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바로 그때, 청지기가 허리를 두드리며 다가오다가 영목과 윤을 보고 낭패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 되련님들! 오늘 연수산 가십니까?”
자그마한 체구의 청지기는 연신 “아이고, 아이고.”만 반복하며 울상을 지었다. 잔걱정 많은 청지기의 성격을 아는 윤이 약간 곤란해하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리되었네. 어머님 부탁으로.”
“당상관 어르신께서 저녁 같이 들자 하시어서 전하러 오는 길인데…….”
“아. 조부님께서 벌써 퇴궐하셨는가?”
“예. 그러니 오늘은 어르신과 식사하시고 내일 일찍 떠나심이 어떠한지요?”
성을 따서 권가(權家)라 불리는 청지기가 조심스레 둘을 만류했다.
권가는 대를 이어 남가의 대소사를 맡아 관리하는 겸인이었다. 당상관은 긴 연행으로 장기간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남인혜는 남가 상단의 일로 항상 바빴다. 이 둘을 보필하며 야무지게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권가는 남가의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부탁이다 보니 다른 때라면 윤도 못 이기는 척 그러마 대답했을 테지만… 이번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어. 옹기 가마가 잘못 터져서 환자가 꽤 생겼으니 급히 약초 좀 변통해 달라 기별이 왔다네.”
“아…….”
“조부님께는 권가 자네가 잘 말씀드려 주게.”
“…예.”
권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양에서 연수산까지는 보통 험한 길이 아니었다. 돈의문 바로 밖에서부터 시작되는 범산을 넘어 닷새를 꼬박 가야 겨우 닿을 수 있었다. 심지어 범산은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가 나오기로 악명 자자한 악산(惡山)이었다. 연수산은 그런 범산을 살아서 넘어야 겨우 당도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산세가 험한 것도 문제였지만 초입에 안개가 유난히 심하다는 게 연수산의 더 큰 문제였다. 안개에 허우적대며 숲을 헤매다 탈진하기 일쑤라 타 넘기보단 돌아서 피해 가야 하는 산으로 유명했다.
이런 입지 덕분에 난다 긴다 하는 관졸들이나 심마니들도 연수산에는 쉽게 발을 들이지 못했다. 천주학을 믿다가 밀고당한 이들이 연수산으로 숨어들어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당상관의 하나뿐인 귀한 딸이자 윤의 모친인 남인혜는 꽤 오래전부터 연수산 천주쟁이들을 살뜰히 챙겼다. 윤이 두세 달에 한 번씩 연수산으로 가는 가장 큰 이유 또한 남인혜의 심부름 때문이었고. 이렇게 남가 상단 대방 마님이 천주쟁이들을 먹여 살린다는 사실은 온 집안을 통틀어 권가와 행랑아범 정도만 아는 비밀이었다.
‘가마가 터져서 약초가 필요하다는 말은 고문받다 탈출한 천주쟁이가 늘어났다는 뜻인데……. 아이구, 우리 도련님.’
청지기가 마른 입술을 질끈 물었다.
당상관은 많은 재산만큼 적도 많았다. 혹시라도 천주교도라고 밀고되었다가는 손쓸 틈도 없이 멸문일 게 뻔했다. 충성스러운 권가로서는 집안이 천주쟁이들과 얽힌다는 사실 자체가 달가울 리 없었다.
권가의 눈꼬리며 어깨가 말릴 도리도 없이 축 처졌다. 보다 못한 영목이 윤에게 눈짓을 했다. 한 식경쯤 쉬다가 집을 나설 생각이었던 윤은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다리를 일으켰다.
“행랑아범, 나는 길을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으니 서안 위에 쌓아 둔 편지와 손수건들은 자네가 항상 하던 대로 처리해 주게.”
“아이고. 벌써 떠나십니까?”
“상황 봐야 알겠지만 오가는 길 생각하면 이달 내에 못 돌아올 수도 있을 듯해.”
“아이고.”
영목이 음식이 가득 차려진 소반 꾸러미를 양손에 냉큼 집어 들고 윤의 뒤에 섰다.
“이번에야말로 연수산에서 자개 곰방대 계약서를 받아 올 테니 기대해 주게나.”
“그저 부디 몸 조심히, 살펴 다녀오십시오.”
윤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권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샛문을 통해 얼른 집을 빠져나왔다.
* * *
“대방 마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것이 있던가?”
문 앞에서 배웅하는 권가와 행랑아범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영목이 넌지시 물었다. 벌써부터 피로한 기색 가득한 윤이 답했다.
“어머니야 항상 가는 길에 약이나 한 보따리 챙겨 가라 하시지요.”
“불란서 의사 선생께서 손꼽아 기다리고 계시겠구만.”
윤은 그의 손에서 소반 하나를 받아 들며 첫 번째 목적지를 지정했다.
“돈의문 앞 약방에 들렀다가 곧장 성문을 지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탈히 산 넘어가려면 약 한 사발 마시고 가야겠어요.”
무릎을 주무르는 윤을 바라보면서 영목이 픽 비웃었다.
“두 달 앓아누운 것으로는 부족했구만. 아직 약관도 안 된 사람이 벌써부터 무릎이 부실하여 어쩌누?”
“부실하진 않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한 마디씩 커지니 아픈 거지요.”
“얼씨구. 쑥쑥 잘 큰다고 잘난 척까지 하네.”
“…….”
주거니 받거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약방에 다다랐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 반 물건 반이던 운종가와 달리 한양 서쪽 돈의문 근처에 위치한 작은 상점가는 인적조차 드물었다. 종일 사람들 틈에 부대끼느라 질려 있던 윤은 고작해야 들개 한두 마리 얼쩡대는 스산한 동네로 오니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윤이 스스로 무엇에 안도하는지도 모르고 어깨 힘을 풀고 있을 때, 영목이 툭 치면 부서질 것처럼 삭아 빠진 나무 문을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영감! 우리 왔네!”
“허허. 시간, 참. 도련님들 벌써 연수산 가실 때 되셨습니까?”
주름 자글자글한 의원이 알은체를 하자 영목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영감은 못 보는 새 더 쪼글쪼글해졌구만?”
노인은 반갑게 치대는 영목의 팔을 두드리며 인사를 받았다. 나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노인이었지만 안광만은 형형했다.
“이번에는 무얼 거래하러 가십니까?”
“아, 그게… 연수산에서 옹기 굽는 가마가 터져서 난리라는 서신이 왔대.”
“어이구. 그럼 화상에 쓰는 약초들 우선으로 꾸려 드려야겠네요. 창고에 다녀오겠습니다.”
핑계는 가마 폭발 사고였지만 실상은 고문 환자의 치료. 창고까지 갈 이유가 없는 일이라 영목과 윤은 손을 내저어 일어서는 의원을 잡아 앉혔다.
“부산 떨 것 없네. 그냥 내 무릎 약과 항상 사 가던 약재 세 꾸러미면 돼.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윤이 약방 기둥에 매달린 약재 주머니를 쿡쿡 찔러 대는 영목을 가리켰다.
“최 형에게는 감길탕(甘桔湯) 한 사발 주시게나.”
“허허. 아까 춥다 타령했다고 다짜고짜 고뿔 약 멕이려고? 나 탕약 싫어해!”
“그래서 드시라는 겁니다.”
“허. 이 친구 심술 보게?”
윤은 별다른 대꾸 없이 의원을 향해 돌아섰다. 눈가며 입가 가득 주름을 잡고 씨익 웃은 영감이 영목에게 진갈색 탕약을 사발 가득 따라 건넸다. 쓴맛에 질색하는 영목을 뿌듯하게 쳐다보던 그는 곧 윤의 주문대로 약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성초와 애기비단풀은 특히 넉넉하게 챙겨 주시게. 옹기쟁이들은 사철 상처 달고 사는 이들이잖나.”
“예예.”
“영감, 그 둘 말고도 상처 치료에 좋은 약재들은 비싼 걸로 다 넣어 줘. 약값은 꼭 ‘남가 상단 도방 남윤’ 이름으로 달아 두고.”
그새 탕약 한 사발을 후루룩 다 마신 영목이 냉큼 끼어들어 참견했다. 남가 상단 도방을 들먹이는 바람에 발끈한 윤이 한마디 하려 했지만 영목은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입을 놀렸다.
“이젠 다 컸다고 윤이 도령이 아니래. 남가 상단 도방 남윤이라네. 기억하게. 남가 상단 도방 남윤.”
“…최 형…….”
“왜애.”
“그만하세요.”
“에헤이. 옹기쟁이들이라 다칠 때 깊이 다치니 쓰는 김에 인심 팍팍 써서 비싸고 좋은 약초 챙겨 주라는 거지. 우리 윤이 도령은 남가 상단 도방쯤 되시니까.”
참다못한 윤이 인상을 쓰며 눈을 흘기자 영목은 탕약 냄새 진하게 나는 숨결을 후 불어 화답했다.
“그리 뜨겁게 쳐다보면 설렌다네.”
“하……. 내가 말을 말아야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윤이 영목의 입김을 피해 두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손을 쭉 뻗어 창가를 가리켰다.
“창가에 매달린 저 붉은 열매. 저건 작은 주머니에 따로 넣어 주게.”
윤이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던 의원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창가에 걸린 빨간 열매…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의원이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윤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아유. 도련님도 이제……. 아유.”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이던 윤은 엉겨 붙는 영목을 능숙하게 피하고 약 보따리를 받아 든 뒤 셈을 치렀다.
“매번 고맙네. 다음에 또 봅세.”
“제가 고맙지요. 살펴 가십시오.”
분명 처음에는 소반 두 개 모두 영목이 들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더 크고 무거운 상이 윤의 차지였다. 다른 손에는 약 꾸러미까지 들려 있어 영목보다 윤의 짐이 더 많았다.
허름한 약방을 나서 돈의문으로 향하면서 영목은 빈손을 뻗어 윤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했다.
“아이고. 무겁지 않나?”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도련님 수행 가는 길에 감길탕도 얻어먹고, 손도 가벼워지고. 착하고 돈 많은 도령에게 고용되니 일할 맛 나는구만.”
질색할수록 더 치대는 그를 알기에 윤은 미간만 좁힌 채 꾹 참으며 대꾸했다.
“범산에서 호랑이 잡아 주실 분이니 잘 보신해 드려야지요.”
“허허. 탕약 한 사발 먹이고 호랑이 잡으래네? 착한 도령이란 말 취소다, 취소.”
연신 부당 거래라면서 투덜대던 영목이 윤의 손에서 소반을 냉큼 빼앗았다.
“…주십시오.”
“싫으네. 이따가 창귀가 나타나거든 묵직한 소반을 두 보따리나 들고 다니느라 힘이 빠졌다는 핑계를 댈 거야.”
양손에 묵직한 소반을 쥔 영목이 반 발짝쯤 앞서 걷고 윤은 바스락대는 약초 꾸러미만 달랑거리며 그를 뒤따라 걸었다.
걷기 좋은 가을이었으나 산행은 산행. 산 중턱쯤 이르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흘끗 영목의 상태를 살핀 윤이 널찍한 바위를 가리켰다.
“잠깐 쉬지요. 쉬는 김에 상 차리겠습니다.”
“도련님은 쉬시지요. 쇤네는 물 떠오겠습니다요.”
너스레를 떨며 소반을 내려 둔 영목이 척 하니 손을 내밀었다.
“수통 줘.”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무릎을 두드리던 윤이 피곤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산행인 걸 알면서 수통도 안 챙겨 왔습니까?”
“어. 도령 거 쓰려고.”
“…하.”
“줘, 빨리. 나 목말라.”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윤이 영목에게 수통을 건넸다.
“저는 여기에서 땅 고르고 있을 터이니 천천히 다녀오세요.”
“네에, 도련님.”
“잠시만요.”
윤이 돌아서려는 영목을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약방에서 따로 넣어 달라 했던 붉은 열매가 든 주머니를 영목의 손에 툭, 올려놓았다. 영목이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이건 뭔가?”
“물 뜨러 가는 김에 같이 드세요.”
영목은 그가 건넨 작은 주머니와 수통을 대수롭지 않게 챙기고 성큼성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