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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4화 (14/157)

14화

“안 좋은 상황입니까?”

“자네에게 특히 안 좋지 싶은데.”

“최 형께서 모친의 일을 밝히셔서 이야기가 잘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너무 잘 끝나서 이 지경인 걸세.”

만면에 당혹스러움을 한가득 담은 영목이 검지로 동굴 구석을 가리켰다.

“윤이 도령,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저기 멀찍이서 귀 막고 돌아서 있어.”

“제가요? 왜요?”

“왜냐 묻지 말고 그냥 저기로 가. 제발.”

“…….”

“재주도 좋은 어르신이지. 이 산중에서 굴을 어디서 구해 왔을꼬.”

영목의 한탄에도 윤은 고개만 갸웃댔다. 여간하여서는 느물느물 웃고 있는 상태에서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영목이 드물게 진심 어린 짜증을 내비치며 손을 저었다.

“아, 됐으니까 자네는 저기 구석에서 돌아서서 귀 막고 있으라고! 꽉 막아!”

영목이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기세에 질린 윤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동굴 벽에 이마를 대고 귀를 막았다.

눈을 꾹 감는 옆모습을 확인한 영목이 제 입 앞에 손나팔을 대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어르신! 저 노박 열매 삼켜야 하니 돌무더기랑 술상 치우시고 맑은 물이나 주시지요!”

“노박 열매? 에이, 달거리 중이었니?”

온 동굴을 은은히 울리는 산군의 목소리에 영목은 머리카락을 벅벅 헝클었다.

“어휴! 돌려 돌려 말한 보람도 없이 이렇게 큰 소리로 대답을 하시면 어쩝니까!”

영목은 한탄하면서 귀를 꼭 틀어막은 윤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곱게 자란 도련님은 손도 참 길고 곧았다.

곱상한 옆모습을 보며 새삼스러운 감탄에 젖어 있던 영목은 윤의 목덜미와 귓가와 뺨이 불타듯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의 입을 막았다.

“드, 드, 드, 들리나?!!”

“…….”

윤의 눈꺼풀이 꾸욱 깊이 내리 감겼다. 와락 윤에게 달려든 영목이 윤의 양 손목을 틀어쥐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대답해 보게! 다 들었어?”

“그렇게 크게 외치시는데 안 들리겠습니까?”

윤이 그에게 양 손목을 모두 틀어 잡힌 채 고개를 모로 틀어 시선을 피했다.

“그럼 들린 김에 묻겠네. 아까 그 열매, 어디 쓰는 열매인지 정확히 알고 준 건가?”

“제가 달거… 으, 그것까지 어찌 압니까? 유모에게 여인 몸에 제일 좋은 약재가 무어냐 물었더니 알려 주던걸요! 약방 창가에 매달린 빨간 열매 달라 하면 된다고!”

윤으로서는 참으로 드물게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그 모습에 영목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가 여인인 건… 어떻게 알았어……?”

“…장사치에게 눈치 빼면 뭐가 남는다고.”

“내가 자네보다 훨씬 컸는데……. 힘도 훨씬 세고……. 싸움도 훨씬 잘하고…….”

“저보다 크고 세고 싸움 잘하는 여인이 없으란 법도 있답니까?”

윤과 영목이 동시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윤이 끊임없이 중얼대는 영목을 시름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단단히 붙잡힌 제 손을 흔들었다.

“방금 그 달… 그건 못 들은 셈 칠 터이니 손목이나 놓으십시오.”

손아귀에서 스르륵 힘을 풀자마자 영목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넋 나가 멍하게 풀린 영목의 눈에 잘도 차려진 주안상이 들어왔다. 그는 괜한 술상에 삿대질을 하며 산군에게 화풀이 겸 목청을 높였다.

“해주반에 표주박 잔도 노골적이지만 안주가 해도 너무하잖습니까! 이 훤한 낮에 전복에 굴에 버섯이라니! 조합이 과하게 망측하고도 노골적이라 똑바로 볼 수도 없습니다!!”

“어디, 처녀 총각 합방에 낮밤이 있던가?”

태연히 동굴 안을 울리는 산군의 목소리에 윤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표주박으로 만든 술잔이 놓인 해주반은 신랑 신부의 혼례를 올리는 초례상이었다. 윤은 그 혼례상 곁에 놓인 비단 금침의 의미도 뒤늦게나마 이해했다. 윤이 손을 포개 신음이 터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하… 합방…….”

영목이 기겁해서 창백하게 질리는 윤의 얼굴을 삿대질했다.

“보세요! 애 놀랐잖습니까! 우리 윤이 도령은 이제 갓 열여덟입니다!”

“열여덟이면 애가 아니라 애를 만들 나이지.”

단호한 음성이 동굴을 울렸다. 윤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더 물러날 곳 없이 등에 바위가 닿자 윤은 흘러내리듯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렸다가 붉게 달아오르길 반복하는 윤의 얼굴은 두툼한 금침 위에 못 박혀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저러다 기절하겠다 싶은 윤의 모습에 영목이 먼저 평정을 되찾았다.

“…산군, 제가 아무리 막 살아도 고용주 잡아먹는 파렴치한까진 아닙니다.”

“멍석 깔아 줄 때 놀려무나. 내 산 지나다니는 사내들 중에 저 도령만큼 반듯한 이가 없어.”

“윤이 도령 반듯하게 예쁜 건 온 한성 사람들이 다 압니다. 장난 그만 치시고 내보내 주세요.”

영목이 깊이 한숨을 지었다. 이쯤 애원하면 적당히 돌무더기를 치워 줄 만도 하건만. 산군은 인간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영목아, 저 도령이 지금이나 곱상하지, 곧 너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단단해질 거야. 그러면 네가 쉽게 못 이기니 지금―”

위험한 소리가 나오려는 순간에 영목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노박 열매를 먹어야 하는 상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지.”

좁은 동굴 한복판에 산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무슨 일이 벌어질 뻔한 건지… 당면한 상황을 복기하자 윤의 온몸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동굴 구석에 옹크려 앉은 윤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세상에…….”

윤의 흰 피부가 툭 치면 팡 터질 것처럼 붉게 열이 올랐다. 그 모습을 본 산군과 영목이 동시에 짓궂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놀릴까 달랠까 고민 중인 영목과 얼굴도 들지 못하는 윤을 번갈아 쳐다보던 산군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볼 땐 너희 둘은 천생배필인걸.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차면 두고두고 후회한다, 너.”

“조금 전엔 창귀 풀어서 저를 물어 죽이려 하시던 분이 뭐라시는지.”

산군이 픽 코웃음을 쳤다.

“그건 네 이름이 영목인 줄 몰랐을 때 그런 거고.”

“…….”

“영목이 너야 까분다고 괘씸해했지만 저 도령은 줄곧 귀애하였어. 좋은 배필 찾아 주려고 벼르고 별렀단 말이다. 멍석 깔아 주었더니 하필 달거리일 건 뭐니?”

윤의 탄식이 더 짙어졌다. 이런 대화를 들으며 어둑한 동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느니 수중 난초가 어쩌고 용궁이 어쩌고 하는 저잣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게 백배는 나을 것 같았다.

고개도 들지 못하는 윤을 쳐다보면서 산군과 영목은 꽤 그럴싸한 술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도령, 더 놀리지 않을 터이니 이리 와서 내가 차려 둔 음식이나 먹으렴.”

“안 잡아먹을 테니 이리 오게.”

입이 도통 떨어지지 않는 윤은 됐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손만 내저었다. 잠시 고민하던 산군이 그에게 거부할 수 없는 패를 내밀었다.

“상 위에 있는 음식 다 먹으면 저 돌 더미 치워 주마.”

그 말에 딱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윤이 몸을 일으켰다. 산군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주춤주춤 다가온 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도령 옷에 흙 묻은 것은 오늘 처음 보는구나.”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서릿재 어르신은 멋 부리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분이라 옷이 구질구질하면 지긋지긋하게 울궈먹으며 잔소리하신다고요.”

땅바닥에 주저앉느라 흙먼지가 얼룩덜룩 묻어 버린 도포 자락을 가리키며 윤이 진심을 담아 투정했다.

“세상에. 비형랑 그치는 그 나이 먹어서도 여즉 옷 차려입는 재미로 산다니?”

“옷뿐이겠습니까? 집도 아주 멋들어지게 꾸미고 사십니다.”

“하기는. 도깨비들이 원체 금붙이 쇠붙이 좋아하는 한량 같은 족속들이긴 하다만.”

영목과 산군은 합환주고 비단 금침이고 얼룩진 옷이고 이젠 죄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끼어 묵묵히 옷을 터는 윤의 표정만 부글부글 끓었다.

“아이고. 도깨비 곰방대 얻어 달라고 한 입장에서 옷을 더럽혀 책잡히게 생겼으니 이를 어쩐다.”

“첩첩산중에서 무려 굴 올라간 혼례상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 새 옷은 못 주십니까?”

“굴이야 서해 용왕 아들내미가 수시로 가져다주니 있는 거고. 사내 옷은 없으니 못 주지.”

윤은 젓가락도 들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큰일 났습니다, 산군. 우리 윤이 도령이 단단히 삐쳤어요.”

조금 전까지 함께 곤란해한 건 다른 사람인 듯, 영목이 악동처럼 웃으면서 윤을 놀렸다.

“최 형… 그만하세요. 저 화냅니다.”

“여긴 이미 단단히 화가 났는데, 뭐.”

영목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윤의 귓불을 젓가락 끝으로 톡 건드렸다. 윤이 동굴 천장까지 펄쩍 뛸 기세로 멀어져 눈을 홉떴다.

“도령 저 무서운 눈, 보이시죠? 저게 다 산군 어르신 때문이에요.”

윤의 눈에 가득 차 있던 당혹감이 원망으로 변하기 직전, 산군이 눈치 좋게 윤의 자리로 수저를 슥 밀었다.

“이제 정말 더 안 놀릴 테니 와서 먹으렴.”

다른 때 같았으면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말을 돌렸을 윤이 지금은 산군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산군은 고개를 갸웃댔다. 그녀가 보기에는 윤이나 영목이나 싫은 사람과 오래 어울릴 성격들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이 몇 년이나 단둘이 붙어 다니며 연수산을 오갔다는 건 정분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 참. 서로 마음은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질색하는 거야.’

산군은 도톰히 깔아 둔 비단 금침이 아쉬워 작게 혀를 차면서 동굴 입구 쪽으로 손을 튕겼다. 거짓말처럼 돌무더기가 사라지고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빛에 윤과 영목이 질끈 눈을 감았다.

“통로는 열어 주었으니 화 풀렴. 차린 음식은 다 먹고 가고.”

“우리 도령은 비린 걸 못 먹으니 전복과 굴은 제가 다 먹겠습니다!”

“아유. 다 큰 사내놈이 편식하니?”

다시 제게로 화살이 돌아오자 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음식 취향에 사내와 여인이 따로 있습니까?”

“우리 윤이 도령이 곱게 자란 태를 저리 낸다니까요.”

“…….”

“자네도 그만 흘겨보고 와서 먹게. 갈 길이 까마득한데 나 노려보는 동안 해 다 지겄어.”

마지못해 다가온 윤은 젓가락을 쥐고 노릇노릇 잘 구워진 버섯만 몇 점 집어 먹었다. 빠른 속도로 상 위의 음식을 싹싹 비우는 영목을 보다가 윤이 술병을 들어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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