이 세 벌, 잘못되면 뺨이 석 대라 하였던가.’
잘되었을 때의 대가가 몇백 년 묵은 구미호의 연초잎이라면… 잘못되었을 때에 치러야 할 대가도 그 정도일 터. 호우준은 연초잎을 미끼로 일이 틀어졌을 때에는 각오하라는 경고까지 하고 있었다.
그 말에 담긴 속내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윤은 여상한 얼굴 그대로 접선을 펴 들고 느릿하게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대답 없는 그의 모습에 조바심이 난 호우준이 다소 성마르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