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6화 (6/157)

5화

아이는 열 달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나왔음에도 갓난아기 같지 않게 뽀얗고 통통했다. 남양일은 크게 기뻐하며 윤(赟)이라 이름 붙인 뒤 갓 태어난 아기를 자신의 호적에 양자로 올렸다.

남윤(南赟).

윤이 도령의 탄생이었다.

‘영의정 댁 손녀와 우의정 댁 아들 사이에 20년이 다 되도록 자식 하나 없는 걸 보면 천벌인 게지. 그렇게 유난, 요란을 떨며 조강지처 저버린 혼인을 하더니. 쌤통이다.’

회임에 좋은 온갖 약재를 다 공수해도 우의정 김서량네 담장 안에서는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를 약 올리듯 어린 윤이 도령은 제 어미의 미모와 머리를 쏙 빼닮은 신동이라는 칭찬만이 날로 자자해 갔다.

사정 아는 이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우의정을 비웃을 때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김씨 가문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한 김서량이 뒤늦게 윤을 탐내기 시작하면서부터가 문제였다. 우의정은 윤을 김씨 가문 호적에 올리겠다며 친권을 주장했다. 뻔뻔하게도.

물론 남양일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덕분에 김서량은 윤을 자신의 손자라 우기고 남양일은 자신이 입적한 양자라 주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두 가문 모두 의견을 굽히지 않으니 달리 방도가 없사옵니다. 이 집안 아들이라고도, 저 집안 손자라고도 섣불리 확정 지을 수 없는 일. 따라서 상호 합의를 볼 때까지 남윤에게는 호패를 불허하심이 어떠실는지요.

중재한답시고 주상 앞에 나선 영의정이 내놓은 방책이 이따위였다.

호패는 상놈들도 열여섯 살이 되면 받게 되는 신분 패. 그렇기에 호패를 불허한다는 말은 남윤이라는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손녀를 천덕꾸러기 취급 하는 우의정네도, 소박맞아 놓고 번듯하게 살고 있는 당상관네도 엿 먹으라는 영의정의 심술이었다. 영의정은 김서량과 남양일과 그들의 가문 모두를 공평하게 싫어했으니까.

이 사건 이후로 윤이 도령은 분명히 살아 있는데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딸의 파혼 이후로 줄곧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던 당상관 댁 큰마님은 손자의 호패 문제까지 덮치자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다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잠잠하던 한양이 다시 들썩였다.

‘윤이 도령이 아무리 한양 제일로 손꼽히는 인재라도 호패 없이 과거 시험장의 문턱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

입신양명이 불가한 윤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 닿을 수 없는 권력에 갖다 묶으며 안타까운 척 조롱하는 것. 이것이 요즘 비단 도포 걸친 양반들의 소일이었다. 남씨 가문 사람들에게 윤이 도령의 호패가 얼마나 큰 한인지 빤히 알기에 그들은 더 신나게 떠들어 댔다.

‘하여튼 인간들 참 못됐다니까. 우의정네 집안이 권력에 눈멀어 남인혜를 내친 걸… 그래서 아비 없이 태어나야만 했던 윤이 도령을 두고 왜 그딴 입방아를 찧는지, 원.’

창식 아범은 폭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창식 아범의 한쪽 귀는 여전히 윤이 무어라 대답하는지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이런 제 얄팍함이 못 견디게 부끄러워졌다. 자신도 끊임없이 입방아를 찧어 대는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놈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색색으로 기워 만든 조각보 보자기로 개다리소반을 예쁘게 싸면서 창식 아범은 고개를 푹 숙였다.

두 남자의 분위기가 무거워질수록 단의 뺨은 더 뾰로통하게 부풀었다.

“아, 답답해! 소문의 진상이 무언지 속 시원히 대답 좀 해 주세요!”

단의 자그마하고 통통한 손이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자신의 명치를 두드린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윤의 입가에 흐릿한 곡선이 매달렸다. 윤의 얼굴이 풀어지자 단은 조금 더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어머니도 남들 입방아 찧는 걸 가만 듣기만 하지 말고 왈패라도 사서 거름통에 처박으라고 하시잖아요. 오라버니가 아무 말 않고 계시니 더 신나서 온갖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거라고요.”

어린 누이의 마음 씀이 기특하여 윤은 그녀의 뺨을 톡 건드리며 달랬다.

“요란히 손 휘두르는 이에게 내 손을 마주치면 손뼉이 되지만 홀로 팔을 휘젓게 두면 무안하여 곧 그만두기 마련이야.”

“그래두요!”

“무엇보다…….”

윤은 창식 아범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연유 있는 소문인지, 근본 없는 소문인지 구별하는 것도 우리 장사꾼들의 소양이란다.”

단에게 건넨 답이었으나 말 속에 담긴 뼈는 창식 아범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창식 아범은 철렁 내려앉는 가슴에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장사치 아니 될 건데요?”

복잡하게 살 생각은 요만치도 없는 단이 헹, 하고 코웃음 쳐서 얼어붙은 공기를 단숨에 녹였다.

“단아는 어머니랑 오라버니가 고르고 고른 사내와 혼인하여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건데요?”

어린 누이의 깃털 같은 대꾸에 살얼음 바스락대던 윤의 안광이 누그러졌다.

“나쁘지 않은 장래 희망이다마는.”

“나쁘지 않다니요? 단아는 꼭 그리 살아야 한다고 오라버니가 가르치셔 놓고선.”

“…밖에선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고도 가르쳤건만.”

단단히 매듭지은 보자기의 모서리를 말아 꽃 모양을 내는 창식 아범의 손 위로 윤의 나지막한 한숨이 스쳤다. 십년감수한 창식 아범의 한숨도 그 위를 덮었다.

“어쨌든요. 말 돌리지 마시구요. 오라버니는 지금 얼음물 속이어요, 용궁이어요?”

끝난 줄 알았던 추궁이 끝을 보이지 않고 이어지자 윤은 고개를 저으며 단을 안아 들었다. 당연한 제 자리인 양 너른 어깨에 얼굴을 기대면서 단은 다시 윤의 갓끈을 손에 돌돌 말았다.

“오라버니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그것만 알려 주시어요. 나중에 또 떠드는 이들 있으면 이 단아가 오라버니 대신 확실히 말해 줄 테니까요.”

“내 품에 안기어서도 이상한 걸 묻는구나. 나는 지금 한양 운종가에 있지 않니? 심술보 커지는 만큼 날로 무거워지는 단아와 함께.”

마침내 윤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추궁을 단칼에 일축했다.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겠다 싶어 내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창식 아범은 머쓱하게 눈을 굴리며 보자기의 매듭에 열과 성을 기울이는 척했다.

매듭 꽃에 노리개를 걸어 장식하며 생각해 보니 윤의 말이 맞았다.

‘소문을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장사치의 소양이라……. 윤이 도령은 참말이지, 어찌 저리 바른 말만 할꼬.’

반성의 한편으로 창식 아범은 더더욱 윤의 재능이 아깝게 느껴졌다.

‘에이그, 윤이 도령이 호패만 있었어도…….’

저 외모, 저 머리, 저 재산을 가지고선 남들 다 있는 호패 없이 살아야 하는 본인 속은 오죽할까.

창식 아범은 멋들어지게 포장한 소반 위로 한숨을 폭폭 끼얹다 말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도련님, 둘 다 꼼꼼히 싸매었습니다. 저는 잠시 정산 보러 들어가니 천천히 둘러보다 살펴 가십시오.”

“그러시게. 마음 써 주어 고맙네.”

“에그. 그런 말씀 마십시오.”

허리 숙여 꾸벅 인사한 창식 아범이 잰걸음으로 멀어졌다. 그가 미닫이문을 드륵 밀고 들어가자 볕 좋은 마당에 갑작스레 적막이 감돌았다.

윤이 마당 구석에서 손을 모으고 서 있던 종자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주막 앞에서 윤이 명령했던 일을 금세 마치고 돌아와 그림자처럼 윤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이리 빨리 돌아올 만한 사안이 아니었는데, 하면서도 윤은 길게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윤에게 있어 그런 주정뱅이는 길게든 짧게든 머릿속에 담아 두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저급한 인간이었다. 윤은 작게 도리질을 쳐 주막에서의 일을 털어 버리고 종자에게 할 일을 일렀다.

“안으로 따라 들어가 셈을 치러라. 소반값은 흥정 말고 창식 아범이 부르는 대로 넉넉히.”

“예, 도련님.”

“나는 단아와 저잣거리 조금 더 둘러보고 들어가겠다. 너는 셈 치른 뒤에 곧장 소반 들고 집으로 가거라.”

없는 듯이 서서 윤의 부름만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집에 가서는 모란댁에게 저 상으로 주안상 알차게 꾸려 달라 하렴.”

“예. 그리하겠습니다.”

“상 차릴 때 큰 상은 고기에, 작은 상은 술에 특히 신경 쓰라 하고.”

“예, 도련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조아린 종자가 뒷걸음질로 물러나 창식 아범을 따라 들어갔다. 유난히 속눈썹이 기다란 윤의 눈이 미닫이문 안으로 사라진 두 남자를 무심히 좇았다. 무언가 찜찜한데 연유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제 댕기 사러 가요.”

그가 불안의 원인을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단이 청나라 비단을 파는 선전(縇廛)이 있는 방향으로 검지를 힘차게 내뻗었다. 윤은 자그마한 손이 가리키는 방향 대신 면주전(綿紬廛)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면주전 쪽으로 가세요? 선전으로 아니 가시고요?”

“선전에서 파는 비단보다야 남가 상단의 비단이 훨씬 좋은데 무어 하러 선전을 가니? 우리 집 울타리 밖에서 살 거라면 면주전이지.”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끄덕여졌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부루퉁하게 부푼 뺨이 귀여워 윤은 손끝으로 통통한 볼을 툭 건드렸다.

“이제 보니 우리 단아는 청나라 비단이 가지고 싶었던 게로구나?”

“…아니어요. 그냥 학 수 놓은 댕기가 가지고 싶은 거지요.”

“언제는 모란 수가 제일 예쁘대 놓고?”

“오라버니 서안 서랍에 있는 그 모란 수 댕기가 예쁘다고요. 오라버니께서 제게 모란은 너무 어른스럽다 하시며 아니 주시니까.”

윤이 단의 볼을 톡톡 두드리다 손을 옮겨 가 코끝을 가볍게 눌렀다. 그제야 단이 “에이!” 하며 얼굴을 풀었다.

“그럼 명주에 학 자수 놓은 댕기랑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광통교 아래 걸린 그림 구경까지 하고 집에 가기예요.”

“그러자꾸나.”

윤은 사람 많은 곳에 오래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쑥덕이는 소리도 따라오는 눈길들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뿐, 정말 아무렇지 않을 리 없기에. 그런 윤에게 운종가 구석구석을 돌다 들어가겠다 약조하게 할 수 있는 이는 천지를 통틀어 단 하나뿐이었다.

어린 아씨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라버니가 저에게만 유난히 다정하다는 사실만은 똑똑히 알았다. 조금 미안하면서도 꽤 자랑스러운 기분이 된 단은 눈치껏 밀어 두었던 지난 화제를 다시 슬그머니 끌어왔다.

“오라버니는 아까 그런 질문이 싫으세요?”

“유쾌하지는 아니하지.”

“음, 그럼 앞으로는 아니 할게요.”

“고맙구나.”

윤이 도령은 갓끈을 조몰락대는 단을 더 단단히 고쳐 안은 뒤에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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