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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30화 (30/157)

30화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천주쟁이들 작작 거둬 먹이시라고요! 어찌나 촘촘하게 그물을 쳐 놨는지 도저히 증거 발뺌할 도리가 없습니다.”

“으음. 도리가 없으면 어찌할까.”

“제 말을 대체 어디로 들으셨어요? 재산 정리하여 연수산으로 숨으시라니까요!”

“연수산이 천혜의 개미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조선 팔도에 사람 숨어 지내기엔 거기만 한 곳이 없습니다.”

대방 마님은 대답은 않고 그저 웃기만 하셨어. 자네가 가끔 보이는 그 이상한 고집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윤이 도령은 생긴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대방 마님을 꼭 빼닮았더구만. 잔소리하는 내 속만 타들어 갔네.

“백 보 양보해서 우의정 김서량이 하는 짓은 이해하겠습니다. 소박맞고 내쫓겨 죽은 듯이 살 줄 알았더니 약 올리는 것처럼 한성에서 제일 높은 누각 세워 잘 먹고 잘 사는 전 며느리가 얼마나 얄밉겠어요.”

“약 올리는 것 맞아. 얄밉고 속 터지라고 일부러 더 누각을 높이 세우고 훤히 빛을 밝히고 있는 거란다. 그래서 이름도 교월루라 지었지.”

…자네가 가끔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심술도 대방 마님과 꼭 닮았어.

나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대방 마님의 대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고개를 푸르르 털고 영의정 욕으로 방향을 틀었네.

“영의정 영감 심보도 참으로 못되었지. 김욱진이 강자영 손목 한번 안 잡아 주는 게 어찌 대방 마님 탓이랍니까? 강자영이 그렇게 귀애하는 손녀딸이었다면 애초에 처 있는 사내와 혼사를 치르게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게나 말이다.”

교월루보다 더 환한 얼굴로 웃으시던 마님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셨네. 나는 열이 뻗친 김에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다 털어놓기 시작했어.

“신방에서 맨발로 쫓아낸 놈들이 누군데, 왜 혼자 잘 살고 있는 남의 집 귀한 딸내미를 죽일 듯 원망하는지. 전 진짜 양반님네 머리 굴리는 방식을 모르겠습니다.”

“음……. 그러는 영목이 너는 왜 종종 윤이를 원망하니?”

“네에? 제가요? 제가 윤이 도령을 왜 원망합니까?”

갑작스럽게 깊이 들어오는 물음에 나는 명치께를 단도로 푹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되었어.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면서 두 손을 다 내저으며 부정하자 마님은 목까지 젖혀 웃기 시작하셨다네.

“영목아, 네 탓 하는 거 아니다. 난 지금 널 놀리는 거야.”

“뭔 장난을 자기 아들 가지고 치십니까…….”

“내 아들과 내 아들 정인으로 치는데, 왜?”

컥.

마신 것은 차가운 새벽 공기밖에 없건만. 사레가 들린 것 같아 나는 기침을 콜록였어. 대방 마님은 키득키득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내 어깨를 두드리셨지.

“네 어미가 그러더라. 남 탓 하는 것이 사람 본성이라고. 남 탓 하며 살아야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라나.”

“윤이 도령은 아니 그러잖습니까.”

“그래서 영목이 네가 우리 윤이를 원망하는 거잖니. 다들 남 탓 하고 원망하는 혼탁한 세상에서 윤이만 저 홀로 맑게 굴어서.”

“…….”

“원망만큼, 부러움만큼 윤이를 좋아하는 거고.”

부정할 수가 없었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이,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훑어 내 주시는데.

그랬네. 나는 추레하고 구질구질한 진흙탕 속에서 오롯이 꼿꼿하여 자네를 좋아하네. 동시에 어찌 저 혼자서만 그렇게 사는가 싶어 밉기도, 부럽기도 하고.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아. 눈 쌓인 한겨울에 메마른 우물가에서 고약한 노랫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던 자네를 처음 본 그날부터 말이야. 그날 느낀 질시와 부러움이 자네를 알고, 겪고, 지켜보면서 홀로 간직할 설렘으로 변하였지. 나 혼자만 깊이 숨겨 둔 줄 알았는데, 대방 마님은 어떻게 눈치채셨을까.

모르긴 몰라도 퍽 무안해하였을 내 얼굴을 보면서 대방 마님은 나즉하게 후후 웃으셨다네.

“한강에 던져 넣으면 입만 둥둥 뜰 거라는 영목이 네가 말문 막히는 걸 보니 참 고소하다.”

“…귀한 아들 노리지 말라고 혼을 내세요, 차라리.”

“왜 혼을 내니? 나는 너희를 보고서야 세경 마님이 왜 그런 소망을 품고 사시는지 이해했는데.”

“제가 아는 스승님의 소원은 서양 용의 모가지를 뽑아 서천 꽃밭에 심는 거였는데요…….”

웅얼웅얼 대꾸하자 대방 마님은 이번엔 소녀처럼 키득대셨어. 한양에서 제일 좋은 집터, 제일 높은 누각에 못 박힌 듯 사시는 대방 마님에게도 연수산 서양 용의 악명은 전해지고 있었던 모양이더군.

꽤나 한참 동안 가볍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던 대방 마님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다시 말을 이으셨어.

“세경 마님은 말이다… 누구든 좋으니,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으신 게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서양 동화처럼 말이야. 자신의 삶이 행복지 못하니 남이라도 그리되기를 바라시는 게지.”

“그 ‘남’이 저랑 윤이 도령이라고요? 아휴, 무슨 그런 우스운 소릴.”

“세경 마님이 보살펴 주신 인간들 중에서 네 엄마와 나는 확실히 글렀잖니. 그럼 이제 남은 건 너뿐이야.”

빨리 도망갈 준비를 하시라 설득하러 왔다가 별천지 중매쟁이 같은 소리를 들을 줄 누가 알았겠나.

나는 기가 막혀 허리에 손을 얹고 대방 마님을 쳐다보기만 했네. 다소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시던 대방 마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하늘로 옮겨 가셨어.

“네 어미의 사랑은 너무 커서 제 생을 망쳤고, 내 사랑은 미련하여 나를 망쳤어.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내 집안까지 망쳤으니 내가 훨씬 더 몹쓸 인간이지.”

“대방 마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 표정 하나 없이 마냥 싸늘하던 대방 마님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로 웃고 또 웃는다 싶더라니. 그분은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각오하고 계셨던 거였어. 그랬으니 내 도망가라는 설득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거지. 빌어먹게도.

“윤이를 잘 부탁한다. 그 아이만 안전하게 피신시켜 준다면 남가 상단의 모든 재산은 영목이 네 손에 쥐여 주마.”

“저같이 근본 없는 놈을 뭘 믿고 그런 무서운 담보를 거신답니까?”

대방 마님이 대체 뭘 위해 닥쳐오는 죽음을 이 자리에서 받아들이려 하는지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대방 마님의 부탁을 삐딱하게 받아쳐 버렸지. 무어라 꾸짖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건방진 대꾸였는데도 그분은 평온하기만 하셨어.

“너는 범산 기운을 그대로 품은 큰무당의 아이잖니. 신과 인간을 잇는 당골이 낳아 땅의 용이 보호하고, 먹이고, 가르친 아이. 너보다 더 근본 대단한 아이는 흔치 않단다.”

그 순간 대방 마님의 눈동자엔 이상한 희열이 담겨 있었다네. 먼동이 터 오는 새벽하늘을 담은 눈동자였어. 시선은 저 하늘 끝에 둔 채, 마음은 자네에게 보내고, 음성은 나를 향해 있었지. 그래서 나는 또 자네가 부러워지고 말았어.

“매번 이렇게 윤이 도령을 부러워하게 하신다니까.”

“응?”

“윤이 도령은 온갖 것을 다 지닌 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대방 마님 같은 어머니까지 가졌잖습니까.”

그냥 곱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장 한 장 켜켜이 쌓은 견고하고 높은 담장 같은 어머니. 드높은 성벽처럼 앞에 서서 버티고 있는 사이에 멀리 도망칠 방도를 궁리해 주는 어머니.

내가 자네를 부러워하는 많고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대방 마님의 성정이라네. 장담하는데 자네가 다른 여인의 아들이었다면 나는 자네를 이렇게까지 마음 깊이 품지는 않았을 거거든.

질시도, 은애도 죄다 들킨 마당에 숨길 필요 무어냐 싶어 나는 내 마음을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냈어. 그러자 언제까지나 암청색 하늘만 보고 계실 듯하던 대방 마님이 새벽하늘을 담은 음성으로 물으셨네.

“영목아, 네 어머니가 왜 너를 세경 마님에게 맡기었을 것 같니?”

“원치 않는 수태라서, 욕보아 낳아 놨더니 사내아이조차 아니어서요.”

“그래……. 처음 마음은 그러하였을지도 모르지마는…….”

말꼬리를 흐리는 차분한 음성을 따라 아침이 다가오기 시작했네. 지리멸렬한 출생을 떠올리며 입술을 뒤틀고 있기에는 과하게 쾌청하고 아름다운 가을 아침이었어.

“전대 용께서는 삶이 지긋지긋하여 세경 마님께 여의주를 물려주고 떠나셨단다. 세경 마님 또한 여의주 물려줄 이가 필요하여 널 거두신 거야.”

새벽을 가르고 찾아온 아침 같은 음성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건넸지.

“네 엄마는 네게 길을 터 주었던 거라고. 인세에선 섬김받기 어려울 테니 용으로 섬김받고 살라는 마음으로. 그런 대단한 어미를 두고 대체 누굴 부러워하니?”

잘 들었나? 똑똑히 들었지? 나는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이라네. 자네에게 홀리지만 않았어도 용이 되실 몸이었다니까.

지금이야 이렇게 우쭐대네만… 사실 대방 마님께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엔 코끝이 시큰하게 아리는 바람에 괜히 혀만 한 번 차고 죄 없는 하늘만 노려보았어. 대방 마님과 나는 같은 하늘을 서로 아주 다른 마음으로 함께 바라보았지.

“있잖니, 영목아. 며칠 전에 세경 마님이 기별도 없이 우리 집에 놀러 오셨었단다.”

“스승님도 참……. 오셨으면 얼굴이나 보고 가시지.”

우리는 꽤 한참이 지나서야 평온한 담소를 나누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서로의 얼굴이 아니라 밝아 오는 하늘에 눈을 두고.

대방 마님은 이미 오래전에 어떻게 생을 마칠지 마음을 정하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지. 내가 아무리 설득하려 해 봤자 먹히지 않을 게 뻔하니… 별수 있나. 수다나 떠는 수밖에. 남가의 사람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말릴 도리가 없음을 나는 알거든.

내가 회유와 애원을 완전히 포기하자 대방 마님은 한층 더 홀가분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셨어.

“그렇지 않아도 네 얼굴 보러 오셨다더라.”

“근데 왜 얼굴 안 보고 그냥 가셨대요?”

“때마침 너랑 우리 윤이가 투닥대는 걸 딱 보셨거든. 한참 쳐다보시다가 잔뜩 골이 나서 팽 하니 가 버리셨어.”

으음. 나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라고 자부하는데도 스승님이 화내는 이유만큼은 가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네.

내가 고개를 갸웃대자 대방 마님이 쭈욱 팔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시더군. 남가 상단에서 남가의 본채로 이어지는 문 쪽을 가리키셨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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