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제가 허둥대는 걸 보고 싶어 그러시지요? 이제 그런 말씀에 당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윤이 도령, 눈치는 어찌나 빠른지.”
영목은 능청맞게 가는눈을 뜨고는 그의 비난을 고스란히 받았다.
“뭐, 한 모레쯤 다시 얘기해 볼까?”
“…주무세요, 제발.”
질색하며 윤이 문을 닫아걸었다. 굳게 닫힌 방의 창호 문에 엷은 노을색으로 그림자를 만들던 초롱불도 꺼졌다.
“윤이 도령. 정말 자?”
“아직은 안 잡니다.”
닫힌 창호 문 너머에서 부루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 남으신 듯하여서요.”
“그게… 내가 간지러워서 진지한 말을 진지하게 오래 못 하는 성격이라 자꾸 곁길로 새고 있는데…….”
영목이 실없이 웃으며 손을 뻗어 마당 구석에 핀 흰 꽃을 가리켰다.
“내 눈에 보이는 자네는 꼭 저 꽃 같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산하엽이요?”
영목은 깜짝 놀라 대답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딱 손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어둠 속에서 홀로 맑은 윤의 얼굴이 보였다.
“말씀하시는데 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하여.”
윤이 조금 수줍게 덧붙였다. 잠이 잔뜩 몰려온 눈을 하고서도 영목이 떠들고 있으니 무어라 대꾸라도 해 주려고 노력 중인 모양이었다. 자신에게만 허락되는 윤의 다정함에 영목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산하엽은 궂은 비 맞을수록 더 투명해지고 더 아름다운 꽃이잖아?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 본성이 나오는데 말이야… 자네는 궁지에 몰릴수록, 궂은일 당할수록 더 좋은 인간이 돼. 하는 짓이 더 고와진다구.”
윤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흐릿하게 웃었다. 그는 맑은 정신일 때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느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중 난초니 하는 것보다야 산하엽 쪽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영목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을 나른한 윤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빙그레 마주 웃었다.
“마음에 든다 하니 다행이구만. 나는 자네만큼은 쭉 그리 살았음 하거든.”
“산하엽처럼요?”
“그래. 내가 지켜 줄 수 있는 데까진 지켜 줄 터이니 자네는 상하지 말고 힘껏 싱싱하게나. 가능한 한. 되는 데까지.”
윤이 문지방에 팔을 포개고 얼굴을 기댔다.
“제가 채소입니까, 고기입니까? 사람을 두고 되는 데까지 상하지 말고 힘껏 싱싱하라니. 그게 할 소리십니까?”
“못 할 소린가, 그럼? 칭찬을 해 주어도 잔소리야.”
투덜대면서 영목은 방 밖으로 걸어 나와 윤의 방 문간에 털썩 앉았다. 졸음 가득한 윤의 눈길이 영목의 발끝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무릎을 거쳐 그의 얼굴로 느리게 올라갔다.
“그냥 제가 좋다 하십시오. 깔끔하게.”
“최영목이 윤이 도령 좋아하는 건 온 천지가 다 아네. 자네 유모도 애정 표현이 날로 짓궂어진다며 날 타박하잖나.”
“말 돌리시긴.”
그가 느슨해진 틈을 타 영목도 속에 담아 둔 불만을 슬쩍 찔러보았다.
“그러는 자네는 뭐 나 좋아한다고 깔끔히 말할 수 있나?”
“네. 좋아합니다.”
“자네가 지금 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니 방금 건 무효야.”
“그렇게 말 돌리실 것도 알았습니다.”
“아니 돌렸네. 내가 내 작정을 흐리지 않으면서 자네를 소중히 한다 표현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일세.”
무어라 불만스레 웅얼대던 윤이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창귀한테 시달리고, 산군과 거래하고, 도깨비 심술에 어울리느라 우리 윤이 도령이 아주 많이 피곤했나 보구만.’
영목은 깊이 잠든 윤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의 방 문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나는 남산골 최 역관이 어디서 주워다가 양자 삼은 더벅머리 아이. 공부 머리는 없지만 요령은 좋아 남가 상단 후계자한테 들러붙은 한량.”
자조적인 음성이 가을바람에 실려 흘러갔다. 불어온 바람은 마당 구석에 피어 있는 산하엽을 흔들고 더 먼 곳으로 사라졌다.
영목의 시선이 담장 너머로 멀어지는 바람을 따라 밤하늘로 움직였다. 그믐. 영목의 마음만큼 어두운 밤하늘에 윤의 얼굴만큼 뽀얀 달이 크게 한 입 잡아먹힌 그믐이었다.
“나는 자네를 좋아하는 만큼 짓궂어지는 자네의 오랜 악우, 최영목으로 살다 죽을 작정이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윤이 잠들었음을 확신하고 말을 걸었으면서도 영목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이상하게 서운했다.
“언젠가 녹의홍상 걸친 여인들도 사내들 부러울 것 없이 지낼 수 있는… 그런 좋은 세상이 오거든 다시 말해 주시게. 좋아한다고.”
영목은 한없이 무거운 마음을 한숨에 실어 덜어 냈다.
“이런 말을 해도 아무 소리 없는 것을 보니 아주 깊이 잠든 모양이네.”
제 오른쪽 엄지손톱 같은 달이 윤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다가 영목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자네가 그만 떠들라고 잔소리할 수 없어 뵈기에 마음 놓고 떠들어 볼까 해. 뭐어― 자네가 아무리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라 한들 입 다물고 있을 내가 아니지만서도.”
눈을 감고 슬금 뻗은 손끝에 문지방 위에 엎드려 팔을 베고 잠든 윤의 손이 닿았다. 영목은 그의 매끈한 손끝과 손톱을 닿을 듯 말 듯 쓰다듬으면서 다시 눈을 떴다.
“술이나 한잔 하면 참 좋을 텐데. 맨정신에 술 취한 고주망태마냥 지나간 옛이야기 한번 주워섬기려니 참 쑥스럽구만.”
흠흠.
영목이 목을 가다듬고 씩 웃었다.
“그럼 시작하겠네. 너절하고 형편없고 길고 조금 많이 부끄러운 이야기야.”
영목은 윤이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길 바랐다. 동시에 깊이 잠든 그가 절대 제 이야기를 듣지 못하리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최영목의 삶은 항상 이런 식이지.’
쓰게 웃는 영목의 얼굴 위로 그믐달의 어둑한 은빛이 내려앉았다.
【 영목의 삶 】
거참. 안 하던 짓 하려니 어색하구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나는 도저히 자네에게 내 입으로 실토할 성질머리는 못 돼. 그래서 자네 잠결을 빌려 주절대니, 비겁하다 핀잔치 말고 진득이 들어 주게.
나는 범골 깊은 곳에 홀로 신당 차려 놓고 사는 젊은 당골네와 빌어먹을 최 역관 사이에서 태어났다네. 최 역관 놈은 배불러 가는 어머니를 찾아와 자기 앞길 망칠 생각 말라며 연일 행패를 놓았다더군. 산에 홀로 사는 젊은 당골이니 좋아 가진 아이일 리 없을 터인데… 멋대로 씨 뿌린 주제에 양심도 없지.
버티다 못한 어머니는 그가 쉬이 찾지 못할 곳으로 피신하였네. 맞아, 연수산.
언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는 모르나, 핍박받는 여인들에게는 “연수산 세경 마님께 제사를 올리라”는 말이 은밀히 전해진다네. 우리 어머니도 그 말에 기대어 세경 마님께 제사를 올리고, 그분의 댁에 의탁하여 나를 낳았다고 해. 그리고 낳자마자 거기에 날 두고 떠났지, 내 어머니는.
덕분에 세경 마님이 나를 떠맡게 되었어. 아무리 세경 마님이 소문난 개차반이라도 갓 태어난 핏덩이를 내버릴 정도는 아니셨던 모양이야.
출생부터 그렇게나 비범했던 덕일까. 나는 ‘엄마’라는 말보다 ‘스승님’이라는 말을 더 먼저 배웠다네. 수저 바로 잡는 법보다 목검 제대로 잡는 법을 더 엄하게 배웠고 말이야. 맞아. 그 악명 높은 연수산 세경 마님이 내 스승님이라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면 거기엔 항상 스승님과 내 목검이 있어. 대체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세경 마님은 어린 내게 목검 한 자루를 쥐여 주고는 집에 있는 대들보를 부수라 종용하였거든.
가능할 리 없는 일을 시키던 내 스승님. 그분은 내가 목검을 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아주 얄밉게 코웃음 치곤 하셨다네.
“영목, 그리 찔러 가지고 어느 천 년에 대들보가 부서지겠어요? 밥 먹은 거 다 어디로 갔나요?”
…이렇게 말이야.
나는 찍소리도 못 했어. 군식구로 붙어사는 어린애 처지에 뭐라 대들 수 있었겠나. 그냥 세경 마님이 시키는 대로 손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터질 때까지 마냥 목검을 휘둘렀지. 하지만…….
“스승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이 두꺼운 나무 기둥이 목검으로 어찌 뚫린답니까?”
예닐곱 살쯤 되니 머리가 굵어졌어. 내 성질머리 내가 못 이기고 슬슬 요런 대거리가 되더구만.
“그동안은 꾹꾹 참았습니다만, 대들보를 부수라는 게 대관절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말도 안 되는 짓 하라고 그대에게 온갖 귀한 것들 다 갖다 먹이는 거예요, 영목.”
세경 마님은 항의하는 나를 더없이 한심하게 쳐다보셨어. 나는 정말 억울해졌다네. 나는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고 있었으니까.
“대들보는 대청마루 저 위에 있는 건데요? 그리고 이 집은 비형랑이 만드신 건데요?”
“그게 왜 문제가 되죠?”
되묻는 말에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잊었네. 생각 좀 해 보게. 일곱 살짜리 어린애한테 지붕 한가운데 떡 박힌 대들보를 부수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억울함에 입을 벙긋대며 푸릇푸릇한 봄날 마당만 노려보던 나는 한참 만에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어.
“도깨비 왕이 도깨비 신통력으로 만든 집 대들보를 저 같은 어린애가 목검 따위로 어찌 부숩니까? 왜 부수어야 하고요?”
“하……. 영목, 잘 들어요.”
세경 마님의 고운 손이 대청마루를 가리켰어.
“어떤 집이든 중요한 제사는 대청마루에서 지낸답니다. 대청은 이승과 저승,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통로가 되죠.”
스승님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우리 머리 위의 천장, 대들보를 가리켰지.
“대들보는 그런 중요한 곳의 천장 한중간에 척 버티고 있는 물건이지요.”
“그러니까요! 그 중요한 걸 왜 제게 부수라고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꼴을 꼭 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세경 마님의 모양새가 아주, 말도 못 하게 얄미웠어.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분하던지. 내가 주먹을 꾹 말아 쥐고 “으으!” 분통을 터뜨리자 스승님은 코웃음까지 치시더구만.
“되도 않는 반항 다 했으면 이제 다시 하던 일 해요. 검 바로 잡고.”
“…저 대들보가 부서지는 게 그렇게 보고 싶으시다면 곡괭이나 낫이라도 주십시오! 목검으로는 못 합니다!”
“싫어요. 나는 보잘것없는 꼬맹이가 죽을힘을 다해 뛰고 때리면서 덤비는 과정이 보고 싶은 거라고.”
순간 나는 또 할 말을 잃었다네. 이 이상 대들 의욕도 잃었지.
자네는 항상 나를 보고 어디서 배워 온 심통이 그리 못되었느냐 타박하곤 했지? 이게 그 답이라네. 내가 나고 자라는 동안 보고 배운 것이 세경 마님의 심술이니 자연스레 체득되었나 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