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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27화 (27/157)

27화

나는 다 죽어 가던 갓난아이를 내려놓았던 그 자리에 도착해 자네의 손을 놓았네. 잡고 있던 손을 쳐다보던 자네가 더없이 정중하게 안으로 들어오길 권하더군.

“들어와서 요기라도 하고 가시지요.”

“됐네. 어린애 집에 데려다주고 생색내면 모양 빠져.”

“…….”

“대방 마님께 시종이라도 하나 붙여 달라 해. 이 험한 세상에 뭔 일 당할 줄 알고 어린 도령 혼자 다니나? 응? 겁도 없이.”

나는 자네의 청을 거절하고 종자를 하나 고용하라는 잔소리까지 덧붙인 뒤에 미련 없이 몸을 돌렸어. 때마침 담장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와 코끝이 시큰해졌거든.

그 뒤로는 일부러 자네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 최 역관의 종 노릇을 하며 온갖 추잡한 짓을 빠짐없이 보고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만 힘썼지.

“아버님, 흘리지 말고 꼭꼭 씹어 드셔야지요.”

이를테면 음식에 약을 탄다든가.

“다 드시면 탕약을 올리겠습니다. 기방 행수님께서 좋은 약재가 들어왔다고 들려 보내 주셨어요.”

약에 약을 섞는다든가.

“고맙구나, 영목아.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데.”

“협박하려고 쳐들어온 저를 두 팔 벌려 거두어 주셨으니… 제가 아버님께 보답할 길이 이것뿐이잖습니까.”

이렇게 넉살 좋은 웃음으로 사람을 등쳐 먹는 일 따위 말일세.

자네가 종종 잔소리했었지? 뭐든 대충 한 귀로 흘리지 말고 복습도 좀 하고 되새김도 하라고.

자네가 몰라줄 뿐 사실 나는 복습과 실험을 철저히 반복하는 꽤 괜찮은 학생이라네. 도박판에서 술에 타 호구 퍽치기 하는 데 쓰이는 약을 알게 되면 조금 훔쳐 와 된장국에 타 본다거나 양귀비를 갈아 탕약에 섞어 본다거나 그랬다니까? 배울 마음이 없어 그렇지… 어찌저찌 배우면 또 배운 대로 잘 써먹었다네, 최 역관에게.

노력이 결실을 보여 내가 최가에 들어간 지 반년 만에 최 역관이 쓰러졌지. 먹인 약이 너무 많아 무어가 원인인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야.

최 역관은 거동을 못 할 뿐 주둥이는 팔팔해서 이래라저래라 종일 잔소리를 했다네.

“영목이 네가 남가 윤이 도령에게 은혜를 베풀었다지?”

“…제가요?”

“남가에서 탕약을 보내왔다.”

아… 젠장. 고마우면 돈이나 주지, 누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비싼 약 먹고 나아 버리면 안 되는데.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최 역관은 누렇게 뜬 얼굴로 잔소리를 시작했어.

“남가와 인연을 놓지 말고 꼭 남가 상단에서 한자리 차지하여라.”

“네, 아버님.”

“이딴 약 말고 당상관 연행에나 끼워 주면 참 좋을 텐데. 아니 그러냐?”

남가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몇 번 스치듯 마주쳤을 뿐인 어린 도령의 얼굴을 떠올리게 됐어.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죄 지니고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던 윤이 도령의 얼굴을. 부질없이 비교하고 부질없이 열등감을 느끼고 부질없이 화가 날 때마다 내가 최 역관에게 더 독한 약을 먹였단 걸… 자네는 모를 거야.

내가 먹여 주는 약을 반은 흘리고 반은 삼키면서 최 역관은 쉴 새 없이 떠들었어.

“당상관 어르신이 우리 같은 것들을 연행에 붙여 줄 리 없으니 윤이 도령에게나 잘해 봐.”

“예.”

“그 애가 곧 남가 상단을 이어받을 것 아니냐? 살살 구워삶아 보란 말이다.”

늙은이가 욕심도 과하지.

속으로 최 역관의 욕심을 핀잔할 때마다 그 핀잔이 고스란히 내게 독이 되어 돌아왔어. 나야말로, 대들보를 부수겠다는 내 목표야말로 과욕임을 모르지 않았거든. 아비나 자식이나 똑같이 욕심 많은 것들. 부정하려 해도 나는 어쩔 수 없는 최 역관의 자식인가 보아.

치미는 쓴 물과 자조를 삼키며 만들어 낸 웃음으로 최 역관을 안심시키는 것. 그게 내 일상이 되었어.

“왜 대답이 없어? 알아들었느냐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버님은 그저 건강만 하십시오.”

바로 다음 날, 남가의 심부름꾼이 또다시 몸에 좋은 약재를 챙겨 왔길래 그대로 돌려보냈다네. 부담스러우니 마음만 받겠다고 말이야. 최대한 고통스럽게 앓다 죽길 바라며 최 역관에게 온갖 나쁜 것들을 다 먹이고 있는 판에 몸보신이 웬 말인가?

그렇게 병간호 아닌 병간호에 1년을 고스란히 쏟아부었네. 고약하고 나쁜 약들을 열심히 먹였단 소리지.

그러고도 반년이 더 지난 어느 날, 최 역관의 부인이 내게 곳간 열쇠를 내밀더군.

“받아라.”

“곳간 열쇠를 왜 제게 주십니까?”

“네가 이 집 아들이니까.”

“와……. 담 넘어 찾아와 낫까지 휘둘렀는데도 이 집 아들입니까?”

여자는 한참이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댔어.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고 이렇게 오래 뜸을 들이나 싶더니…….

“네 어미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하든가.”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더구만.

“쌀 한 섬에서 곳간 전체라. 어머니 목숨값이 2년 만에 멋지게 치솟았네요.”

나는 도망치듯 돌아 걷는 여자의 등 뒤에 진심을 담아 비아냥댔네.

여자는 그길로 도망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들리는 이야기로는 남산에 숨어 사는 화적 중 하나와 눈이 맞았다나. 어떤 놈과 어디서 살아도 최 역관과 사는 것보단 낫겠지 생각하며 찾지 않았네. 최 역관도 한 이틀쯤 욕을 퍼붓더니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더군.

여자가 사라진 뒤의 작은 소란을 적당히 잠재운 뒤에야 곳간 열쇠를 쳐다볼 여유가 생겼어. 나는 약 냄새 진득한 골방에 앉아 반들반들 윤이 나는 열쇠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옷장 한구석에 모셔 두었던 새 옷을 꺼내 걸쳤네. 이 정도면 윤이 도령과 같이 걷기에 추레하지 않겠거니, 하면서. 그래 봤자 흰 무명옷에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채를 손빗으로 살살 쓸어내린 정도였지만… 나름대로 격식을 차린 모양새였다고.

그렇게 머리도 빗고 옷도 갈아입은 뒤, 나는 품 안에 곳간 열쇠를 챙겨 넣었어. 바글바글 약 달여지는 소리를 듣다가 밤이 깊어지자 자네의 어머니, 대방 마님을 만나 뵈러 갔지.

“대방 마님, 최영목입니다. 잠시 나와 주시지요.”

경초재 담을 넘어 교월루 아래에서 대방 마님께 독대를 청했네. 마님은 이번에도 앉은 자리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이 목소리만 좀 높이시더군.

“우리 남가 상단 호위들은 다 무얼 하길래 야밤에 담 넘어 다니는 저런 놈을 그냥 두는 거지?”

“이래 봬도 세경 마님이 후드려 패 가며 가르치신 수제자인걸요. 담치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네. 자네나 대방 마님이나 왜 웃는지 모를 부분에서 웃는다는 걸 알고 있나?

내 말의 어디가 그리 우스운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대고 있을 때, 대방 마님이 교월루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서셨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멀끔히 차려입고 우리 집 담을 탔을꼬?”

“최 역관네 집이 이제 제 집이 되었다는 걸 보여 드리려고요.”

나는 품에서 곳간 열쇠를 꺼내 내밀었어. 대방 마님께서는 말없이 내게 악수를 청하시더군.

“내일 날이 밝자마자 상단으로 와라. 마침 연수산에 약초 보낼 때가 되었으니 이제부턴 너와 윤이가 그 심부름을 맡으렴.”

우리가 오른손을 맞잡고 흔든 다음 날, 나는 드디어 한밤중이 아닌 대낮에 남가의 대문을 넘을 수 있었지.

낮에 올려다본 교월루는… 뭐랄까, 과하게 사치스러워 보였네. 높은 누각에는 과시하듯 산호 주렴이 사방에 둘러져 있었어. 사대부들의 갓끈 한 줄만으로도 손 떨리는 가격일 홍산호로 주렴을 만들어 걸다니. 보는 눈 없는 내 안목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호사스러움에 말을 잃고 말았지.

“마님, 말씀하셨던 도련님의 호위가 왔습니다.”

밤에 보았던 인상과는 퍽 다른 누각의 모습에 기가 질려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자 행랑아범이 키득대면서 대신 고하더군. 동시에 저 위쪽에서 질색하는 소년의 음성이 들렸어.

“제 호위라니요? 시종 하나로 족하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윤이 네가 상단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 연수산으로 심부름을 보내겠다 했었잖니. 연수산은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라고도 말했고.”

나는 마님과 자네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색하게 웃었어. 어쩐지. 누각 아래 대기하고 있던 종자 놈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더라고. 자네 종자는 내가 제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고 생각했나 보아. 안심하라는 뜻으로 눈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더 원망스럽게 흘겨보기만 하더라니까? 별수 있나. 머쓱하게 눈을 굴려 다시 위쪽을 쳐다보았지.

자네가 마님과 함께 주렴 밖으로 나온 순간, 하필 그 순간에 구름이 걷히고 맑은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어. 나는 질끈 눈을 감으면서도 환한 금빛 사이로 자네의 살구색 쾌자가 흩날리던 광경을 눈에 담았지. 붉은 산호 주렴을 걷고 나온 도령이 내게 빛을 쏟아붓는 기분이었다네. 너무 눈이 부셔서 그때 자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도 보지 못했어.

“윤아, 인사해라. 네 산행을 도울 호위다.”

대방 마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마 위에 손차양을 드리우고 다시 올려다보았을 때, 자넨 등을 돌려 다시 누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거든.

‘쌀쌀맞은 애새끼. 어릴 적 귀여움은 다 어디로 가고 건방짐만 남았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나는 마님께만 인사하고 물러났네.

윤이 도령의 호위로 연수산에 가게 된 건… 어디 보자, 그날로부터 두어 달쯤 뒤였던가.

“윤이 도령, 가다 힘들면 말해. 산행은 같이 걷는 사람과 발 맞춰 걷는 게 중요하니까.”

“네.”

“범산에 호랑이가 자주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창귀 눈 돌릴 미끼로 매실이 최고라는 얘기도 들었고?”

자네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소반을 들어 보였어. 새콤한 매실 냄새가 훅 풍겼던 기억이 생생하다네. 내가 소반을 받아 들려 하자 자네가 주지 않고 버텨서 적잖이 당황했었지.

“…도령, 내가 아무리 없이 사는 놈이라도 창귀 먹이려고 준비한 매실을 탐내진 않아. 안 먹을 테니 줘.”

“안 드실 거 압니다.”

“알면서 왜 버틴담?”

“짐은 짐이 들어 마땅하지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어. 나는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하는 초가을 산을 걷다가 바보같이 “엥?” 하며 멈춰 섰네.

“짐이라고? 도령이?”

“저만 아니면 날고 뛰고 달려가실 분 아니십니까. 저 때문에 느리게 걷고 계신 거고요.”

“허 참. 우리 도련님, 생긴 것만 귀여운 줄 알았더니 하는 소리도 귀엽네.”

귀엽단 칭찬에 자넨 귓불을 발그레 물들이면서도 표정은 적잖이 발끈했지. 난 자네 그 표정이 귀여워서 한술 더 떠 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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