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영목, 달콤한 것치고 몸에 좋은 게 없어요.”
“아이고, 달콤한 게 몸에 나빠서 죽을 만큼 쓴 황련(黃連)만 내도록 먹이셨습니까? 식후엔 고삼차 달여 주시고?”
“남이 들으면 욕해요. 나는 간식 삼아 감초도 줬어요. 영지도. 산삼도.”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영목을 설득했다.
“영목, 내가 아는 단맛 중에서도 그놈의 연정이 제일 고약해요. 연심이고, 연정이고… 단건 몸에 안 좋아. 잊지 말아요.”
“명심하겠습니다.”
세경이 깊은 한숨과 함께 회색 꾸러미를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영목의 제사가 땅의 신에게 받아들여졌다. 영목이 벼르고 벼르던 중요한 거래는 성공이었다. 이제 윤은 땅과 농사를 다스리는 대단한 용이 보호할 것이다. 영목은 아침에 윤이 일어나자마자 제 일생일대의 거래가 보기 좋게 성공했다고 자랑하리라 작정했다.
뿌듯해하는 영목의 얼굴을 보면서 세경은 낙엽만큼 쌓인 한숨 위로 또 다른 탄식을 토했다.
“영목… 아주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 도움은 그대가 바라는 형태가 아닐 거예요.”
“압니다.”
“알면서 왜 나한테 평생 모은 걸 다 바치면서 제사를 올렸담. 사람 좋고 애 좋아하는 도깨비한테 해야지.”
“서릿재 어르신은 제가 제사 안 드려도 뒷목 벅벅 긁으며 도와주실 테니까요. 세경 마님은 이렇게 정식으로 제사라도 올려 계약해 달라 부탁드리지 않으면 절대 못 본 체하실 테고.”
영목은 발끈하며 이마를 구기는 세경의 옷깃에 예쁜 단풍잎 하나를 곱게 끼웠다.
“윤이 도령을 보호하는 데에는 스승님과 서릿재 어르신 두 분의 도움이 모두 필요합니다. 한데 저의 공물이 두 분께 제사 올리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말이지요.”
“쥐꼬리만 한 건 아는구나.”
“알다마다요. 이제부터 스승님께서는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서 이를 박박 가실 거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 서릿재 어르신께서는 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물심양면 힘을 보태실 게 뻔하고요.”
영목의 계획에 말려든 게 못내 분해 세경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영목은 능청맞게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머리를 기대고 응석을 부렸다.
“그러니 저는 스승님께만 제사를 드린 겁니다. 스승님의 모난 성격과 비형랑의 오지랖을 믿고 일타쌍피를 노린 셈이지요.”
“짜증 나네. 듣고 보니 그 도깨비 이용해 먹는 방법… 내가 가르친 거잖아.”
“거 보십쇼. 제가 아주 막 나쁜 머리는 아니라니까요.”
세경은 영목에게 장사 재능이 없다 단정 지었지만 영목은 자신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장사치라고 자신했다. 가진 것과 얻을 것과 빌 상대와 들러붙을 상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으니까. 누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만 잘 알아도 큰 손해는 보지 않는다. 영목은 그렇게 믿었다.
퍽 만족스러워하는 영목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세경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졌다.
“영목이 하려는 방법으로는 대들보에 손톱자국조차 나지 않을 거예요.”
“손톱자국이든 발톱 자국이든… 아주 오랜 시일이 지나면 대들보가 얼마나 깎이고 부서졌는지 알게 되겠지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엽전을 바라보던 세경이 손안에 엽전을 가두고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이렇게 영목의 응석을 마냥 받아 주자니 심술이 나서 아니 되겠어요. 조건을 달지요.”
“아, 싫습니다.”
“거부할 수 없을걸요? 이 조건을 받아 준다면 나는 영목이 그리 애틋해하는 그 사내를 내 생이 다하도록 책임지고 보호할 거야.”
“…와. 치사하다.”
“영목이 거절한다면 내 도움은 딱 한 번일 겁니다. 이런 싸구려 제사는 키운 정을 생각하여도 일회용이에요.”
“아이고, 인심 박해라.”
입으로는 박하다 투덜대면서도 영목은 속으로 날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땅의 용의 영원한 가호를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조건이 붙든 남는 장사였다. 그는 너무 좋은 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태연한 얼굴로 슬쩍 물었다.
“뭔가요, 스승님의 조건이란 게?”
“그대의 침묵이 조건입니다. 영목 그대가 그 사내를 위해 한 모든 노력을 침묵하는 것.”
“…너무하시네. 저는 윤이 도령에게 별것도 아닌 일을 생색내는 재미로 사는데요?”
“흥. 말하지 아니하여도 그 사내가 영목의 희생을 알아줄는지― 어디 봅시다.”
용의 친절과 용의 심술이 얼마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지는 세상에서 영목이 제일 잘 알았다. 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닥칠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기분에 영목은 입술을 삐죽였다.
“스승님 심술은 해가 갈수록 더하십니다.”
“부당 거래 당하고 한다는 비난이 고작 ‘심술쟁이’가 끝입니까? 어디 가서 말로 지지 말라고 인간들의 욕설도 알차게 가르쳤건만.”
“그러게요. 제 심술은 세경 마님 심술 발끝에도 못 미치고, 애써 가르쳐 주신 욕도 제대로 못 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저는 세경 마님 제자 실격입니다.”
어떻게 말을 돌려서 유리하게 계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영목이 채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세경이 엽전을 말아 쥔 손으로 영목의 어깨를 툭 쳤다.
“실격 같은 듣기 좋은 소리를 핑계로 도망칠 생각 말아요. 나는 영목도, 영목의 금붕어 똥도 놔줄 생각 없으니까.”
“되게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엄청 괴롭힐 겁니다. 그대를 가르쳤던 것보다 더 호되게 가르치고 몰아세울 거예요.”
“…저랑 달리 윤이 도령은 아주 곱게 컸습니다. 좀 살살 해 주세요.”
세경의 새빨간 입술이 그믐달을 닮은 곡선으로 비틀렸다.
“마냥 곱게만 큰 사내라면 영목 그대가 이렇게까지 간절할 리가 없지.”
“…….”
“그 금붕어 똥에게 더 이상 응석받이 도련님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 주겠습니다.”
“에이. 살살 하시라니까.”
“내 훈육 방식이 걱정되면 영목이 틈틈이 들러서 살피든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주 지겹도록 와서는 살필 테니까 모쪼록 잘 좀 돌봐 주세요. 조만간 스승님께 우리 윤이 도령 데려가 달라고 기별드리겠습니다.”
두 손을 포개고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한 영목은 미련 없이 돌아서 세경에게서 멀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자고 있는 윤을 꽁꽁 묶어서 세경의 집에 가둬 놓고 싶었다. 불안은 손쓸 도리 없이 커지는데 윤을 연수산에 묶어 둘 적당한 핑계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씩씩한 발걸음으로 위장하고는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마음이 가볍다거나 기분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조금, 슬펐다.
【 여우비 】
“…형, 최 형.”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영목의 뺨을 스쳤다. 영목은 부스스 눈을 떴다. 시야에 한가득 말간 얼굴뿐이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윤이 도령 얼굴이 뵈니 좋구만.”
그가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자 윤이 덮어 준 듯한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헝클어진 머리부터 다 풀어진 옷고름, 낙엽 잔뜩 묻어 구겨진 옷까지 어디 하나 단정한 곳 없는 영목을 보며 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비단 침구 곱게 깔린 방 두고 제 방 문 앞에서 주무십니까?”
“간밤에 윤이 도령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 가려다가 애써 내외했다네.”
그간 영목의 엉큼한 농담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윤은 대수롭지 않아 하는 얼굴로 들고 있던 세숫대야를 영목의 앞에 내려놓았다. 놋을 두드려 만든 큼지막한 대야에선 모락모락 흰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최 형 소세 물 마련해 왔습니다. 천천히 씻으시고 저와 함께 서래원으로 가시지요.”
서래원이라는 말에 영목은 핏 실없이 웃었다.
‘서래원. 서양에서 온 이들이 차린 의원.’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할 일곱 살쯤, 영목은 연수산의 신들에게 그곳의 시작을 물었고, 신들은 서래원의 시작이 꽤나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답했다. 동방 의학서와 괴담을 모으는 불란서 의사 선생과 방방곡곡 자개 명인들을 찾아다니는 미끈한 사내. 그 둘이 연수산에 자리 잡으면서부터가 서래원의 시작이었다나.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사내도,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한 불란서 의사 선생도 둘 다 겁도 없이 새카만 수단을 걸치고 다녔다. 연수산은 저마다 말 못 할 사연으로 천주학을 믿던 이들이 도망쳐 모인 곳. 그렇기에 다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서양에서 온 신부라 여기고 자연스럽게 마을로 받아들였다.
옛이야기를 떠올리던 영목이 혀를 찼다.
‘조선에서 제일 큰 신인 서산 대신의 영역에 제사도 안 지내는 천주쟁이들 마을이 웬 말이냐고.’
웃기지도 않는 조합이었지만 서산 대신은 대수롭지 않게 천주쟁이들을 받아들였다.
한편 꽤나 독실한 천주교도인 남인혜는 연수산의 천주쟁이들의 살림을 살뜰히 챙겼다. 그녀는 불란서 의사 선생이 운영하는 의원에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연수산을 직접 오가던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소중한 외아들에게 약재를 들려 심부름을 보내기 시작했다. 산골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약재의 보충이 윤과 영목이 두어 달에 한 번씩 연수산을 찾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다들 불란서 의사 선생네라 부르는 양인들의 의원을 오직 윤만이 꼬박꼬박 서래원이라 칭했다.
‘제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이니 저라도 열심히 불러 주고 싶은 거겠지. 하여튼 윤이 도령은 귀엽다니까.’
영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 없는 윤은 영목의 손을 세숫대야에 넣어 주면서 계획한 일정을 쭉 읊었다.
“서래원에 가서는―”
“불란서 의사 선생네 도깨비 터를 그리 고상하게 부르는 이는 이 연수산을 통틀어 자네뿐일 거야.”
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윤은 대꾸도 않고 각 잡아 접은 수건을 영목의 무릎 근처로 슥 밀어 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어디 가나? 나랑 같이 서래원 가자며?”
“메밀꽃 구경 좀 하렵니다. 씻고 옷 갈아입고 천천히 나오십시오.”
윤이 신발에 발을 꿰었다. 흠 하나 없는 새카만 가죽으로 만들어진 흑혜였다. 신발코를 둘러싸고 우아한 구름 문양이 새겨진 신발, 반듯한 걸음걸이를 눈으로 따라가며 영목은 기가 차 코웃음을 쳤다.
“또 제게 무슨 트집을 잡으시려고 그렇게 웃으십니까?”
저를 보고 실소하는 영목을 향해 윤이 슬며시 눈꼬리를 찌푸렸다. 영목이 그의 신발을 가리켰다.
“자네 신발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트집을 안 잡을 수가 있어야지. 날더러 산행에 적절치 않은 꼬라지라 하더니… 구름무늬 곱게 수 놓인 가죽신이 웬 말인가?”
“비단으로 만든 태사혜보단 이 가죽신이 튼튼한걸요.”
“아아. 그래서 우리 윤이 도령은 가마꾼들 한 달 치 새경보다 비싼 가죽신을 신고 산을 타셨군요. 비단보단 가죽이 튼튼해서. 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