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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34화 (34/157)

34화

윤은 자신의 신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별 대꾸도 없이 문턱을 넘어 사라졌다. “집에 있는 신이 다 이런 것을 낸들 어쩌라고.” 하는 작은 투덜거림이 가을바람에 실려 혀를 차는 영목에게 흘러왔다.

“자네 꿍시렁대는 거 다 들리네!”

“들으시라고 한 소립니다. 씻고 곁에 놓아둔 것들 드시고 나오세요.”

윤의 도포 자락이 흰 꽃밭 사이로 멀어졌다. 영목은 고개를 돌려 세숫대야 옆을 쳐다보았다. 뽀얀 김이 올라오는 대야 옆에 빨간 열매와 약과, 말간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윤의 무심한 배려에 미소 지었다.

‘달거리라는 말에 터질 듯 빨개지길래 모르는 척할 줄 알았건만 이리 챙겨 주네. 눈치 보지 말고 씻으라고 굳이 자리를 피해 준 거구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세 물에 손을 찰랑대며 웃는 영목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저렇게 아닌 듯 다정한 사내를 어찌 아니 좋아할 수가 있어.”

메밀꽃 사이로 사라진 윤을 흘기면서 영목은 천천히 몸을 적셨다.

‘마음이 따뜻한 소세 물처럼 흔들리는 것은 다 윤의 탓이다. 아닌 듯 한없이 다정한 저 사내 탓이다.’

그 모든 것을 윤의 탓으로 돌린 영목은 몸을 씻고 윤이 준 노박나무 열매를 삼킨 뒤 비형랑이 마련해 둔 옷으로 멀끔하게 갈아입은 다음에서야 서래원에 가져다줄 약재를 들고 대문을 넘었다.

“가세.”

새하얀 눈송이 같은 꽃이 연두색 풀밭 위에 점점이 내려앉은 벌판. 가을바람이 겨울의 색을 흔들어 봄의 신록을 비치는 꿈같은 풍경 속에서 메밀꽃만큼이나 뽀얀 낯이 영목을 돌아보았다.

섬세한 턱선을 따라 단정히 묶인 검은 갓끈. 옥과 은이 알알이 구슬로 엮인 입영. 신록색 위로 연노랑이 덧대어진 겹도포. 개나리색 쾌자. 수술의 끝자락마다 한 올 한 올 산호 구슬이 매달려 찰랑이는 세조대.

게다가 이제 보니 흑립을 고정하기 위해 갓 안쪽, 망건 앞에 다는 풍잠 장식은 연화문으로 세공된 백금에 망건 옆에 달린 권자(圈子)는 흔치 않은 홍마노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곳 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는데도 윤은 곱게 쌓인 첫눈처럼 한없이 고아하고 서늘하기만 했다.

‘참 나.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네. 잘 보이지 않는 곳일수록 더 섬세하고 호사스러운 놈이 왜 세상에서 제일 단정해 보이냐고.’

영목은 윤의 저 부조리한 단아함이 좋았고, 저 꼿꼿함이 못내 얄미웠다.

그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자 윤이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또 무엇을 흠잡으시려고요.”

“자네 흠잡을 곳이 어디 하나둘이겠나? 내가 말 안 하고 참는 거지.”

“말하십시오. 최 형이 언제 참으셨다고.”

“안 그래도 타박하려다가 우리 윤이 도령에게 새삼 반하여 입 다물기로 했으니 들쑤시지 말게.”

당황할 줄 알았던 윤은 눈썹 하나 미동도 않고 턱을 들어 올렸다.

“저를 매번 보시면서 매번 반하시네요.”

“첫눈 쌓인 밤에 홀로 뻗은 매화꽃 같으니 안 반할 수 있나.”

“그 표현이 벌써 몇 년쨉니까? 하도 같은 말로만 놀리셔서 이젠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하. 통탄스럽다. 학문을 멀리한 죄를 이렇게 받네.”

윤이 접선을 촥 펴 들어 입을 가렸다. 그 짧은 사이에 영목은 윤의 입술이 무방비한 곡선으로 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큰 걸음으로 다가가 윤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어디 자네가 내게 한번 해 보게.”

“…최 형 낯간지럽게 만들어 보라는 말씀입니까?”

“어. 자네가 내 헛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영목을 스쳤다.

“어서. 누가 웃어서 사람 홀리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입에 발린 말로 날 소름 돋게 해 보라니까?”

“그렇게 하면요?”

“내 자네 소원 하나 들어주지.”

윤은 대답 대신 접선을 집어넣고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티끌 하나 없는 기다란 손이 영목의 목에 느슨히 둘러 걸친 푸른 비단 목도리를 쥐었다.

윤의 시선이 영목의 곧은 목을 스쳤다. 윤의 눈매는 서늘하고 눈빛은 따스했다. 눈길 닿는 곳곳마다 영목의 살결에 오스스 솜털이 섰다. 천천히 허리를 숙인 윤이 그 솜털에 닿을 듯이 영목의 귓가로 입술을 가까이 내렸다.

“다음부터는 내외치 마시고 제 옆에서 주무세요. 한기 들지 않도록 이불도 함께 덮으시고.”

이른 아침의 금색 햇살이 윤의 시선과 같은 온도로 영목의 피부를 보듬고, 햇살보다 따뜻한 음성이 뺨을 스쳤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던 영목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환장하겄네. 같은 이불 덮고 잔다는 게 뭔 뜻인지나 알고 하는 소린가?”

“왜 모르겠습니까?”

살짝 위로 올라가는 윤의 입꼬리에 영목의 시선이 홀린 듯 엉켰다. 어쩔 도리 없이 사로잡힌 눈길을 자연스럽게 돌리려는 찰나, 파란 비단이 영목의 시야를 막았다. 새하얀 풍경을 등진 윤이 영목과 거리를 좁히자 영목의 세상이 온통 파랗고 노란 비단으로 가득 찼다.

의식도 못 한 새에 윤의 두 손이 영목의 목깃 안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의 미끈한 검지가 영목의 목덜미에 성글게 늘어진 비단 목도리를 감았다. 그렇게 목도리의 한쪽 끝을 쥔 윤이 찰나의 틈도 없이 팔을 한 바퀴 크게 둘렀다. 윤의 체향이 아침 햇살에 달궈진 영목을 뒤덮었다. 영목은 그답지 않게 숨까지 멈췄다.

비단 목도리의 모양을 잡느라 옷깃 근처를 스치던 기다란 손가락이 영목의 살을 느릿하게 쓸었다. 윤의 손이 스친 곳마다 솜털이 서고 열이 올랐다.

“소름 돋으셨네요.”

“…….”

“약속대로 소원, 들어주시는 겁니다.”

윤이 느슨하게 늘어졌던 목도리를 깔끔하게 여며 주며 속삭였다. 꼼꼼히 매듭지은 목도리 끝자락을 당겨 펴 모양을 잡으면서 강조하는 윤의 음성엔 옅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영목은 심장만큼이나 크게 떨리는 눈동자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남의 숨을 턱 멎게 하고 심장이 터지도록 뛰게 만든 주제에 윤은 영목이 익숙히 보아 오던 담담한 얼굴 그대로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영목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 낸 그는 제 입술을 영목의 귓가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말을 마친 윤이 영목의 손에 들린 약재를 부드럽게 제 손으로 옮겨 쥐고 앞서 걸었다. 저만치 작은 점이 되도록 멀어진 윤이 멈춰 서 천천히 뒤돌았을 때에서야 영목은 메밀밭을 가로질러 윤에게로 달려가서는 그의 손에서 약재를 빼앗아 들었다.

“약관도 안 지난 도령이 못 하는 말이 없네!”

새파란 비단 목도리 아래 감춰진 영목의 목덜미에서 복숭아색 열기가 피어올랐다. 낯설 정도로 따끈한 체온이 영목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런 몹쓸 수작질은 어디서 배웠나?”

“제가 아는 몹쓸 것의 대부분은 다 최 형이 알려 주신 거지요.”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며 짧게 후회하던 영목은 고개를 털어 머리를 비우고는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자네 방금 한 그 말, 후회할 걸세. 오늘 밤에 내가 진짜 자네 이불로 숨어들 거거든.”

“예. 잘해 보겠습니다.”

“…뭘.”

“최 형께서 생각하시는 그거요.”

기가 찬 영목이 자신의 지난 행실을 진심으로 반성하기 시작한 순간, 검은 수단을 걸친 벽안의 신부가 반색을 하며 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잘 왔어요, 윤, 영목. 내가 아주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신부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서래원 툇마루에 걸터앉은 두 사내를 가리켰다.

영목과 윤은 영문도 모른 채 대문 안쪽의 두 사내를 쳐다보았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쪽도,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는 쪽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기 나으리,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부탁을 들어 달라 애원하는 이는 연수산의 크고 작은 일을 돕는 호우준이었다. 흔치 않은 수컷 구미호라 무리에서 배척당하고 연수산에 깃든 이였다. 연수산 사람들 중에서 글을 모르는 이들의 서류 작성을 도와주거나 소소한 계약을 중개하였기 때문에 다들 그를 호 겸인(傔人)이라 불렀다.

구미호답게 퍽 요사스러운 미색을 갖춘 호우준이 한껏 눈썹을 끌어 내리자 그와 마주 앉은 또 다른 사내가 머리통을 모로 기울였다.

“음. 어떻게 할까. 들어줄까 말까.”

키 큰 사내가 짐짓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웃댔다. 호우준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미색이었으나 호우준과 마주 앉은 이 사내의 아름다움은 압도적이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가장 깊은 새벽을 닮은 색이라 다들 ‘묵(默)’이라 부르는 사내. 불란서 의사 선생과 함께 조선으로 굴러들어 온 바로 그 서양 용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영목과 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호 겸인과 무기 나으리가 저렇게 투닥대는 건… 보통 서산 대신이 얽힌 문제지.’

서산 대신은 이 연수산의 주인이었다. 산도 많고 탈도 많은 조선의 서쪽을 관장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신. 그런 이가 얽힌 문제를 도와주면 크게든 작게든 훗날에 도움이 될 터였다. 큰 신일수록 주고받는 일에 철저하니까. 원한도, 은혜도.

‘호 겸인이 바라는 게 뭔진 몰라도… 잘만 도우면 윤이 도령이 연수산에 자리 잡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영목은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가까스로 감추고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도와주세요. 부탁드릴 게 나으리뿐입니다.”

“잠깐 생각해 봤는데― 싫으네.”

더없이 간절한 호우준의 얼굴과 달리 묵의 낯짝엔 놀리려는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그러지 마시고요. 서산 대신께서 나으리의 부탁만은 곧잘 들어주시잖습니까. 원하시는 게 뭐든 백지 계약서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저런. 그렇게 물욕이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내가.”

묵이 방글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얄밉게 웃으면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을수록 호우준은 앓아누울 듯이 시들시들한 음성으로 매달렸다.

“그러지 마시고 무기 나으리께서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서산 대신과의 인연을 확실히 하고 싶단 말입니다.”

“확실히 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그쪽이 서산 대신 정인이란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다고.”

“정인 같은 애매한 말로는 불안하여 아니 되겠습니다.”

호우준이 짐짓 비장하게 중얼거리자 묵이 기다란 눈을 싱긋 휘었다.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도록 예쁘게 방긋방긋 잘도 웃어 대는 사내였다. 서양 영물은 다 저런가, 싶기도 하고 저러니 얼굴 밝히는 서산 대신이 귀애하지 싶기도 한 기분으로 영목은 팔짱을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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