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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7화 (17/157)

17화

【 연수산 】

앞서 걷던 영목이 흘끗 뒤를 돌아보며 윤에게 눈짓했다. 윤은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는 입 앞에 손을 모아 큰 소리로 외쳤다.

“서릿재 어르신, 묵 가져왔습니다! 안개에 가두어서 뱅뱅 돌리실 셈이면 이건 그냥 저희가 먹겠습니다!”

“에이그. 그냥 우리가 먹자니까. 한성에서 음식 솜씨로는 으뜸인 찬모가 한 메밀묵이잖아.”

영목이 능청맞게 윤의 말을 받았다. 윤도 태연히 응수했다.

“하지만 이것은 서릿재 어르신 드리려고 가져온 메밀묵인걸요.”

“어디 메밀묵뿐인가? 저기 범산 산군께서 가을 첫 국화로 담그신 술까지 곁들였으니―”

술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안개를 가르며 서글서글한 장정이 나타났다. 그는 영목의 손에 들린 묵직한 보따리를 휙 낚아채 술부터 꺼냈다.

“야, 이놈들아! 그런 술이 있으면 그 얘길 먼저 했어야지!”

영목이 짐을 덜어 가뿐해진 어깨를 휘휘 돌려 풀어 주며 윤에게 곁으로 오라 눈짓했다. 윤이 잠자코 그가 눈짓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이 가까이로 오자마자 영목이 도깨비에게 슬슬 시비를 걸었다.

“비형랑 어르신은 갈수록 양심은 적어지고 심술보는 커지시는 것 같습니다.”

“뭐래냐? 진작 국화주 얘기를 했으면 내가 저만치까지 마중 나가 있었을 거다.”

흥, 영목을 콧등으로 비웃은 비형랑이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어르신께서 어디 우리 윤이 도령이 말할 기회나 주셨습니까?”

비형랑은 금세 산군의 국화주 한 병을 다 비우고 처음 윤이 준비했던 술을 꺼내 들었다. 기운차게 두어 모금 술을 들이켜던 그가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술병을 흘겼다.

“에잉! 좋은 술 먹고 인간 술 먹으려니 안 되겠다. 이건 산에 고수레나 해야지.”

비형랑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늘씬한 호리병을 크게 휘둘러 허공에 술을 끼얹었다.

‘저게 대체 얼마짜리 명주인데…….’

비형랑이 산길마다 휘휘 흩뿌리는 술을 보며 윤이 입술을 꾹 물었다. 윤의 표정을 무릎 통증 때문이라 착각한 영목이 빈 술병을 허공에 띄워 돌리는 비형랑을 타박했다.

“비형랑 어르신은 길 줄이는 것 못 합니까?”

“어린것들이 날로 먹는 거 좋아하면 머리 벗겨진다.”

“못 하시는구나. 산군께선 며칠 걸어야 할 길을 한나절로 줄이시던데. 도깨비 별거 없네.”

영목의 도발에 발끈한 비형랑이 왈칵 인상을 구겼다.

“요 코딱지만 한 망할 놈은 갈수록 주둥이만 살아서!”

“이렇게 큰 코딱지가 어딨답니까? 콧구멍에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넣어 보고나 말씀하시지요?”

“호. 좋다. 내가 네놈을 코에 넣나 못 넣나 내기할 테냐?”

도깨비와 내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비형랑은 마음만 먹으면 영목 하나쯤은 코에 넣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잠자코 있던 윤이 둘의 사이를 가르고 끼어들었다.

“…어르신, 장난은 이쯤 하시지요. 저 거래하러 왔습니다, 거래.”

“그놈의 곰방대 거래. 지긋지긋허지도 않냐? 나 김 서방들 상대로 돈 벌 생각 읎어.”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비형랑이 손사래를 쳤다.

비형랑은 사람의 성과 이름을 깡그리 무시하고 인간들이라면 죄다 ‘김 서방’ 아니면 ‘거기’라고 불러 댔다. 기억할 필요도, 구분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라는 뜻을 담은 도깨비다운 심술이자 거리감의 표시였다. 벌써 몇 년 동안 술 얻어먹고 묵 얻어먹으면서도 변함없이 윤을 ‘김 서방’ 취급 하는 그를 향해 영목이 눈을 흘겼다.

“으휴, 이 양심 없는 어르신. 우리 윤이 도령한테서 오만 것 다 얻어드시고 또 튕기신다. 이제 계약서에 도장 좀 찍어 주세요.”

제법 매섭게 핀잔하면서 영목은 윤에게 저만치 보이는 새하얀 들판을 눈짓했다. 사시사철 흰 메밀꽃이 피어 있어 서리가 내린 풍경 같다 하여 서릿재라 부르는 들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서릿재는 연수산 입구에서 반나절은 더 올라가야 만날 수 있었다. 비형랑이 사는 아흔아홉 칸 기와집은 서릿재의 입구에서도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연수산 입구를 알리는 바윗돌에서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릿재 기와집이 보인다는 건, 이 도깨비도 은근슬쩍 길을 줄여 주었다는 뜻이었다. 윤과 영목이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었다.

“이쯤 못 이기는 척 도장 찍어 주시지요. 이번에는 정말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어르신께 도장 받아 가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했습니다.”

맛없다면서도 남은 술 한 모금은 제 입에 털어 넣던 비형랑이 윤의 말을 콧등으로 비웃었다.

“네 엄마 실망하겠구나. 나는 쬐끄만 김 서방 놈 소꿉장난엔 관심 없다.”

“우리 도령 이제 안 쬐끄맙니다. 저보다 커요.”

딴청을 피우고 걷던 비형랑이 영목의 말에 미간을 접고 윤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한참 컸구먼? 김 서방들은 참 빨리 쑥쑥 큰단 말이지.”

비형랑의 커다란 손이 물건 주무르듯 윤의 어깨를 꾹꾹 누르다가 팔을 따라 쭉 쓸어내렸다.

“뼈대가 좋구만.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운동해서 몸만 좀 더 키우면 사내 태 나겠어.”

“…….”

“표정이 왜 그렇게 떨떠름해. 설마 아직도 음식 가리냐? 대충 만든 거, 안 익힌 거, 비린 거 못 먹구?”

“가립니다.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고요.”

이번에는 윤이 눈짓했다. 영목이 킬킬대며 검지와 중지를 펼쳐 들었다.

“우리 윤이 도령이 대답 두 개 해 드렸으니 도령 발언권 두 개로 셈하겠습니다. 어르신 방식대로요.”

도깨비는 질문 하나에 답변 하나를 주고받는다는 이상한 규칙을 걸고 항상 윤을 귀찮게 했다. 윤과 영목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자신의 꾀에 당한 비형랑이 혀를 차면서 영목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도령, 담부턴 얘 두고 와. 둘이 쿵짝이 어찌나 잘 맞는지 귀찮어. 아주 귀찮어!”

비형랑은 당했다는 얼굴로 혀를 차면서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어린것들 등쌀에 휘둘리면 기가 쪽 빨려. 발언권 두 개든 세 개든 나는 일단 배부터 채우고 봐야겄다.”

사람 좋은 도깨비는 혀를 차면서 푼 것도, 묶은 것도 아닌 상태로 허술히 쥐고 있던 소반의 보자기를 풀었다. 그가 보자기의 매듭을 풀어 내린 순간 새하얀 메밀꽃 가득한 풍경이 번듯한 대청마루로 바뀌었다.

“뭐 해? 올라와.”

윤은 헛숨을 들이켜며 순식간에 바뀐 주변 풍경을 돌아보았다.

‘대단한 존재임을 가끔 잊는단 말이지. 너무 살갑고 너무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라…….’

소름이 돋은 팔을 느리게 쓸어내리면서 윤은 비형랑을 따라 대청마루 위로 올랐다. 영목도 잠자코 댓돌에 신발을 벗고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대청마루에 오르자 비형랑이 멋들어지게 긴 도포 소매를 휘둘렀다. 그의 소맷자락이 지나간 자리에 화려한 상이 차려졌다.

“험한 범산 넘어오느라 수고했다. 양껏 먹어.”

떡과 메밀묵, 약과 등의 간식으로 가득한 커다란 상을 가리키면서 건장한 사내가 사람 좋게 씨익 웃었다.

“천주쟁이들은 잘 있다.”

“다행입니다.”

“먹고살 만해지니 그것들이 제사도 아주 잘 지내. 덕분에 잔챙이 신들이 고 인간들 아주 예뻐 죽으려 하더라.”

“제사를…요?”

윤이 눈을 좁히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주쟁이들은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묘사직을 능멸한다며 박해받는 이들이었으니까.

그의 의문을 빤히 안다는 듯이 비형랑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으쌰, 하고 손을 크게 한 바퀴 휘둘렀다. 얇게 두드려 연하늘색 물을 들인 모시 옷감이 유려하게 허공에 휘날렸다. 잘도 차려입은 사내의 장포 소매가 펄럭일수록 그들을 둘러싼 주변의 바람이 거세졌다.

다소 센 바람이 염려스러워 영목은 습관적으로 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등 뒤, 귓바퀴 조금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영목이 흘끔 뒤를 돌아보니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린 윤이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어쭈. 김 서방들, 집중 안 허냐? 제사는 뭔 제사냐 물어보길래 대답해 주고 있구만.”

“네에, 네. 봐요.”

비형랑이 소매를 떨친 허공에 까치밥과 돌탑과 고수레로 흩뿌려지는 음식의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봤냐? 너희 김 서방들이 생각하는― 북 치고 장구 치고 번듯한 음식상 차려 두는 것만 제사가 아니다.”

“나 참. 허공에 요런 거 보여 주시려고 그렇게 돌개바람을 만드셨습니까?”

“어. 나 참 대단하지?”

쓸데없이 멋 부린 환영에 윤과 영목이 동시에 헛웃음을 지었다.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 몇 개 남겨 두는 거. 오가는 길에 돌탑 쌓고 남몰래 손 한번 모으고 가는 거. 밭일하다 고수레하는 거. 그게 다 제사야.”

“알겠으니까 이제 바람 좀 멈추십쇼.”

영목이 퉁명스럽게 항의했다. 비형랑은 허공의 돌개바람은 치울 생각도 않고 윤의 앞을 막은 영목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코딱지는 도령 앞에서 왜 그러고 있냐?”

“어르신 바람이 우리 윤이 도령 고운 피부엔 좀 거칠어서요.”

“너보다 도령이 큰데?”

“…….”

“네가 가려 봤자 쟤 마빡에 바람 다 맞는데?”

영목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던 곳에서 꼭 같은 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왔다. 본 적 없이 누그러진 얼굴의 윤이 도령이 봄바람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자네…….”

그리 웃으면 아까 동굴에서 못 잡아먹은 걸 후회하게 되잖나, 하고 영목이 입을 달싹이려던 순간, 만면에 웃음을 띤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가 최 형보다 크지요.”

천진하기까지 한 대꾸에 영목은 하려던 농담을 마음 깊이 밀어 넣고 한숨을 삭였다.

‘…전복과 버섯과 굴이 뭘 뜻하는지도 모르는 도령한테 내가 무슨 흑심을.’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게 혀를 차면서 영목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털썩 앉았다.

“제가 최 형보다 커진 것이 그리 불만스러우십니까?”

말간 낯으로 고개를 기울인 윤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울컥 짜증까지 일었다.

“예예. 덩치로라도 되련님을 이겨 먹고 싶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물 건너갔잖습니까? 그래서 아주 억장이 무너집니다요.”

“…….”

“쇤네보다 훠얼씬 크신 도련님께서는 빨리 곰방대 계약이나 하시지요.”

“…….”

딱 동네 한량처럼 비스듬히 앉아 떠드는 영목. 그림 속 어린 선비같이 꼿꼿이 앉아 입을 꾹 다문 윤. 정반대라 더욱 한 쌍 같은 둘을 한눈에 담으면서 비형랑이 약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유. 너흰 어쩜 그리 한결같이 시종 시끄럽고 정신이 없냐. 좀 조용히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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