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쪽… 그렇게 안 봤는데 꽤나 야망 있는 구미호였네요.”
“예?”
묵은 보는 이를 녹일 듯이 웃으면서 턱을 괴고 빈정거렸다.
“온갖 암컷 신수들이 덤빌 땐 ‘마음의 여유가 없다’며 백 년을 버티더니. 다 필요 없고 서산 대신의 반려가 목표였어?”
“…….”
“이렇게 야망 있는 사내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서산 대신께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을 텐데. 좀 후회스럽네.”
묵의 빈정대는 강도가 심해지자 멀찍이서 가만히 듣고 있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끼어들었다.
“…미하, 말 예쁘게 해야지.”
“어쩌자고 말까지 예쁘게 할까. 내 얼굴이 이렇게 예쁘면 됐지.”
“미하.”
“왜애.”
불란서 의사 선생은 항상 그를 미하라고 불렀다. 천사의 이름이라나 뭐라나.
생각해 보면 연수산 사람들은 저마다 묵을 저 좋을 대로 대충 불러 대고 있었다. 세경은 서양 용, 비형랑 민재는 묵이 오래 묵은 나쁜 새끼라며 오묵이라고 불렀다. 윤이나 영목 같은 평범한 인간들은 대부분 묵, 또는 소리 나는 대로 무기 나으리라고 불렀고.
아, 묵을 유난히 고까워하는 신들은 서양 이무기라 칭하기도 했다. 지지리 말 안 듣는 게 딱 용 되기 직전의 철딱서니 없는 이무기라며.
그러거나 말거나 묵은 하찮은 것들이 저를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용이라는 제 위대한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단언하며 개의치 않았다.
묵이 이렇게 사르르 웃으며 건방진 말을 할 때마다 비형랑은 넌더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용이란 것들은 하여튼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상대가 질릴 정도의 오만함이 몸에 배어 있는 종족이라면서.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것만 봐도 그렇네. 한 톨의 권력욕도 사심도 없다면 직접 가서 부딪치지, 날 끌어들일 이유가 없죠?”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아닌 게 아닌데.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 중간에 나를 완충재로 끼워 넣는 거잖아요.”
아무튼, 연수산에서 얼굴 아름답기로도 못돼 처먹기로도 첫손에 꼽히는 사내는 호우준을 끝없이 비난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울거나 싸우겠다 싶어진 윤이 끼어들어 인사를 건넸다.
“무기 나으리,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아. 외부인들.”
“…….”
“당분간 날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잠깐 시간을 줄 테니 적당한 호칭을 찾아볼래요? 어른들 말씀하시는 데 끼지 말고.”
싱글싱글 웃는 낯이었지만 묵의 경고는 진심이었다. 영목은 앞으로 다가서는 윤의 앞을 가로막고 눈썹을 찌푸렸다.
‘누가 뭐라 부르든 신경 쓰지 않던 놈이 이제 와 새삼스럽게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일까.’
영목도, 윤도 짐작 가는 구석조차 없어 서로 마주 보며 고개만 갸웃댔다. 그러자 환한 미소를 입에 건 묵이 곧은 손가락을 뻗어 제 짧은 머리를 가리켰다.
“그게…….”
그를 대신하여 불란서 의사 선생이 대답했다.
“우리 미하랑 맨날 싸우는 그 서해 용왕 아들 있잖습니까? 이번에 그 친구가 미하를 좀 놀렸어요. 미하 머리가 상투를 못 틀 정도로 짧으니까, 관례를 올리지 않았으니 어른 용이 아니라 새끼 이무기라 불러야 한다고…….”
“…아.”
“서양 이무기라 이름도 서무기라 부르는 거라면서요.”
묵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곧은 검지를 뻗어 자신의 이마에 가로로 선을 그었다. 그가 서해 용왕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백 마디 말보다 정확한 설명이었다.
윤의 낯이 해쓱하게 질리자 묵은 짐짓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거기 어린 인간들도 잘 들어요. 살살 때리면 기어오르지만 딱 죽도록 혼내 주면 다시는 안 기어오른다는 거.”
“…….”
“제일 까부는 놈 하나만 본보기 삼아 손을 봐 주면 뒤가 아주 편해지지요. 기억해 두면 유용할 거야.”
제 딴에는 진지한 충고였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미하! 애들한테 그런 나쁜 짓이나 가르칠 거면 나가라!”
“음? 방금 그건 이 야망 있는 구미호가 알려 준 건데?”
묵이 호우준을 가리키자 호우준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묵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못된 가르침을 핑계로 날 쫓아내려면 이 구미호도 같이 내쫓아야 공평해. 그치?”
일제히 시선이 쏠리자 호우준은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틀었다. 물귀신처럼 호우준을 걸고넘어진 묵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걸고 영목과 윤을 바라보았다.
“그쪽들이 보기보다 똑똑한 애들이면 나처럼 새겨들을 거고, 멍청이들이면 듣고 잊겠죠?”
묵이 둘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느긋한 행동에 약이 오른 불란서 의사 선생이 오른손을 휘두른 순간, 묵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윤의 앞을 막고 있던 영목이 어깨에서 힘을 빼며 불란서 의사 선생에게 물었다.
“의원 나리, 방금 그거… 서해 용왕님 댁 아드님과 대판 싸우셨단 말씀이지요?”
“싸웠다기보단…….”
신부는 시름 가득한 얼굴로 검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이마에 가로선을 그렸다. 조금 전에 묵이 했던 그대로.
“두 번 다시 머리카락으로 못 놀리게 만들어 줬더라고요.”
윤은 묵이 있던 쪽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영목에게 눈짓했다.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영목이 아, 하면서 들고 있던 약 꾸러미를 신부에게 건넸다.
“아. 이거 드린다는 걸 정신이 쏙 빠져 있었네요. 대방 마님께서 약재를 챙겨 보내셨습니다.”
“아이고. 매번 신세 지고 있습니다.”
가을 하늘보다도 새파란 의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자 높고 날카로운 콧날에 찡긋 주름이 잡혔다. 검은 수단을 걸친 신부는 자애로이 미소 지으며 윤을 향해 물었다.
“자당께서는 강녕하시지요?”
윤은 여느 조선인과 다를 바 없는 그의 말투를 새삼스레 신기해하며 입 밖으로 나오려는 감탄을 삼켰다. 어찌 이리도 정중한 조선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시는지, 원. 사용하는 단어나 말투만 놓고 보면 영목보다 신부 쪽이 훨씬 선비답다 생각하며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학당도, 의원도 운영하시며 어려운 부분이 있으시면 저어치 말고 말씀하시라 몇 번이나 당부하셨습니다. 부족하나마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라면 물심양면으로 도우라고도 하셨어요.”
“음, 그럼 정말 중요한 일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부는 어느 틈엔가 방으로 들어가 자리보전하고 끙끙 앓아누운 사내를 가리켰다.
“두 사람이 호 겸인 좀 도와주세요.”
“…병은 신부님이 고치셔야지요.”
“마음의 병입니다. 약으로는 고칠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 나는 순결을 맹세한 사제라서 이런 남녀상열지사에는 도움이 안 되지요.”
이후로 무슨 말이 나올지 대번에 눈치챈 영목이 두 손을 다 흔들며 급히 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허허. 우리 윤이 도령이라고 의원님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의원님은 오래 살기라도 하셨지, 이 친구는 이제 열여덟입니다.”
“그럼… 영목이 도와주면 되겠네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서산 대신의 일은 돕는 것이 이득이었으므로 영목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냅다 고개를 주억이며 호우준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호 겸인 어르신, 어르신이 아니 계시면 연수산이 안 돌아가는데 어찌 이리 자리보전하고 계십니까.”
“내가 이래 봬도 구미호라 몸 하나는 튼튼해. 비실비실하면서도 할 일은 한단다.”
호우준이 힘없이 중얼거리며 영목의 위로를 받았다.
동양 의술뿐만이 아니라 동양 요괴들에 대한 관심도 지대한 불란서 의사 선생이 눈을 반짝이며 둘의 곁에 앉았다. 윤은 ‘저런 것을 좋아하는 양인에겐 연수산만큼 흥미진진한 곳도 또 없겠다.’ 생각하며 서래원 마당에 오도카니 서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윤과 눈빛을 주고받은 영목이 기력 잃은 구미호를 넌지시 떠보았다.
“어르신, 무기 나으리께는 정확히 뭘 도와 달라 하신 겁니까?”
잠깐 망설이던 호우준은 뜻밖에 저 멀리 마당에 선 윤을 쳐다보면서 입을 뗐다.
“도령도 알다시피 내가 그분을 깊이 연모하잖나?”
불란서 의사 선생과 영목이 윤을 돌아보았다. 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잘 알지요. 지난번 연수산에 왔을 때에 제가 알려 드린 방법은 써 보셨습니까?”
“잘 쓰고 있지.”
“응? 뭐? 언제? 무슨 방법?”
영목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윤을 쳐다보았다. 호우준은 끄응, 힘주어 몸을 일으키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지지난달에 내가 도령에게 도움을 구하였었어. 도령이 이르길, 서산 대신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그분께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라 하기에 그리했지.”
“잘하셨습니다. 사람은 고운 것, 비싼 것에는 금세 질리지만 편한 것에서는 쉬이 벗어날 수 없지요.”
불란서 의사 선생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목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잠깐. 오늘 아침 내게 마련해 주었던 소세 물이랑 노박 열매도…….’
영목은 실소를 흘리며 윤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윤에게 들러붙어 윤의 평판을 말아먹었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말린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목도, 호우준도, 불란서 의사 선생도―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윤을 바라보았다. 윤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타박타박 걸어 영목의 곁에 다가와서는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흥미진진해하는 눈으로 윤을 쳐다보고 있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호우준을 툭 쳐서 재촉하자 그가 깊은 한숨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도령 말대로 최대한 편하게 모시고는 있는데 잘되고 있는지는 도통 모르겠어. 서산 대신께서는 내게 은애한다 한마디 없이 항상 몸만 취하시니―”
“어이쿠, 이 어르신 봐라? 우리 윤이 도령 앞에서 못 하시는 말씀이 없네.”
영목이 호우준의 말을 끊고 톡 쏘아붙였다. 잠시 입을 다물고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던 호우준은 눈을 데굴 굴리더니 윤이 들어도 괜찮을 법한 표현을 고르고 골랐다.
“물론… 서산 대신께서 나를 아끼시는 건 알아. 낮밤 없이 찾아 계시는 데다 욕심껏 흔적을 남기신단 말이지.”
“…….”
“내가 밥벌이 때문이든, 그냥 지나는 길이든 동네 처녀 근처로만 걸어 다녀도 그 처녀들 가는 길에 아주 심술을 부리시고.”
“에이, 원래 산신들이며 산군들 성정이 죄다 그렇게 생겨 먹었잖습니까? 달거리하는 여인네는 산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산신들이 널리고 깔린걸요. 그래도 서산 대신께선 생전 아니 그러셨는데… 서산 대신께서 그렇게까지 동네 처녀들한테 심술을 부리시고 어르신 몸에 흔적을 남기시는 건… 바꿔 말하면 호 겸인 어르신을 독점하겠다는 영역 표시 아니겠습니까? 좋은 징조네, 뭐.”
윤이 헛기침을 했지만 영목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호우준은 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맥 빠진 목소리로 영목과의 대화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