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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28화 (28/157)

28화

“도련님, 저야 돈 받고 하는 일이니 당연히 도련님께 맞춰야지요. 짐이라니 무슨 되도 않는 소리십니까요.”

그리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네 손에 들린 소반 보따리를 빼앗아 들었어. 꽤나 분한 얼굴이라 아주 귀엽더구만. 나는 내친김에 자네를 조금 더 놀려 먹기로 작정했지.

“도령같이 귀여운 짐은 생전 본 적도 없어. 그러니 앞으로 그런 이상한 소리는 하지도 마.”

“그동안은 제가 싫어서 피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싫긴. 나 귀여운 거 엄청 좋아해.”

다시 발끈하여 입술을 앙다물 줄 알았건만. 자네는 표정을 풀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확인했어.

“정말로… 짐스러워서 내내 피하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싫고 짐스러웠던 게 아니라면 왜 저를 피하셨습니까?”

대체 내가 언제, 어떻게 저를 피했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실소를 터뜨렸었던 걸 기억해. 최 역관에게 먹일 약을 보냈던 게 바로 자네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지.

‘제 딴에는 약을 보내면 내가 답례 삼아 인사라도 오겠거니 생각한 듯한데… 나는 어떤 새끼가 쓸데없는 짓을 하냐며 거절해 버렸던 거구만?’

멋대로 호의를 베풀고, 내가 거절한 걸로 저를 피한다고 착각해 버리다니. 어린애다운 지레짐작에 연신 웃음만 나왔지.

“도령이야말로. 교월루에서 날 보자마자 팩 되돌아 들어갔으면서 무얼.”

“그건…….”

“그건?”

“절 싫어하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를 보면 호위도 안 하겠다 하실 줄 알고.”

뭔 소린가 싶었다네. 내깟 것이 천하의 윤이 도령을 싫어할 리 없었을뿐더러, 정말 싫어서 피했다 한들 대방 마님이 주신 돈 꾸러미는 거부하기엔 너무나 묵직했다고.

“뭐래……. 나 같은 놈이랑 친하게 지내어 도령에게 좋을 것 없을 듯하여 알아서 멀리해 줬더니. 혼자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어? 남의 배려도 모르고 생사람을 잡네.”

“참말이십니까?”

“도령한테 거짓말해서 뭐 해? 내가 해로운 놈인 건 한양 바닥이 다 아는데.”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 자네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아니, 세상에, 남가에 연줄 한번 대 보려는 이들이 줄을 서는 판에 어떤 바보 천치가 남가의 남윤을 짐 취급 해 피한단 말인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구만.

내가 별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다 듣는다며 귀를 후비적대자 자네는 빛 고운 옷자락을 꾹 쥐었다 놓으며 이렇게 말했어.

“한양 바닥이 틀렸습니다.”

“어?”

“제게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애 입에서 나올 말인가, 이게?

“대방 마님은 아들을 대체 어떻게 키우시길래 열두 살짜리가 이런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읊누?”

내가 내 머릿속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내뱉자 자네는 다시 말없이 표정으로만 발끈했네.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나는 예전부터 자네가 나를 보며 곧잘 짓는 표정이 참 좋았던 것 같아. 약간 짜증스러워하고 한심해하는 동시에 나에 대한 믿음을 숨기지 않는 그 표정이.

자네는 내가 참 좋아하는 그 얼굴로 딱 잘라 말했어.

“어머니께서는 저를 남가 상단의 후계로 키우셨습니다. 덕분에 귀한 것을 알아보는 안목은 어머니께도 지지 않지요. 호위께서 제게 이롭고 귀한 분임을 저는 압니다.”

아이답지 않은 말투에 아이다운 맹목.

고백하자면 나는 이 순간 보여 준 자네의 눈빛이 적잖이 당혹스러웠다네. 나를 자네처럼 보아 주는 이는 자네뿐이었으니. 스승님은 항상 나를 시험하는 눈을 하고 계셨거든. 비형랑 어르신이나 대방 마님은 날 불쌍히 여기셨고, 한양에서 만난 이들은 다들 나를 경멸했단 말이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나를 보는 눈길이 아주 낯설었어. 무한한 신뢰와 호감.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낯선 호감이 쑥스러워서 괜히 자네를 놀렸지.

“도령, 물건 보는 법만 배우지 말고 사람 보는 법도 배워.”

“저는 사람도 잘 봅니다.”

“날 믿고 따르려는 것만 봐도 사람 보는 눈은 영 아닌 것 같은데?”

나보다 한참 작은 소년은 나보다 훨씬 차분한 눈으로 내 말을 단칼에 부정했어.

“믿을 수 있는, 좋은 분이십니다.”

“허허. 세상천지 믿을 놈이 없어서 날 믿어? 남가 상단 앞날이 캄캄하구만.”

과한 칭찬이 민망해 나는 이죽거림으로 대꾸하고 성큼성큼 걸어갔어. 자네는 잰걸음으로 따라붙으면서 끈질기게 내 칭찬을 늘어놓았지.

“혼자 버티고 견디는 게 최선인 줄 알았던 제게 숨거나 피해도 된다 가르쳐 주신 분이니까요.”

“…그날 그건 그냥 지나가는 길에 그런 거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제 앞을 막아 주지 않았습니다.”

“허 참. 한양 사람들은 매정하구만.”

내가 혀를 차자 자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곧 입을 열고 또박또박 생각한 바를 읊어 대더군.

“무엇보다도요, 사람들은 제게 친절을 베풀고 대가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윤이 도령의 선물을 거절했다? 그래서 날 믿는다고?”

“네.”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는 즉답이었네. 그 확신 어린 눈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이 도령은 이렇게나 올곧게 날 보는구나, 생각하니 나란 인간이 조금은 가치 있게 느껴졌거든.

내가 아는 나는 죽은 어미 내버려 두고, 사람 죽이고, 갓난아기 버리고, 아비 죽이려는 천하의 쓰레기였는데… 자네 눈 속의 나는 좋은 사람인 것 같았어. 나 같은 놈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네.

나 같은 몹쓸 놈을 좋은 사람 보듯이 봐 준다는 게… 왜 그렇게 행복하던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도령이 믿을 만한 인간이 아닌 것 같긴 한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곁눈질로 자네를 스윽 쳐다보았네.

“뭐어… 잘됐구만. 나는 나이에 안 맞게 철딱서니 없고, 윤이 도령은 나이답지 않은 애늙은이고.”

“…….”

“둘이 더하면 딱 보통의 한 사람 몫 정도 되겠구만. 잘 부탁해, 도령.”

빨리 철든 아이가 조금 안타깝고 꽤 많이 부러워서 건넨 말이었는데, 자네는 뭐가 불만스러운지 입을 슬쩍 삐죽이고는 산길을 걷는 데에만 매진하더군.

“내가 윤이 도령이 생각하는 그런 놈은 절대 아닌 것 같지만… 도령이 원하면 업고도, 안고도 산길을 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호위라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어. 기왕 비싼 돈 주고 고용했으니 제대로 써먹으라고. 알았지?”

“업히거나 안기진 않을 겁니다.”

“두고 보자고.”

난 그냥 비웃고 말았지. 한참이나 뾰로통하게 걷던 자네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물었어.

“최 형은 연수산에서 오래 사셨다지요?”

“최 형?”

“이리 부르는 건 싫으십니까?”

“아니, 싫다기보담은…….”

처음 듣는 호칭이었네. 한양으로 온 뒤엔 이놈 저놈, 이 새끼 저 새끼 소리만 듣고 살아서 그런가… 최 형이란 울림이 썩 나쁘지 않았어. 조금 간질간질하면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니까?

딱 내 기분 같던 가을바람을 맞으며 자네를 마주 보았던 순간을 기억해. 익숙지 않은 산행으로 조금 상기된 뺨,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며 들썩이는 어깨, 나를 올려다보는 맑은 눈동자. 귀애받고 자란 도령이라 구김살 없이 사람을 대하는가 보다 싶었지. 구깃구깃 자란 나는 자네의 맑음을 부러워하면서 낙엽을 슥슥 밀어 치우며 대충 고개를 주억였네.

“연수산에 한참 살다가 범골에 자리를 잡았지. 아마 한양 전체를 다 뒤져도 나만큼 연수산을 잘 아는 놈이 없을걸?”

그런 허세를 부리면서 괜한 기지개를 켰어.

“범산 창귀들은 엄청 드세. 내 뒤로 숨으라 하면 도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숨어.”

“예.”

농담으로 흘려들어도 될 말이었으나 자네는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와 걸음을 맞추었어.

“그것만 내 말 듣고, 나머지는 도령이 내게 명령하는 거야. 업어 달라, 쉬어 가자, 느리게 걷자, 하면서. 알아들었어?”

“업어 달라는 건 빼고요. 나머지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 윤이 도령이 이상한 고집이 있단 걸 이때 알았어야 했는데. 그놈의 똥고집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꺾었어야 했는데. 아마 이때, 자네 귀여움에 눈이 멀고 최 형이란 말에 귀가 멀어서 내 분별이 흐려졌던 게 분명해.

시간은 참 잘도 흘렀네. 내 등 뒤에 쏘옥 숨겨지던 도령이 나보다 훌쩍 커졌으니 말 다 했지.

자네가 크고, 내가 약간 철들고, 최 역관이 좀 더 병드는… 이런 좋은 일만 있으면 참 좋았으련만. 세월의 흐름을 따라 안 좋은 일도 생겼어.

“대방 마님, 영의정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영의정. 그리고 빌어먹을 우의정 김서량.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네. 그래서 이번 산행을 떠나기 직전에 나는 급히 대방 마님을 찾아뵈었지. 대방 마님은 이 다급한 상황이 다 남의 일인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실없이 피식 바람 소리를 흘리셨어.

“영목이 네가 그런 걸 어찌 아니? 또 투전판이나 기방에서 헛소문이 돈다던?”

“이리 느긋하실 때가 아니라고요! 제 정보통이 투전판이나 기방에만 있는 것 같으십니까?”

대방 마님은 조급해하는 나를 보면서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얼굴로 빙긋 웃으시더군. 도통 믿어 줄 것 같지 않아 나는 숨기려던 사실을 털어놓아 버렸네.

“마님 전남편의 현 부인을 제가 꼬셨습니다.”

“무… 뭐?”

“김욱진의 처, 강자영을 홀렸습니다.”

“…….”

“강자영이요. 우의정 김서량의 아들과 혼인한 영의정의 손녀. 대방 마님의 소꿉친구 강자영.”

대방 마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어.

“나 참. 제가 한양에서 처음 얻은 일자리가 기방 문지기 노릇이었습니다. 보고 들리는 게 온통 사람 홀리는 기술인데 제가 이 얼굴로 규방 마나님 하나 못 꼬시겠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네가…….”

대체 왜 믿어 주지 않는지,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탕탕 치면서 영업 기술까지 털어놓았지.

“마님 전남편께서 강자영의 손목 한번 아니 잡아 주었다더이다. 유혹하는 김에 못 해 보신 것 실컷 해 드렸지요.”

“영목아, 제정신이냐!”

“아, 그럼 어찌합니까? 저라도 김씨 집안 근처에서 동태를 파악해야지. 앉아서 당하실 겁니까?”

“하……. 얘가 정말…….”

대방 마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끄응 앓으셨어. 나야말로 앓아눕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지금 당상관 어르신이 연행을 떠나 계시지요? 그 틈을 타서 남가가 천주쟁이들이니 역적이니 애먼 누명을 덮어씌울 게 뻔합니다. 혹시라도 그 일에 방해가 될까 하여 마님 전남편을 냅다 평안 감사로 갖다 꽂은 거라더이다!”

“김욱진이 평안도로 갔다고……? 그것도 자영이가 알려 주던?”

“네에!”

마님은 여전히 얼굴을 감싼 채로 길게 한숨을 내쉬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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