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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1화 (11/157)

11화

‘최 형은 대체 뭘 하려고…….’

윤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쳐다본 순간, 영목이 몽둥이처럼 쥐고 있던 검으로 서낭목 주위에 얼기설기 쌓여 있는 돌탑을 후려쳤다. 고막을 찢을 듯한 쇠 울림 소리와 돌무더기 흐트러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귓속을 괴롭게 파고들었다.

“아참, 자네 귀 막게!”

“그런 건 시끄러워지기 전에 말씀하세요!”

수십, 수백의 소원이 담긴 작은 돌멩이들이 화창한 한낮의 숲을 날아올랐다. 뒤늦게 힘껏 귀를 틀어막은 윤은 그 장관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잔돌들이 영목이 방망이처럼 휘두른 검에 맞아 제멋대로 튀어 올랐다. 비산하는 돌멩이들이 창귀들을 향해 매섭게 날아가 박혔다. 허공에 떠올랐던 창귀들은 피할 틈도 없이 돌멩이들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았다.

“끼에에에엑!”

일제히 우두두 땅으로 떨어진 창귀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땅을 굴렀다. 기운 센 장정 같은 몸뚱이를 하고선, 발에 채인 새끼 고라니 같은 비명이라니. 정말이지 끔찍한 부조화였다.

“이놈의 범산! 뭔 놈의 창귀 새끼들이 대낮부터 지랄이야, 지랄이!”

오만상을 찌푸린 영목이 창귀의 비명보다 더 큰 소리로 욕을 뱉었다.

“지랄도 낮밤 가려 가며 떨어야 어울려 놀아 주지, 지미럴!”

“최 형… 제발 말씀 좀.”

“죽다 살아난 와중에 말 곱게 하게 생겼나?”

영목이 검을 내려쳐 땅바닥을 뒹구는 창귀들의 목을 베고 서낭목을 향해 걷어찼다. 윤이 질색하면서 몸을 피하자마자 굴러온 목이 떡시루와 함께 서낭목에 부딪쳐 터져 나갔다.

“자네는 무예 익힐 생각 없나? 어?! 아무리 돈 받고 고용된 입장이라도 만날천날 나만 몸 쓰는 거, 좀 그래!”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행복하지요. 저는 머리 쓰고, 최 형은 몸 쓰고.”

“앞으로는 나도 머리 좀 써 보겠네. 자네도 몸 좀 써!”

불만을 토하는 영목의 뒤, 땅바닥을 뒹굴며 고통에 신음하던 창귀들의 몸뚱이가 초록색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들었다. 코가 문드러질 것 같은 악취에 윤이 얼굴을 찌푸리고 휘휘 손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얘들아, 또 연수산 가니?”

통통한 아낙 하나가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잔디밭이라도 되는 듯, 뒷짐을 지고 태평하게 걸어 내려오는 걸음이 여유롭기만 했다. 충실한 종복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오는 창귀들의 모습에 윤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악취에 질색하는 윤을 놀리려던 영목이 냅다 고함을 쳤다.

“거참, 어르신! 우리 도령한테서 소고기 그만큼 얻어드셨으면 이제 좀 곱게 보내 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살려 보내는 걸 감사하진 못할망정. 건방진 것.”

아낙은 후후 웃으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지나치는 길에 보았다면 ‘어떤 형편 좋은 집 마님인가 보다’ 생각했을 만큼 인심 좋고 성격 유순하게 생긴 중년의 여인이었다.

“아우. 갈수록 못 해 먹겠습니다. 산 한번 넘어 다니기 드럽게 그지 같애서! 망할 놈의 창귀 새끼들은 지 주인 닮았는지 갈수록 더 미친놈처럼 굴고.”

이를 악물고 허공에 장검을 떨쳐 잔해를 털어 내면서 영목이 진저리를 치자 그녀가 더없이 푸근한 얼굴로 웃었다.

“검 휘두르는 기운만큼이나 주둥이 흉흉한 것 보소. 곱상하게 생긴 놈답지 않게.”

“산군께서 절 트집 잡으십니까? 세상 둘도 없이 인자한 얼굴로 사람을 날로 드시면서?”

산군이라 불린 아낙이 웃음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점점 커지는 그녀의 웃음 뒤로 산 울음이 우릉우릉 깔리고 여인의 눈에 샛노란 빛이 어렸다.

“나를 산군이라 생각지도 않으면서 산군, 산군 타령. 지겹다.”

입술 새에서 흐르는 소리는 분명 웃음이나 여인의 눈은 굶주린 한밤의 맹수와 같았다. 사나워지는 산군의 안광을 몸으로 막은 영목이 느물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뭔 소리시지? 산군을 산군이라 생각하지 선녀라 생각합니까?”

“그게 진심이라면 조금 고맙긴 하다마는. 건방진 걸 귀엽게 봐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단다. 내가 너희라고 한입에 못 먹을 것 같니?”

“에이. 아무거나 막 드시면 체해요.”

긴장감 하나 없는 얼굴로 대꾸하는 영목의 능청에 살기를 뿜던 산군마저 피식 웃어 버렸다.

“매번 날 웃게 하니 봐주긴 한다마는. 한 번만 더 까불면 먹어 버릴 거다.”

“아이고, 네에, 네. 겁주시는 건 이만하면 충분히 하셨으니 이제 서로 안부나 묻고 갈 길 갑시다요.”

“안부라.”

노랗게 물들어 진초록의 빛을 번뜩이는 그녀의 눈이 영목과 윤을 찬찬히 살폈다.

“이 건방진 놈이 건방진 건 여전하고. 도령은 못 보던 사이에 아주 많이 컸구나.”

“…최근 한 달 새에 많이 컸다는 이야기만 천 번은 들었습니다.”

여인이 통통한 뺨을 손으로 감싸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도령네 어미가 남가 상단 이끄는 그… 이름이 뭐더라……. 인혜였나? 남인혜?”

“그러합니다.”

“아유. 내 기억력이 죽지는 않았네.”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맑은 그녀의 웃음에 또다시 산이 우릉우릉 울었다.

“그래. 네 어미, 인혜도 늦게까지 오래 컸단다. 너는 키 크는 것까지 네 어미를 닮았구나.”

샛노란 눈이 초록색 동공을 좁히며 윤을 살펴보다가 영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은 볼 때마다 점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되어 가는데……?”

“지난 몇 년간 두세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셨잖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어디서 본 얼굴이지요.”

귀를 후비며 느물느물 대꾸하는 영목의 모습에 여인이 왈칵 눈살을 구겼다.

“너 내가 한 번만 더 건방 떨면 잡아먹겠다 했니, 안 했니?”

“아, 괜한 겁 주지 마시고 우리 도령이 차린 소고기나 드시라니까.”

“요놈이 진짜…….”

“제 뱃살보다 저 소고기가 훨씬 비쌀걸요?”

영목이 으레 하던 것처럼 살살 약을 올리자 여인의 안광이 점점 더 사나워졌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윤이 보다 못해 여인을 말렸다.

“산군, 최 형을 잡아먹어 버리시면 제가 연수산 다녀오는 길에 무거운 짐 들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놈 혼쭐을 한번 내 주어야 속이 풀리겠는데…….”

“아이구. 아이구, 무서워라. 아이구.”

윤은 까부는 영목의 소매를 끌어당기면서 산군이라 부른 여인에게 바위 위의 상을 권했다.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고기로 준비하였습니다. 최 형 목소리는 지나가는 바람인 셈 치시고 고기 맛 보시며 노여움 푸시지요.”

“고운 도령이 손수 차려 주는 상이니 매번 고맙게 먹긴 한다마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팩 여미며 다가온 여인이 영목에게 날 선 눈을 흘기고는 바위 위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고기는 야무지게 본인의 입으로 넣으면서 매실은 고수레하듯 무성한 수풀을 향해 휙휙 던지길 반복했다. 매실이 날아간 자리마다 창귀들의 탁한 연노랑색 안광이 번뜩였다.

‘창귀들이 매실이라면 사족을 못 쓰기에 넉넉하게 준비했건만 겨우 모자라지 않을 정도라니. 이 숫자는 최 형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어.’

공손한 얼굴로 그들의 식사를 바라보던 윤이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창귀가 이렇게 많이 늘었다는 건 지난 몇 달 사이에 호환을 입은 사람들이 이만큼 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허세가 먹혀야 할 텐데.’

스멀스멀 등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에 윤의 붉은 입술이 바싹 말랐다. 마른 입술을 축이는 윤을 보며 산군이 넌지시 물었다.

“너희들, 연수산에 옹기나 연초잎 사러 다니는 거지?”

윤이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딴청을 피우며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 산군에게 윤은 예를 다해 답했다.

“남가 상단의 이름을 걸고 거래 트러 다니는 길이지요. 쌈짓돈 탐하는 부류와 저를 같은 취급 하시면 서운합니다.”

기다리던 순간을 지나치게 반가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윤은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둘의 시선이 치열하게 서로를 탐색하고 있을 때, 영목이 가볍기 그지없는 말투로 불쑥 끼어들었다.

“으음? 지금 내 얘기 하나? 옹기나 연초잎 사고팔아 쌈짓돈 탐하는 놈. 나잖아.”

“…최 형…….”

“아이고, 서러워라. 나도 할 수만 있으면 쌈짓돈 말고 묵직한 돈궤 탐하고 싶다!”

영목의 주책에 기껏 음식으로 달래 둔 산군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찍어 밀어낸 윤이 다시 정중히 물었다.

“산군께서 특별히 바라시는 물건이 있으신지요?”

“그게…….”

산군은 여전히 눈으로 영목을 흘기면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연수산 서릿재에 사는 덩치 큰 놈 있잖니? 그놈이 태우는 곰방대 하나만 가져다주렴. 온 산이 자욱하도록 연기를 피워 대면서 남는 거 하나를 안 주더라, 하나를.”

윤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연수산 서릿재에 사는 도깨비와 자개 곰방대 거래를 트려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자개 곰방대는 단순한 사치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산군이 원하는 것이 ‘그놈이 태우는 곰방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곰방대는 입에 닿아 숨결을 불어 넣는 물건.’

그래서 큰 신이 직접 사용한 곰방대에는 두세 번쯤은 크게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신력이 담긴다. 산군은 그런 곰방대를, 곰방대에 담긴 힘을 원하고 있었다.

‘특별한 사람의 곰방대에는 특별한 신력이 담긴다. 서릿재 어르신은 도깨비 왕인 비형랑이야. 비형랑의 힘이 광기 어린 산군에게 들어가면… 너무 위험한데.’

붉은 입술이 굳게 닫혀 움직이지 않자 산군이 코웃음을 쳤다.

“대답을 않는구나.”

“산군, 저는 남가 상단의 후계입니다. 저잣거리 장사치와 달리 객을 가려 받고, 가려 받은 객 중에서도 가치에 맞는 제값을 먼저 치러 주시는 의뢰만 받습니다.”

“…….”

“사정이 이러하니, 금번 통행세는 이 술상으로 갈음하시지요.”

여인의 것보다 더 고운 기다란 손가락이 산군 앞의 소반을 스윽 쓸었다. 산군의 눈썹이 쭈욱 위로 올라갔다.

“서릿재 놈의 곰방대는 죽어도 못 구해 주겠으니 소고기나 먹고 떨어져라?”

“송구합니다.”

“허허. 소고기를 좀 좋은 걸로 가져왔어야 타박을 할 텐데.”

산군이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 고기 한 조각을 입에 쑥 집어넣었다. 꽤나 건방진 거절에도 화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소고기가 어지간히 입에 착 달라붙는 모양이었다.

영목이 그새를 못 참고 또 끼어들어 까불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 우리 윤이 도령이 돈이 없습니까, 안목이 없습니까? 산군께 드릴 제사이자 뇌물이니 제일 좋은 고기로 골라 와야지요.”

“최 형…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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