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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3화 (13/157)

13화

윤은 둘의 대화를 듣고서야 이 인자하게 생긴 산군이 왜 인간들을 그리 험하게 잡아먹는지 온전히 이해했다. 인간은 산군의 친구를 돌로 쳐 죽였다.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자신들을 먹여 살리던 산군의 은혜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호환은 산군의 복수이자 인간이 돌려받을 인과였다. 무지한 인간들. 그 무도함에 대한 신다운 분노였다.

“극심한 가뭄이 어디 당골 기도 정도로 끝날 일이더냐? 시대가 그런 시대이고 땅과 하늘의 흐름이 그런 흐름이라 비 안 내리고 땅 마르는 것을…….”

“…….”

“저들 생각하여 밤낮없이 빌고 또 빌었던 당골을, 내 하나뿐인 벗을 돌로 쳐 죽인 인간들이 미웠다. 화풀이할 곳을 만들어 주어야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다면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 준 네 어미도 미웠어!”

산군은 발끝만 들어 호식총을 가리켰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가리킨다는 듯 경멸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기였다. 네 어미이자 내 소중한 벗은 저기서 돌에 맞아 죽었지.”

영목의 눈이 깨진 떡시루 무더기로 향했다.

“그래서 호랑이들을 시켜 사람을 물어 죽이고, 험히 뜯어 먹게 했어. 먹고 남은 부스러기는 보란 듯 여기에 버렸다.”

작은 동산만큼 쌓인 범산의 호식총은 인간들이 자처한 죄업의 증거였다. 호식총을 노려보는 산군의 미소가 더욱 흉흉해졌다.

“인간들은 저 자리가 부정 탄 자리라며 눈살을 찌푸리더군. 저들이 저지른 짓은 생각도 않고. 그게 꼴 보기 싫어 언젠가부터는 먹고 남은 찌끄러기들을 죄다 동네에 흩뿌리고 왔지.”

윤은 생각이 많은 듯도, 전혀 없는 듯도 한 영목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집에 있을 단이 떠올랐다. 좋은 것만 보고 살아도 짧은 생이라며 눈을 가려 주던 조그마한 손의 온기가 문득 그리워졌다.

단이 그에게 그러했듯 윤도 영목의 눈을 가려 주고 싶었다. 그가 막을 도리 없이 손을 펼치려던 순간, 영목이 윤을 돌아보며 괜찮다는 듯이 느리게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윤은 뻗던 손을 꾹 말아 쥐고 그저 영목을 바라보기만 했다.

둘의 시선이 얽히고 있을 때, 잠시 말을 멈추었던 산군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인간들은 기어코 호환 입은 사체를 여기로 가져왔어. 가져온 사체를 불태우고 떡시루를 엎어 부엌칼을 꽂아서 호식총을 만드는 꼴에 얼마나 구역질이 나던지.”

갑자기 산군이 소반 위의 젓가락을 들어 호식총 위로 냅다 내던졌다.

“나는 인간들이 퍼부은 광기 그대로, 인간들이 만든 호식총 모양 그대로 창귀를 만들어 되돌려주고 있을 뿐이야.”

푹, 푹.

은젓가락이며 숟가락, 종지 따위가 곧게 날아가 호식총에 꽂혔다. 묵직한 떡시루가 순식간에 가루로 바스러졌다.

“세월이 끓는 가슴을 삭여 줄 줄 알았건만……. 세월이 갈수록 더 용서할 수가 없구나.”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는 산군과 산 아래 사람들 사이의 중재를 포기했다. 범산 호환을 막았다는 소문에 힘입어 조선 팔도 산행을 다 먹겠다는 계획도 일단 접었다. 지은 죄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 윤의 지론이었으므로.

윤이 “제가 건방졌습니다.” 하며 산군에게 맞장구치려던 찰나, 긴 침묵을 고수하던 영목이 입을 열었다.

“용서하시는 것까지가 산군이 넘으셔야 할 산입니다.”

“…뭐라?”

“역하고 힘들고 억울하고 싫은 일이지요. 하나 그 싫은 일까지가 산군의 산입니다. 제 눈에 보이는 길은… 그러합니다.”

산군과 영목의 시선이 팽팽히 마주쳤다. 찌푸린 눈으로 영목을 바라보던 산군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스르륵 입을 벌렸다.

“신이 걸어갈 길이 보이다니, 맙소사. 너 이 건방진 것아… 네 이름이 혹 영목이냐?”

“그러합니다.”

“원, 참……. 네 어미 하는 짓… 짓궂기도 하여라.”

한겨울 설산 같던 산군의 얼굴이 봄볕에 겨울 눈 녹듯 풀어졌다.

“얘야, 네 이름은 내가 지었다.”

영목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이 씨익 눈꼬리를 접었다.

“어느 날 문득 네 어미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이름을 청하더라. 신령한 것을 보는 눈이 제일 값지지 않겠냐며 영목(靈目)이라 지어 주었지.”

“산군 덕분에 비루한 제 생명이 귀한 이름을 얻었습니다.”

“나 참. 어디 쓸 이름이냐 물어도 대답을 않더니만……. 몰래 낳은 아이에게 붙이려고 그랬던 거였어?”

허탈하게 혀를 차던 그녀가 팔을 뻗어 영목의 오른손을 꾹 쥐었다.

“이제껏 왜 내게 이름을 알리지 않았어?”

“산군께도, 제게도 어머니의 죽음은 서로 좋은 기억이 아니지 않습니까.”

산군은 부정도 긍정도 못 하고 묵묵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쥔 곳에서 잠시 엷은 금색 빛이 뿜어져 나오다가 영목의 손안으로 수렴하듯 사그라들었다. 금빛이 사라진 뒤에도 산군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한참을 쓰다듬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다. 이제부터 내 산을 지날 때에 그 무엇도 널 해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 고인 눈물이 아슬아슬 흘러내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산군은 흠, 헛기침만 한 번 남기고는 뒷짐을 진 채 바위 절벽을 걸어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눈으로 배웅한 영목이 자신의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바위 옆에 놓인 또 다른 소반 꾸러미와 약재 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윤에게 눈짓했다.

“잘 끝났으니 이제 가세.”

윤의 눈길이 영목의 오른손에 머물렀다.

“산군의 통행증이라……. 대단합니다, 최 형.”

“내가 대단하긴 하지.”

겸양을 모르는 이가 우쭐한 얼굴로 에헴, 잘난 체를 했다. 윤도 이번만큼은 타박하지 않고 그에게 맞장구치며 손을 내밀었다.

“그 꾸러미 이리 주십시오. 귀한 이를 미처 몰라보고 최 형께 짐 꾸러미 따위를 들렸네요, 내가.”

“에헴. 이제부터라도 알아 모시게.”

알아 모시라면서도 그는 손에 든 두 개의 꾸러미 중에서 무엇도 넘겨주지 않았다. 빨리 가자고 성마르게 재촉하며 산길에 가득 쌓인 낙엽을 걷어차 패악질이나 부릴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나란히 걸으며 윤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좀처럼 꺼내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을 터인데.”

“다 끝난 마당이니 실토하네만, 실은 평생 말 안 할 생각이었다네.”

“네? 그럼 왜…….”

“윤이 도령 무릎이 아프잖아.”

윤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어 걸음 앞서 걷던 영목이 머쓱하게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도령 보호하라고 고용된 사람 아닌가. 아껴 둔 패라 아깝긴 하지만 고용주의 안전이 우선이지.”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항시 잔잔하기만 한 윤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휘었다.

“그리 웃으니까 더 곱구먼.”

“이상한 소리 좀 마세요.”

“이상한 소리라니. 웃는 것처럼 웃고 있잖나. 지금. 자네가. 생전 안 웃으시는 윤이 도령께서.”

윤은 머쓱하게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정말 이상한 말을 하십니다. 나는… 원래 이리 생겼는데.”

“생긴 건 그리 생겨도 그리 웃지는 않는다고.”

윤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저만치 앞에서 바위 절벽 한구석이 펑! 하고 요란하게 폭발했다.

둘은 콜록거리는 기침과 함께 손부채질을 하며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희뿌연 먼지와 돌가루가 잠잠해지자 믿기 어려운 광경이 그들을 맞이했다. 까마득한 절벽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바위 한가운데,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시끄러우니까 이만 저기서 조용히 자고 내일 날 밝으면 가라는 말씀이시군.”

영목이 스스럼없이 동굴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윤이 감탄에 가득 찬 얼굴로 입을 벌렸다.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신의 길이 보이기만 하시는 게 아니라 신의 뜻도 들리십니까?”

“뭐래. 내가 쉬었다 가고 싶으니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지. 아직도 날 모르나?”

“…….”

성큼성큼 앞서 걷던 영목은 동굴 앞에 멈춰 서서 왈칵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윤과 굴 안쪽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저기, 내가 안을 좀 살펴보고 올 터이니 자네는 꼼짝 말고 여기 서 있게.”

“그런 일이라면 최 형보다는 꼼꼼한 제 쪽이 낫지요.”

윤이 영목의 몸을 스윽 밀고 굴 안으로 들어섰다. 영목은 자신을 부드럽게 밀쳐 내는 기운 센 손길에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윤이 더 이상 한없이 연약한 어린 도령이 아니라는 것이 몸으로 와닿았다. 영목은 그것이 놀랍기도, 서운하기도,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충격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할 새도 없이 이성을 되찾은 영목은 윤을 끌어내려 급한 걸음으로 굴 안에 들어섰다.

“우리 여기 같이 들어오면 안 돼! 빨리―”

영목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둘의 등 뒤에서 돌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영목은 낭패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럴 것 같아서 거기 얌전히 서 있으라 하였던 건데…….”

“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산군께서 하신 일이지요? 대체 왜 저희를 가두신 겁니까?”

영목은 왜 그러느냐는 물음만 반복하는 무구한 윤의 얼굴을 보다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대답이 없자 윤이 영목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저는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산군께서 이러시는 연유가 뭡니까? 최 형께선 왜 이러시고요?”

“하……. 보면 모르나.”

영목이 검지를 내뻗어 동굴 안을 휘 둘러 가리켰다. 윤의 눈동자가 영목의 검지를 따라 움직였다.

어슴푸레한 동굴 입구를 막은 돌무더기 틈새로 화창한 가을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사선으로 길게 이어지는 햇살의 길을 따라가니 모락모락 김이 나는 자그마한 온천 웅덩이 하나가 보였다. 온천 맞은편에는 베개 한 쌍이 나란히 놓인 도톰한 비단 금침이 깔려 있었다. 이부자리 옆엔 꽤나 번듯한 주안상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볼수록 모르겠습니다. 쉬다 가라는 배려이신가요?”

윤은 조금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비스듬히 기울였다. 양 손목에 걸고 있던 보따리를 거의 내팽개치듯 동굴 바닥에 내려놓은 영목이 허공을 향해 버럭 성을 냈다.

“아오! 진짜, 이런 도령을 데리고 뭘 하라고 가두는지! 행패도 이런 행패가 없네!”

“행패요……?”

허리에 손을 얹고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던 영목이 짜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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