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제게 최 형은 참으로 귀하고 중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거듭 말할 정도로, 둘도 없이.”
“…….”
“침묵으로 지킬 수 있다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입을 다물 수 있습니다.”
윤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차분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불편하십니까?”
“허락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다정한 소리를 하니까… 약간?”
영목은 제 입에서 나온 바보 같은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참……. 대체 누구 허락을 어디서, 어떻게 받으라고 이딴 대답을 한 거야.’
윤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영목의 말을 잠시 입 속에서 되뇌었다. 허락. 허락이라. 같은 단어를 몇 번 더 반복하던 윤이 마침내 신중하게 입을 뗐다.
“허락이 필요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최 형께서 정 불편하시다면…….”
윤은 잠시 말을 끊었다. 곁눈으로 영목의 낯을 살피던 그는 영목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작은 단풍잎 하나를 떼어 내고는 다시 앞을 향했다.
“불편하시다면 앞으로는 최 형도 모르게 다정하겠습니다.”
“에라이. 사람을 긴장하게 해 놓고는!”
영목이 다리를 휙 들어 올려 무릎으로 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윤이 몸을 틀어 무릎을 피하자 이번에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한 줌 쥐어 그에게 던졌다. 흩날리는 낙엽 사이로 스친 윤의 얼굴이 짓궂은 소년처럼 웃고 있었다. 낙엽이 바닥에 가라앉기도 전에 사라진 그 미소가 아쉬워 영목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구겼다.
“답이 되셨다면 서두르지요. 해 지기 전에 연수산에 닿고 싶습니다.”
윤은 덤덤히 걸음을 옮겼다. 입술만 달싹이며 그를 쳐다보던 영목도 마른침을 삼키고 몸을 돌려 큰 걸음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다시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채 한참을 걸었다. 잔돌도 없이 그저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안개 자욱한 길 위로 발에 밟히는 낙엽만 소란했다.
“이번에 연수산에서 곰방대 거래가 확정되면 그 공로를 내세워 정식으로 우리 상단에 들어오세요.”
긴 침묵의 끝. 잠시 멈춰서 무릎을 툭툭 두드리던 윤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무심한 말을 툭 던졌다. 수통의 물을 들이켜던 영목이 컥, 하고 물을 쿨럭이며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사레들린 목구멍이 진정되기 무섭게 영목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남가 상단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라고? 내가 여인임을 알면서 자네 상단으로 오라는 겐가?”
“네.”
“아까부터 혀끝에 달랑대던 말인데… 자네 실성했나? 산군 장난에 너무 놀라서 약간 어떻게 된 거 아냐?”
영목이 관자놀이 옆에 검지를 빙글빙글 돌려 작은 원을 그려 보였다. 굽혔던 몸을 일으킨 윤은 책망하지도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상단은 여느 시전 상인들이 손대지 못하는 상품들만 다룹니다. 청과 왜에서 들여온 귀한 물건, 지금 가는 연수산 도깨비 물건처럼요.”
들을수록 입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라 영목은 수통의 물을 혼자 다 비우고 빈 통만 윤에게 건넸다. 윤은 쯧, 혀를 한 번 찬 뒤 수통 뚜껑을 꾹 닫아 품에 넣으며 침착하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귀한 물건을 다루는 만큼 험한 일도 많아요. 그 험한 일을 견뎌 낼 수 있는 사람 또한 많이 필요합니다. 최 형 같은 인재에게 딱 맞는 일자리 아닙니까.”
“험한 일 하며 몸으로 구르라고? 여인인 걸 알면서도?”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여인이니 사내니 개의치 않습니다. 제게 최 형은 그저 최 형이지요.”
“…….”
영목은 대답하지 않았다. 묘한 웃음이 걸린 입술로 윤을 천천히 한 번 훑어볼 뿐이었다.
“왜 그리 쳐다보십니까?”
“언제 이렇게 기특한 사내가 되었나 싶어서.”
“…….”
“놀려 대는 코흘리개들에게 둘러싸여 당하기만 하던 꼬맹이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샐쭉하게 뒷짐이나 지고 서서 말이야.”
꼬맹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윤이 입술을 질끈 물고 입을 다물었다. 달아오르는 그의 귓가를 쳐다보며 영목은 8년 전쯤, 저와 윤의 첫 만남의 기억을 더듬었다.
영목은 농땡이 피우기 딱 좋은 으슥한 장소를 발견하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물이 말라붙은 지 오래인 우물가라 아무도 오지 않겠거니 그가 확신한 순간이었다. 한 떼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비단옷 차려입은 꼬마 도령들이었다.
곳간의 묵은 감자같이 생긴 꼬맹이들이 곱상한 꼬맹이 하나를 둘러쌌다. 감자들은 곱상한 꼬맹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고 모진 말을 퍼붓고 있었다. 아비 없는 놈, 어미 성 받은 놈 따위로 몰아세우면서. 저들끼리야 사뭇 진지해 보였지만 영목의 눈에는 이 꼬맹이나 저 꼬맹이나 한없이 팔자 좋은 어린것들일 뿐이었다.
그저 모르는 척하려 했던 영목이 나무 아래로 뛰어든 것은… 그래, 충동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영목을 나무 아래로 끌어 내렸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적당할 듯도 했다.
이제 8년이나 지난 옛일이지만 앙상하게 드높은 우물가의 마른나무 위에서 꼬맹이들을 내려다보다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훌쩍 뛰어내렸던 것, 표정 없던 어린 도령이 휘둥그레 뜬 눈이 참 귀여웠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윤과 영목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이후로도 영목은 감자들이 꼬마 도령을 놀린다 싶으면 홀연히 나타나 윤의 앞을 지켜 주었다. 누구의 부탁도 받지 않았으나 왠지 그러고 싶었다.
단순한 보호를 넘어 영목은 윤을 괴롭히는 꼬마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주로 올가미를 걸어 나뭇가지에 매달거나 두레박에 묶어 마른 우물에 빠뜨려 겁을 주거나 하는 식이었다.
“괴롭히던 놈들 앞에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하하하! 웃으라고 백 번쯤 가르쳤는데. 우리 윤이 도령은 한 번을 그리 안 했지.”
“…언제 적 일을.”
“언제 적 일을 먼저 끄집어낸 것은 자네였네. 내 등짝이 어쩌고 하면서.”
“안타깝지만 최 형께서 그리 짓궂게 말씀하신다고 말을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윤은 슬그머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는 영목의 수작을 깔끔히 끊었다. 그리고 제가 하던 제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최 형만 괜찮으시다면 어머니께 추천서를 올리겠습니다.”
“알 것 다 아는 사이에 추천서는 무슨.”
영목이 손을 내저으면서 바닥에 쌓인 낙엽을 걷어찼다. 윤은 날리는 낙엽과 흙먼지에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영목을 설득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상단은 어머니가 다 키우셨잖습니까? 최 형이 어머니께 내밀히 상담하신다면 지금보다도 더 살뜰히 도와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이고. 나는 모르겄다. 모르겄어.”
영목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앞서 나갔다.
비단 보자기로 싼 해주반을 흔들며 성큼성큼 앞서 걷는 영목의 뒷모습에 윤은 단을 겹쳐 보았다. 윤에게 있어 단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 영목은 기댈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홀로 인내하고 버티는 것에만 익숙하던 윤의 삶에 영목은 든든한 은신처가 되어 주었다. 윤에게는 성별 따위보다 이런 사실이 훨씬 중요했다.
‘말은 저렇게 모르겠다 하시지만 거절하지는 않으실 거야. 최 형은 줄곧 남가 상단에 적을 두고 싶어 하셨으니.’
윤의 짐작에 대답이라도 하듯, 앞서 걷던 영목이 성큼 되돌아왔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구만. 호위 주제에 남가 상단 도방께 무거운 걸 들리면 못쓰지.”
어딘가 조금 분한 듯한 눈으로 그를 훑어보던 영목이 윤이 들고 있던 짐을 휙 빼앗아 갔다.
“그놈의 도방……. 언제까지 놀릴 겁니까?”
“아이고. 놀리다니요. 제가 되련님을 어찌.”
영목은 너스레를 떨면서 윤이 들고 있던 약초 꾸러미까지 야무지게 빼앗아 들었다. 짐 보따리를 되찾으려던 윤은 그가 머쓱해서 하는 짓임을 눈치채고 못 이기는 척, 모든 짐을 그에게 내주었다.
“음. 둘이 심각한 얘기 다 끝난 것 같으니 내가 좀 끼어들어도 되겠지?”
윤이 접선을 꺼내 들어 영목을 향해 부쳐 주기 시작했을 때,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청년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사 님.”
날카로운 눈매가 시원스레 뻗은 사내가 씩 웃으며 윤과 영목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윤이 백사라 부른 그는 범산 산군이 애지중지 귀애하는 이무기였다. 워낙에 사랑만 받고 자란 영물이어서인지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치대고 기대는― 보기 드물게 붙임성 좋은 축이었다.
“제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응. 덕을 더 많이, 더 쌓고 싶은데 범산에선 딱히 할 게 없어서 연수산으로 유학 가고 싶어.”
누가 산군의 애완 뱀 아니랄까 봐. 백사는 천연덕스레 윤의 어깨에 기대며 느긋하게 제 목적을 늘어놓았다.
“연수산 불란서 의사 선생 곁에서 서양 의술 배우면서 덕 쌓고…….”
영목과 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불란서에서 먼 길을 와 연수산에 자리 잡은 그 의사 선생은 이전부터 윤과 영목만 보면 일손이 부족하다고 울상을 짓곤 했다. 잘만 하면 불란서 의사 선생도, 백사도 양쪽 다 만족스러운 계약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사는 영목과 윤이 눈으로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본론을 꺼냈다.
“연수산에는 용이 둘이나 있잖어? 세경 마님은 좀 무섭고, 무기 나으리한테 용 된 자세를 배워 볼까 해.”
기대감 가득 찬 백사의 얼굴을 향해 영목이 눈썹을 쭉 끌어 내렸다.
“백사 님… 세경 마님이 무서운 그 기분은 십분 이해하지만… 무기 나으리는 용 된 자세를 배울 만한 분이 아니에요.”
“왜?”
저 순진한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면 험담밖에 되지 않는다. 영목은 한숨지으며 윤에게 무언의 도움을 구했다. 윤은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나직이 답했다.
“여쭈어는 보겠습니다. 하나 그 나으리가 쉬이 누구를 가르치고 도우실 분이 아니라 큰 기대는 않으심이 좋을 듯합니다.”
“응응. 안 되면 그냥 불란서 의사 선생께만 여쭈어 주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경쾌히 고개를 주억인 백사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영목과 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걷고 또 걸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에 두 사람은 연수산의 이름이 박힌 커다란 바윗돌 앞에 다다랐다.
“세상에. 원래대로라면 나흘에서 닷새, 밤을 꼬박 새우고 걸어도 이틀이 넘을 거리를 한나절 만에 도착했네요.”
“다 내 덕이니 어서 칭찬하게. 지금 당장.”
“…최 형 덕입니다.”
낄낄대는 영목을 따라 윤이 연수산 입석을 지나친 순간. 시야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가 둘을 에워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