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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5화 (15/157)

15화

“산군 어르신 장난에 어울려 드린 값으로 술은 제가, 이 상은 최 형이 챙기겠습니다.”

마지막 전복 하나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운 영목이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네. 이걸 어디다 쓰라고 날 줘? 혼례 올릴 때나 쓰는 해주반을.”

“이 해주반은 산군께서 친우의 딸에게 차려 주신 합환주상이잖습니까. 잘 챙겨 가서 좋은 날, 좋은 이와 쓰시지요. 보기 드물게 좋은 은행나무로 만든 해주반이에요.”

“그래. 도령이 말 잘했다. 이건 내 벗이 좋은 사내 만나 혼례 올리겠다 하거든 선물하려고 아껴 둔 상이란다. 내 산에서 난 은행나무 중에 제일 곧고 단단한 애로 만든 거라고.”

영목이 눈을 굴리며 혀를 찼다. 영목이 못마땅해하는 분위기이자 산군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어미를 못 챙겨 주었으니 자식인 네 혼례상이라도 챙겨 주고 싶어 이러는 거지.”

산군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아무리 영목이라도 필요 없다고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윤이 소매 속에 넣어 두었던 비단 보자기를 꺼내 영목에게 건넸다. 여전히 영목은 사양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이었다. 하지만 윤이 어서 받으라며 손을 흔들어 재촉하는 통에 영목은 하는 수 없이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아… 짐스럽다.”

“에라이. 산군 선물을 짐스럽다 하는 심술은!”

“어디 제 심술 따위가 바쁜 사람들 가두신 산군 심술에 비하겠습니까.”

불퉁하게 대꾸하면서도 영목의 손은 구멍 두 개가 동그랗게 뚫린 해주반을 비단 보자기로 소중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영목이 해주반을 포장하는 사이에 윤은 집에서 챙겨 온 소반과 의원에게서 받은 약재 꾸러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이제 빠른 길 터 주십시오.”

터질 듯 얼굴을 붉히던 도령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후의 햇빛이 들이치는 동굴에는 남가 상단 도방 남윤만 남아 있었다. 밀린 대금을 요청하는 듯한 노련한 상인의 얼굴을 향해 산군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 도령 보게? 지름길 맡겨 두었나?”

“산군께서 친히 이름 지어 주신 이와 만나게 해 드렸잖습니까? 못 전한 해주반도 주인 찾아가게 해 드렸고요. 그 대가를 치러 주셔야지요.”

“뭐어? 내가 영목이와 만난 게, 영목이가 저 상을 챙기는 게 다 도령 덕이라고?”

괘씸함 반, 흥미 반으로 그를 쳐다보던 산군이 어이없어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영목이 끼어들어 윤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예에. 그럼요. 저와 산군의 만남도, 뒤늦게 제 이름이 밝혀진 것도, 요상한 혼례상 받은 것도, 다 우리 윤이 도령 덕이지요.”

“나 참…….”

한 놈이 이성을 잃으면 다른 놈이 보호하고, 한 놈이 불안해하면 다른 놈이 진정시킨다. 놀리고 놀림당하는 틈틈이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 주고 있었다. 원래 한 쌍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처럼.

‘짜 맞춘 듯한 한 쌍인데. 영목이는 왜 하필 오늘이 그 날이어서는.’

산군은 아쉬움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심 다음을 기약하며 둘을 동굴 밖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말없이 동굴 앞,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좁은 소로에 곧게 섰다. 범산의 주인은 영목과 윤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면서 양옆의 나뭇가지를 손에 쥐었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난 나뭇가지를 꺾어라. 그러면 안개 낀 길이 나올 거야. 그 길을 따라 걸으면 금방일 게다.”

“다시는 이런 장난 아니 치시는 겁니다?”

허리에 손을 짚은 영목이 산군에게 확언을 요구했다. 산군은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나는 장난친 적 없다. 좋은 연분 맺어 주는 것 또한 내 덕 쌓는 일이라 한 거지.”

느긋하게 대꾸한 산군이 빨리해 보라는 듯이 영목에게 나뭇가지를 쥐여 주었다. 영목은 가지를 꺾으려다 말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도령 말대로 남가 상단의 거래는 선불입니다. 우리 윤이 도령이 비형랑의 곰방대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호환은 거둬 주세요.”

“뭐어. 그래, 알았다.”

산군이 내키지 않는다는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들은 뒤에야 영목은 산군이 알려 준 대로 나뭇가지를 꺾었다.

빠지직, 경쾌한 파열음이 울리자마자 거짓말처럼 산군의 모습이 사라지고 좁은 길 양옆으로 자욱이 안개가 피어올랐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보던 영목과 윤은 말없이 터벅터벅 앞으로 이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을 뙤약볕 아래 살이 익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그저 걷기만 했다.

꽤 한참이 지나서야 영목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도와주나?”

“최 형께서 절 도와주고 계시잖습니까. 제 호위로 고용되어서.”

“왜 모른 척하나?”

윤은 걸음도 멈추지 않고 눈만 내리깔아 영목을 응시했다. 영목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윤의 맑은 연갈색 눈동자를 곧게 마주 보았다.

영목의 죄는 작지 않았다. 성별을 숨기고 최 역관 집 양자로 들어갔다. 사내 행세를 하며 버젓이 호패까지 받아 차고 있다. 세상을 속이고, 나라님을 속였다. 모른 척하는 것만으로도 윤은 이 무거운 기만의 공범으로 엮일 수 있었다.

“내가 여인이란 걸… 끝까지 모른 척해 줄 생각인가?”

불안과 책망이 꼭 같은 비율로 섞인 물음에 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모르는 척, 못 본 척해 주는 쪽이 서로에게 훨씬 나을 때가 있지요. 그걸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으려구요.”

“…….”

“다 안다는 듯 구는 눈길들이 나만큼 지긋지긋한 이가, 한성 바닥에 또 있겠습니까.”

나지막이 읊조린 그가 영목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앞을 향했다. 그러마, 하는 명확한 긍정보다 훨씬 더 진심 어린 대답이었다.

영목은 그 다정함과 꼿꼿함에 이유 모를 부아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어 흉포한 미소를 입에 건 영목이 여상히 걷는 윤의 앞을 막아서고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네 삶이, 자네 마음이 그러하니 나는 맘 놓으란 소리야?”

“최 형께서 저를 지켜 주시듯 저 또한 할 수 있는 선에서 최 형을 지켜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대방 마님께 윤이 도령 지키라며 돈 받았으니 돈값 하는 거고.”

항상 느슨하게 풀려 있는 영목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윤이 도령께서 날 이렇게 싸고도는 진짜 이유가 뭐냐고.”

“이렇게까지 따져 물으실 이유는 또 뭡니까?”

“내 안위가 달린 일이니까.”

“아. 제 대답 여하에 따라 그 칼로 베기라도 하시려고요?”

윤의 눈이 영목의 허리춤에 달린 장검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영목은 부정하지 않았다. 날 선 안광을 고스란히 맞받으며 윤이 고개를 기울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최 형은 제게 귀한 사람이니까요.”

“무… 뭐?”

“최 형께서는 제가 열 살 때부터 제 앞을 막아서고 대신 싸워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보답이려니 하세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영목의 눈빛이 보다 사나워졌다. 그가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윤을 노려보았다. 윤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영목의 불안을 그대로 받아안았다.

“외롭지만 버틸 만하다고 스스로 되뇌던 순간에, 내 앞엔 항상 최 형의 등이 있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이 나와 어머니를 조롱할 때, 단아를 비웃을 때.”

베일 듯이 날카롭던 영목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윤은 밤하늘처럼 새카맣고 맑은 그 눈을 흔들림 없이 마주 보면서 속삭이듯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니는 저들의 열등감 때문이니 괘념치 말라 이르셨습니다. 저 또한 알고 있다고 대답했지요. 하지만 사람이란 게… 말과 마음이 퍽이나 다르지 않습니까? 괜찮다, 괜찮다 할수록 마음은 메마르고 시들었습니다.”

“…….”

“그럴 때마다 내 앞을 막아서 주는 최 형의 등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한여름의 뙤약볕을 막아 주는 너른 처마 그늘, 향 먹인 부채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을요.”

영목은 자신이 세상 누구보다도 윤이 도령을 잘 알고 있다 생각했다. 그가 아는 윤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윤의 말이 길어지는 건 대개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거래를 하거나, 화가 났거나.

지금의 윤은 거래를 하는 것 같지도,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목은 꽤나 혼란스러웠다. 윤은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는 영목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최 형은 내게 그런 사람입니다. 나를 지켜 주고, 내가 숨을 수 있고, 숨어 있는 나 자신이 비참하다거나 부끄럽다고 생각지 않게 해 주는 사람. 처참한 순간에 가장 기분 좋은 것을 떠올리게 만들어 주는 사람.”

“거의 열렬한 고백처럼 들린다는 거, 알고 있나?”

당혹감에 입을 떼지 못했던 영목은 곧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물느물 윤을 놀려 먹는 최영목으로 급히 돌아왔다. 그렇게 소년의 고백을 농담처럼 흘려 넘기려 했다.

잠시 멈칫하던 윤은 먼 산으로 눈을 돌려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다시 영목을 눈에 담았다. 그러더니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뭐어?”

“마른나무에서 떨어진 나의 울타리, 나의 장벽, 나의 칼.”

한마디 한마디 읊조리며 윤의 얼굴이 조금씩 영목에게 가까워졌다.

“나의 신.”

닿을 듯 말 듯 뺨을 스치며 속삭이는 윤의 숨결이 새삼 뜨거운 것 같았다.

“…연수산 신들이 들으면 기절할 소리 하네.”

“최 형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는 그렇습니다.”

나직하면서도 단호하게 선언한 윤이 얼굴을 물렸다. 나직한 목소리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영목의 뺨도, 귓바퀴도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최 형을 도울 겁니다. 최 형이 사내인지, 여인인지 따위는 제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목은 손등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가을 산을 휘감아 도는 찬 바람 때문에 열 오른 피부가 쓸데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듣고 있자니 이상하네? 여인인지 아닌지가 왜 안 중요해? 날 향한 고백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몇 번이나 헛기침을 거듭한 영목이 괜히 언성을 높이며 윤을 핀잔했다. 영목의 그 괜한 핀잔 또한 곰곰이 곱씹은 윤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 형께서 제게 그 해주반에 표주박 놓고 합환주 나누어 마시자 권해 주신다면야 조금 중요해지겠지요.”

“…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영목의 눈이 윤과 시선을 얽고 마구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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