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8화 (8/157)

8화

“대충 대답하지 마시고요.”

“응응.”

“정말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연을 끊다니, 무슨.”

“그치만… 나는 도령이 쥐고 쓰는 것 중에서 제일 가치 없는 물건이잖나.”

그의 말에 윤이 불쑥 손을 뻗었다. 영목이 피할 새도 없이 윤의 손가락이 영목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러더니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묶었던 목도리의 매듭을 다시 풀었다.

티 하나 없는 손이 쪽색 비단의 한쪽 끝자락을 조금 짧게 잡고 다른 쪽을 슥 당겼다. 목뒤의 맨살을 스치는 부드러운 촉감에 영목이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좁혔다. 윤의 눈길이 미동하는 어깨에서 곧게 뻗은 목을 지나 영목의 눈동자에 이르렀다.

“제가 만물의 필요와 가치를 습관적으로 계산하는 장사치이긴 합니다만.”

연갈색 눈동자가 올곧게 영목만을 가득 담았다. 시선은 그에게 온전히 못 박은 채, 윤의 손끝이 영목의 앞섶에서 목뒤로 미끄러졌다.

맨살을 쓸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비단의 낯선 감촉에 영목의 목에 솜털이 바짝 섰다. 오스스 긴장한 살결 위로 내려앉는 윤의 시선이 촉감처럼 선명했다. 동시에 윤의 입꼬리가 미미한 곡선을 그렸다. 설마 윤이 도령이 웃은 건가, 싶어 영목이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희미한 곡선은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윤이 크게 팔을 둘러 목도리를 한 바퀴 더 둘렀다. 항상 허술하게 풀어져 있던 영목의 목덜미가 푸른 비단에 빈틈없이 감싸였다. 목도리를 꼼꼼히 매듭지은 윤은 그제야 만족스레 눈을 한 번 깜빡이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저는 최 형의 가치나 필요 따위를 셈한 적은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없어요.”

“…어?”

“존재 자체로 충분하신걸요.”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 영목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나직이 반복했다. 윤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충분합니다.”

영목은 주책없이 빠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겸, 윤의 손이 떠난 자리를 매만지며 장난스레 핀잔했다.

“거참. 심장에 봄바람 드는 소리를 참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네그려.”

윤은 평소의 차분한 얼굴 그대로 영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의 가슴을 마구 휘저어 놓은 주제에. 역시나, 싶기도 하고 괘씸하다, 싶기도 하여 영목은 푸스스 실없이 웃어 버렸다.

“하여튼 간에. 오랜만에 보아서 그러는지 앓다 일어나 사람이 유해져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자네답지 않게 유난히 다정하니 기분은 좋구만.”

“최 형께만큼은 대체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다정한 편이지요.”

“그래? 그럼 다정히 대해 주는 김에 이번엔 내가 연수산에서 무슨 거래를 할지 맞혀 보게나.”

한창 좋은 분위기에 갑자기 거래 이야기로 말을 바꾸는 영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윤이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최 형께선 연수산에 가실 때마다 매번 연초잎만 잔뜩 사셨지요. 이번이라고 크게 다르겠습니까?”

좋은 옹기그릇과 연초잎이 연수산의 주 거래품이었다. 영목은 무거운 걸 드는 건 질색이라며 옹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항상 연초잎만 한 아름 짊어지고 돌아왔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윤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영목이 조금 섭섭하다는 듯이 콧등을 찌푸렸다.

“뭐… 크게 다르진 않지만… 그래도 이번엔 내가 아주아주 중요한 거래를 할 건데. 안 궁금한가?”

“예. 안 궁금합니다.”

“왜? 내게만 다정하다면 내 행적도 살뜰히 궁금해해 주어야 마땅하지. 응?”

궁금해해 달라며 칭얼대는 얼굴을 향해 윤이 얕게 한숨을 뱉었다. 그는 징징대는 영목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영목의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구깃한 어깨에, 엉킨 허리끈에, 낡아 빠진 검대에 윤의 손길이 스쳤다. 유난히 희고 곧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영목은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자네는 이번에야말로 서릿재의 그 떡대 좋은 어르신이 만드는 곰방대 계약 터야지?”

“그래야지요.”

반쯤 풀어진 고름까지 다시 묶어 주려던 윤이 손끝을 멈칫대다가 영목의 어깨를 밀었다. 영목이 낄낄거리며 윤에게 가슴팍을 들이밀었다.

“해 준 김에 옷고름도 정돈해 주면 덧나나?”

“혼자 야무지게 묶고 다니시면 덧납니까?”

“옷고름 푸는 건 잘하는데 묶는 건 영.”

가는눈으로 싱글거린 영목이 윤의 옷고름을 주욱 잡아 풀었다.

“미쳤습니까!”

윤이 파드득 몸서리를 치며 멀어졌다. 영목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사랑채를 가득 메우고 담장을 넘었다.

“내가 미친놈인 거 모르던 일인 듯이 얼굴 붉히긴. 이러니 내가 자네를 놀려 먹는 걸세.”

“…됐고요. 연초잎이든 옹기든 무얼 거래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신중히 하세요.”

“오. 다정 다음은 걱정인가?”

“매사 건성이시니 걱정을 아니 할 수가 있어야지요.”

저만치 방구석까지 멀어진 윤이 풀린 옷고름을 단단히 묶으면서 영목에게 당부했다.

“거래는 신중히. 아셨습니까?”

“예예, 되련님.”

장난스레 대꾸하는 영목의 얼굴에 구김살 없는 웃음기가 가득 스몄다. 영목은 항시 여상한 윤이 제 수작에 휘말려 허둥대는 것을 최고로 좋아했다. 지금처럼.

“좋아하는 이의 좋아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기분이 째지는구만.”

“말 돌리지 마시고요.”

“응응.”

“대충 대답하지도 마시고.”

“응응.”

영목은 연신 키득대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한없이 장난스럽기만 한 그를 향해 윤이 눈꼬리를 구겼다.

“최 형은 지금 남가 상단 도방인 저, 남윤을 수행 중이십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거래를 하시든 이것만은 잊지 마시라는 말씀이에요.”

남가 상단의 도방.

도방은 상단을 총지휘하는 대방 바로 아래의 지위였다. 남인혜는 윤이 열여섯 살이 되는 날, 남가 상단 도방임을 의미하는 화려한 증명 패를 달아 주며 윤에게 말했다.

- 이 패를 내보이면 어디든 통과할 수 있고 무엇이든 살 수 있다. 사내라면 누구나 열여섯 살에 달게 되는 그깟 호패보다 값지다. 내 남가 상단의 가치를 이리 높이기 위해 낮밤 없이 일하였지.

남인혜는 ‘당상관 댁 아씨’라 불리던 과거를 버리고 스스로 ‘남가 상단 대방 마님’이란 지위를 다진 사람이었다. 윤의 손에 쥐어진 증명 패에는 그녀의 지난 삶과 노력이 당당한 자부심으로 담겨 있었다.

이런 연유로 남가 상단의 도방이란 자리는 윤의 자부심인 동시에 족쇄이기도 했다. 그래서 윤은 좀처럼 도방이라는 직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영목은 윤이 하필 지금, 제 직위를 굳이 입에 담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영목에게 거래를 하다가 곤란한 상황이 닥치거든 저를 이용하라고 당부하는 중이었다.

‘어떤 거래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 부디 남윤이든 남가 상단 도방이든 좋을 대로 팔아먹고 유리하게 계약하라는 소리지? 기특하긴.’

매사 건성인 영목이 혹시라도 손해 볼까 염려하는 윤의 배려였다.

세심한 마음 씀이 고마워 영목이 씩 웃었다. 환히 웃는 얼굴이 더더욱 못 미더운지 윤은 그답지 않게 옅은 짜증까지 실어 대답을 재촉했다.

“아셨습니까? 거래는 신중히 하세요.”

말간 낯으로 무뚝뚝하게 전하는 호의. 제게만 내보이는 윤의 무른 면에 영목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 붙들어 매게. 이번 거래는 내가 아주 오래오래 고심했던 거거든. 믿어 봐.”

자신만만한 얼굴의 영목이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 팔뚝을 탁탁 쳤다. 잦은 주먹다짐으로 다져진 팔뚝에서 탄탄한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저만치 안쪽 마당 문간에서 눈만 빼꼼 빼고 그들을 훔쳐보고 있던 단의 귀에 발갛게 꽃물이 번졌다. 시선을 느낀 영목이 짓궂은 웃음을 걸고 단이 숨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어린 아씨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쪽 눈을 찡긋했다.

꺅.

비명 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외마디 소리를 내지른 단이 진달래색 댕기를 길게 휘날리며 안채로 뛰어 들어갔다. 경쾌한 발소리가 멀어질수록 영목은 더더욱 악동같이 키득댔다.

“나도 단이 아씨 같은 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만날천날 울리고 놀리게.”

“…심술궂기는.”

“이런 나를 좋아하면서 무얼.”

윤의 한숨이 길어지는 만큼 영목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옷고름 단속 끝났으면 이리 오게. 나 외로우이.”

윤이 길고 긴 한숨과 함께 영목이 느슨히 기대어 손짓하는 창가로 다시 돌아왔다. 영목은 야트막한 창틀을 탁탁 치면서 제집인 양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일거리 준다 하여 냉큼 달려와 농담이나 찍찍 뱉고 있네만… 사실 나는 자네가 걱정일세. 정말 괜찮겠나?”

창틀을 등받이 삼아 게으르게 기댄 영목과 창 앞에 반듯이 선 윤의 시선이 마주쳤다.

“뭘 염려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내 앓아누웠던 도령이 종일 단이 아씨와 운종가를 누비다 온 참이잖나? 사람 등쌀에 다시 몸져누워도 시원찮을 판에 범산 넘어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아.”

윤의 눈이 슬며시 휘면서 저 위를 향했다. 맑은 가을 하늘을 눈동자 가득 담고 내려온 그가 영목을 보며 조금 더 뚜렷이 미소 지었다.

“이젠 뻐근하고 욱신거리는 정도라 참을 만합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파서 못 보던 이를 두 달이 넘어 겨우 만났는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두 번 다시.”

유난히 서늘한 단언이었다. 영목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을 올려다보았다. 설명을 원하는 시선에 윤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때마침 행랑아범이 꽤 묵직해 보이는 꾸러미를 비단 보자기로 단단히 싸서 가져왔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모란댁에게 부탁하셨던 주안상입니다.”

“한 상은 고기에, 다른 한 상은 술에 특별히 신경 써 달라 일렀는데. 그리하였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영목의 곁에 화려한 꾸러미 두 개가 놓였다. 보자기로 동여맨 소반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유혹적인 냄새로다.”

영목이 입맛을 다시며 꾸러미를 슬금 풀었다. 윤이 팔을 뻗어 영목의 손을 슥 밀어냈다.

“아이고, 윤이 도령 때문에 손 부러져서 오늘 범산 못 가겄다.”

“…….”

“범산 못 가니 그 너머 있는 연수산은 더더욱 못 가겄다!”

툇마루에 길게 드러누운 영목의 몸 위로 한심스러워하는 두 쌍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행랑아범이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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