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32화 (32/157)

32화

“아, 스승님! 저 허리 나갑니다.”

“주둥이도, 엄살도 여전하고.”

윤의 집 앞에서 그를 억지로 끌고 가던 그날처럼, 세경은 영목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틀어쥐고 가을 산길을 사뿐사뿐 걷기 시작했다. 영목이 속절없이 끌려가면서 한숨을 내쉬자 그녀는 짓궂게 킥, 하고 웃으며 걷는 속도를 더 높였다.

“영목이 이렇게 전력을 다해 달려올 정도면 아주 중요한 용건이겠죠? 그냥 안부 인사라면 날 밝을 때 와서 해도 되는 거니까.”

“아유, 스승님께 드리는 안부 인사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사에 낮밤 없지.”

“아무리 빈말이라도 참 성의 없네.”

망설임 없이 이죽인 세경은 짐승 소리마저도 나지 않는 깊은 산에 이르러서야 영목을 놓아주었다.

“혼자 온 걸 보니 영목이 항상 금붕어 똥처럼 달고 다니던 그 인간은 자나 봐요?”

“우리 윤이 도령같이 생긴 금붕어 똥이 세상천지에 어딨습니까.”

“어머. 편드는 거 봐.”

샐쭉 눈을 흘기는 그녀에게 영목은 품에 넣어 두었던 묵직한 꾸러미를 꺼내 건넸다.

“…괜한 심술 그만 부리시고 이거나 받으십시오. 제가 번 돈입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애 키워 놨더니 쥐꼬리만 한 용돈을 받는 날이 오네.”

영목이 내민 회색 꾸러미를 열어 본 세경이 “애걔.” 하는 빈정거림을 흘리며 콧잔등을 슬쩍 찌푸렸다.

“최영목이 허구한 날 노름판에 붙어산다고 온 한양 바닥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딴 돈이 고작 요것뿐입니까?”

“노름판에서 딴 게 아니라 제가 당당히 번 겁니다. 연수산에서 나는 연초잎 팔아 모은 건강한 수익이에요.”

낙엽 바스락대는 가을밤 깊은 산중에 땅의 용의 비웃음이 잔잔히 퍼졌다.

“영목은 하나뿐인 내 제자니까 딱 잘라 말할게요. 영목, 그대는 머리보다 몸을 잘 써. 길지 않은 인생이니 잘하는 것을 해요.”

“…….”

“보면 볼수록 장사에도 도박에도 영 재능이 없는데. 왜 미련을 못 버리나 몰라?”

맹세코 영목은 도박을 위해 투전판을 기웃대는 게 아니었다. 한성 바닥에 나뒹구는 소문을 모으고 떳떳하지 못한 뒷이야기들을 주워듣기에는 투전판이나 기방만 한 곳이 없어 드나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세경에게 말해 봤자 코웃음이나 칠 게 뻔하였기에 영목은 입꼬리를 끌어 내리면서 투덜댔다.

“…더러운 일 않고, 남 속이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번 것만 따로 모은 돈이라고요.”

“어련하겠어.”

“제가 스스로 벌어들인 것 중에서 부끄럽지 않은 돈만 꼬박 몇 년을 모았는데 고작 요만큼이네요.”

입을 삐죽인 세경은 영목에게 회색 주머니를 돌려주었다.

“쥐꼬리만 한 돈, 마음만 받겠어요. 애 키우니 커서 스승 용돈도 챙겨 주고. 아주 귀엽고 기특해.”

“용돈 드린 거 아닙니다. 공물로 드리는 거지.”

공물이라는 말에 세경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틈에 영목은 세경의 손 위로 다시 돈 꾸러미를 올렸다.

“싫어. 이런 공물 안 받을래요.”

세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정갈하게 정성 들인 공물을 받으면 신은 인간에게 그만큼을 돌려주어야 한다. 영목이 그 균형의 규칙을 모를 리 없었다.

영목은 범산 만신의 기운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식이었다. 회색 꾸러미는 그런 인간이 오랜 기간 수고하고 노력하여 모은 재산을 털어 바치는 공물이었고.

세경은 영목이 이 회색 꾸러미를 내밀어 제게 무엇을 요구하려는지 듣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회색 주머니를 받을 마음 없이 손을 내밀어 흔들며 가져가라고 재촉했다.

“싫어요. 진짜 싫어. 안 받을 거예요.”

“아니, 아무리 쥐꼬리만 한 돈이라도 그렇지……. 제자가 드리는 공물을 이렇게 거절하시면 저 상처받아요.”

영목은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어깨만 으쓱였다. 영목이 태연한 척할수록 세경의 얼굴은 더 차갑게 굳었다.

“나는 그대에게 이런 제사를 받고 싶지 않아요.”

“에이, 튕기신다.”

“…하지 말아요, 영목.”

“스승님은 제삿밥 아쉬울 일 없는 땅의 신이란 걸 깜빡했네. 제 쌈짓돈 쬐끔 더 얹어 드릴게요.”

능청맞게 입술을 길게 늘인 영목이 품에서 엽전 한 개를 꺼내 세경이 흔드는 주머니 위에 정확히 던져 올렸다. 그리고 이마 위까지 손을 모아 올렸다.

세경이 큰절을 하려는 영목에게 낙엽을 한 움큼 쥐어 냅다 던졌다.

“이딴 제사,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걸요. 제가 말 지지리 안 듣는 것도 스승님에게서 배웠죠.”

영목은 악동 같은 얼굴로 싫다는 세경에게 끝끝내 무릎을 굽혀 큰절을 했다. 세경이 진저리를 쳤다.

“이 제사를 대가로 나한테 그 도령을 맡길 생각이잖아요. 그 도령은 내 곁에 안전히 숨겨 두고 영목이 대신 싸우러 가려는 거잖아!”

“맞아요. 대방 마님이 도련님 지키라고 주시는 금액이 아주 쏠쏠하거든요. 돈 받은 만큼 일해야죠. 겸사겸사 대들보에 흠집도 내고.”

변명하거나 둘러댈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 당당함에 세경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눈에 힘을 주고 영목을 노려보았다.

“이 조선은 영의정, 우의정 같은 놈들이 이고 지고 버티는 나라랍니다. 영목이 휘두르는 그 싸구려 칼로는 대들보를 긁을 수조차 없을 거예요.”

“압니다. 알지만 별수 있나요. 해 보는 데까진 덤벼 봐야지.”

영목이 옆구리에 찬 싸구려 장검을 장난스레 툭 치면서 씨익 웃었다. 세경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면서 별만 한가득인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승산 없는 싸움은 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쳤어야 했는데.”

“제가 까마득히 어릴 때부터 대들보를 부술 수 있겠느냐 물으신 건 세경 마님입니다.”

세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대들보 부수는 데에 쓰려고 키우신 거면서 뭘 그러세요.”

“…내 탓이네. 내가 잘못했네.”

어깨를 늘어뜨린 세경은 손에 쥔 회색 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 무거울 리 없는 엽전 꾸러미가 그녀의 삶에서 들어 보았던 것 중 가장 무겁게 느껴졌다. 자책하는 땅의 용을 향해 영목이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인간은 남 탓을 해야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족속이래요. 스승님도 오래오래 정신 줄 붙들고 사시려면 남 탓 하세요.”

“그 어미에 그 자식이라니까. 말이나 못하면.”

낙엽 한 무더기가 영목을 향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영목은 피하지 않고 마른 빗줄기 같은 붉은 나뭇잎을 맞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스승님, 그 돈은 제가 가진 것 중에 제일 착하고 귀한 것만 모은 겁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제사 중 제일 정결한 것이에요.”

“알아요. 부담스러울 만큼 잘 알지.”

“그 부담을 그대로 간직하셔서 윤이 도령을 지켜 주세요.”

“…….”

“윤이 도령은 밉살맞도록 저 혼자 정갈하고 반듯하답니다. 죄다 탁하고 구깃구깃한 세상에 그런 인간 하나쯤은 오롯이 지켜 주고 싶지 않습니까?”

세경은 고집스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제 일에 저가 더 크게 화를 냅니다. 자기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면서요.”

“…….”

“저는 저를 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에게 약한가 봐요. 어머니가 낳자마자 스승님께 버리고 간 애라서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는 말에 세경이 샐쭉 눈을 흘겼다. 영목은 개구진 눈웃음으로 스승의 비난을 흘려 넘겼다.

“저는 스승님의 취향을 그대로 배웠습니다. 덕분에 스승님이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노여워하시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요.”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노여울 짓을 합니까?”

“네.”

콧방귀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한적한 가을 산에 크게 울려 퍼졌다. 영목은 스승의 불만이 퍼져 나가는 밤의 숲을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를 읊었다.

“제 어미는 서릿재 어르신이 닮지 말라 하였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지요. 남가 대방 마님은 세경 마님이 역정을 내실 정도로 차분히 반듯하고요.”

“하…….”

“그래서 스승님은 제 어미와 대방 마님의 잘못된 선택에 노하셨던 것 아닙니까? 아까운 사람들이 아까운 선택을 해서.”

세경은 고개를 젓다가 이마 위에 흐트러진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나한테 이런 짓을 하네. 내게는 영목이 제일 아까운데.”

“아니까 하는 짓입니다. 스승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만큼 제 부탁을 제대로 들어주시리라 믿으니까요.”

“못됐어.”

“또한 저는 스승님께서 수많은 실패를 만나셨음을 압니다. 수많은 실망을 겪으셨다는 것 또한 알아요.”

세경이 시무룩한 눈으로 영목을 바라보았다.

괴팍하다, 개차반이다 악명 높은 세경이지만 영목은 그녀의 광기가 인간에 대한 염려에서 왔음을 알았다. 다른 모든 신들이 그놈의 ‘원칙’을 고수하느라 인간을 돕지 않을 때, 오직 세경만이 제집 문을 열어 주고 숨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세경의 광기는 도움과 친절에 대한 대가였다. 그녀는 신은 인간 생사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겼기에 미쳐 가고 있는 것이었다.

영목은 다정함이 병이 되어 미쳐 가는 자신의 스승에게 약간의 희망이 되어 주고 싶었다.

“스승님이 보고 겪으신 그 모든 실패가 완전한 실패는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릴게요. 살고 또 살고 실망하고 또 실망해도 다음을 기대해 보는 재미가 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제 제사를 받으시고 윤이 도령을 맡아 주시면요.”

“…투전판에 들러붙어 있더니 용에게 내기 거는 잔재주까지 배워 왔어요?”

“겸사겸사 배웠지요.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제가 또 배우는 건 곧잘 하잖아요.”

“…배우라는 건 안 배우고 쓸데없는 것만 배워 왔어.”

영목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윤이 도령은 제가 보아 온 누구보다 맑고 반듯합니다. 저만큼이나 세경 마님도 그 친구를 좋아하시리라 자신해요.”

세경이 코웃음을 쳤다.

“하! 신의 제자라는 녀석이 지 편들어 주는 사내에게 홀랑 넘어가서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해?”

“제가 윤이 도령의 신이라던걸요.”

“…뭐?”

“인간이 신이라고 믿어 주면 신이 되잖아요. 저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신보다 손 닿는 곳에서 날 필요로 하는 이의 손을 잡는 신이 되려고요. 스승님처럼.”

기가 찬 얼굴로 영목을 한 번, 서릿재가 있는 쪽을 한 번 노려보던 세경이 마른세수를 했다.

“사랑에 빠진 얼굴은 참 한결같이 달기만 하더라.”

“어우. 제 얼굴에서 단내가 납니까?”

영목은 너스레를 떨면서 자신의 손목을 코에 갖다 대고 킁킁거렸다. 세경은 그가 떠맡긴 회색 꾸러미를 한 손으로 옮겨 쥐고 그 위에 올려진 엽전 하나를 다른 손바닥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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